<김경남의 보은기> 1편의 글이 길어서 본 회의 후반부 '1. 권정인(權貞仁)씨-<한국민주화 기독교 동지회> 동경 자료센터'는 두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1988년에 들어서자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외국에 나가 있는 선, 후배들이 본국에 들어가는 길에 동경에서 내려 나를 찾아 주었다.
미국에서 후배 김하범 씨, 서경석(徐京錫: 전 <경실련> 사무총장) 선배, 호주에서부터 심재권(沈在權;현 <새정치민주연합> 국회의원) 선배가 찾아와 하루 밤을 보내며 위로를 해주었다. CBS 사장 김관석 목사님의 차남 김하범(金河範) 씨는 아버지로부터, 서경석 선배는 <민주동지회> 미국지부 고(故) 구춘회(丘春會) 선생으로부터, 심재권 선배는 호주 학술모임에 참석 차 가신, 고(故) 안병무(安炳茂) 교수님으로부터 각각 <민주 동지회> 동경 자료센터와 나에 대해 들었다고 한다. 특히 서경석 선배는 미국에서 YMCA를 중심으로 시민운동을 하였는데, 국내에 들어가면 시민운동을 시작하려는데 내 생각은 어떠한가를 의논해주었고, 호주에서 박사과정을 하던 중 귀국한다는 심 선배는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정치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고 의논하였다.

▲ 유니온 신학교 유학을 마치고 귀국차 들른 김하범 군과 함께

서경석 선배가 서울 공대 대학재학 시절, 윤조덕, 신철영 등과 함께 조직한 <산업 사회 연구회>(<산사연>)와, 당시 법대·상대·문리대 통합 서클로서 고(故) 나병식, 강영원, 김효순(이상 문리대) 박원표, 최혁배, 나(법대), 김문수, 조기대(상대) 등이 활동하던 <후진국 사회 연구회>(<후사연>)와는 형제 서클처럼 교류와 협력관계를 유지하다가, 1972년 ‘위수령’으로 캠퍼스가 문을 닫아 <산사연>은 새문안 교회로 <후사연>은 <서울제일 교회>로 들어가 교회 내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대학생부로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서울제일 교회>의 담임 목회자들이 1973년 ‘남산부활절 사건’과 1975년 ‘선교자금 횡령사건’ 등으로 투옥 되었을 때, 공동기도회를 개최하는 등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또한 그는 나에게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같이 옥고를 치룬 동지임과 동시에 존경하는 선배였다.

그런 그가 1979년 8월의 ‘YH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1981년 어느 날 , 나상기, 성해용, 이광일 등 우리와 같이 저녁 회식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미국에 유학 가겠다는 말을 꺼내었다. 그 당시 서 선배를 우리 시대의 KNCC 총무로서, 기독교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갈 선배로서 신뢰하고 있었던 우리는 모두 어안이 벙벙하였다. 우리의 여러 가지의 설득에도 굽히지 않는 서 선배에게 나는, “서 선배! 돌아 와서, NCC 총무할 생각을 하지 마시오. NCC 총무는 내가 할 것이요!” 하는 막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동석(同席)한 김성재 선배가, 보다 못해 “가는 사람, 맘 편히 보내자.”는 말로 중재(仲裁)를 했지만, 우리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후에 서 선배가 “김경남이 NCC 총무하지 말라고 해서...”라고 섭섭한 마음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서 선배는 신학을 마치고 잭슨 목사 등의 영향으로 한국도 시민운동을 시작할 때라는 결론을 내리고, 아직 공부를 마치지 못한 형수님인 신혜수(申惠秀)씨를 홀로 남겨두고 10세 된 아들과, 13세 된 딸을 데리고 귀국하던 차에 일부러 동경에 내려 나를 찾아 준 것이다.

그리고 심재권 선배는 <후사연>을 조직한 장본인이었고 1971년 <서울 대학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장기표, 조영래, 이신범 등과 구속된, 그 시절 우리들의 영웅이었고 멘토이었다. 1980년 일부로 ‘YMCA 사건’으로 도피 중인 나를 수소문해서 고(故) 나병식 군과 돈암동 <뉴욕 제과점>에서 만난 자리에서, 심 선배는 운동권은 YS와 DJ 중 누구를 먼저 대통령 후보로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YS를 지금의 군사정권과 미래의 문민정권의 과도기로 세워 민주정권의 토대를 세운 뒤, DJ로 하여금 민주화를 완성시키도록 하였으면 좋겠다는 우리들에 의견에 대해 심 선배는 마냥 DJ를 세워야 한다고 우리를 설득하려 했고, 결국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헤어진 적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미국에 간 서 선배는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서울하늘에 있었던 심 선배도 우리를 만나지 않았다. 어쩌면 머리가 커 선배의 말을 따르지 않는 우리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는 두 선배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치지 못한 채였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8년여의 세월이 지나, 그 두 선배가 동경의 나를 찾아와 준 것이었다. 
서 선배는 지금이야 말로 우리의 민주화 운동이 정치운동을 지양하고 시민운동으로 전향(轉向)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나는 1988년의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민주화 운동을 완성시켜야 하고 아직 시민운동은 시기상조이니 국내에 들어가면 동지들과 깊은 논의를 해서 결정할 필요가 있겠다는 의견을 피력 했다.
 
한편 같이 유학을 하고 있는 형수님을 호주에 남겨 두고 우선 국내 정세를 알아보기 위해 잠시 귀국한다고 하면서, 나의 견해를 물어서 나는, 지금이야 말로 선배가 정치를 시작할 적기(適期)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서 선배는 입국하여 <경실련>을 조직하여 시민운동을 시작하였고, 심 선배는 또 다시 다까다노바바 내 우거(寓居)를 찾아와 아직 정치는 시기상조이니 박사학위를 끝내고 돌아와야겠다고 하며 호주로 돌아갔다.

서경석 선배는 판단력이 빠르고 이론이 정연하였으며 그 위에 일단 결정을 내리면 끈질긴 설득력과 추진력으로 일을 이루고 마는 사람이었다. 1970년대 초 교회 학생청년들의 민주화 운동은 <KSCF>, 단일 축(軸)이었다. 위수령으로 터전이었던 캠퍼스를 잃은 대학 사회과학 써클들이 교회를 베이스캠프로 사회과학 써클활동을 전개하게 됨으로 교회 중심 청년운동 그룹 등이 생겨났는데, K는 명칭처럼 기독학생 단체이었기 때문에 이 교회 청년들을 끌어안기에는  적절치 않았다. 이런 시기 당시<KNCC> 청년 간사를 맡고 있던 서 선배는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Ecumenical Youth Council>)을 결성하여 교회 청년 세력을 결집하여, <KSCF> 와 두 축을 이루어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터전을 만들었다. 그 후, 개신교·가톨릭 운동단체들의 협의체로 조직되어 오던, 신생(新生) <사선>의 총무를 맡아 ‘YH 사건’ 등의 민중 투쟁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우리 후배들은 서 선배야 말로 미래 우리 세대의 <KNCC>총무가 되어 에큐메니컬 운동의 지도력을 발휘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반면, 심재권 선배는, 지나칠 정도로 신중(愼重)하고 심사숙고하여, 주변의 모든 상황을 판단하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는 유(柔)한 스타일이었다. 어찌되었든 두 사람 다 내 견해와는 다른 방향으로 자신들의 진로(進路)를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진로(進路)를 앞두고 껄끄러울 수도 있을 후배인 나의 생각을 물어준 것만 해도 나는 고마웠다.
 
1989년에 들어서서 국내 정세가 완화되어 해외여행이 비교적 수월하게 되었는지, 국내로부터도 지인(知人)들이 나를 찾아주기 시작하였다.
<LG> 법무실장이던 30년 지기의 벗이요 동지인 박원표(朴元杓;전 <LG>상임고문)군이 미국 연수 갔다 오는 도중 동경에서 내려 1박2일을 나와 함께 지내 주었다. 그는 1979년 ‘YMCA 위장 결혼 사건’으로 도피생활을 할 때, 위험을 무릅쓰고 맨 처음으로 나를 숨겨주더니, 이번에도 맨 처음으로 나를 찾아 주었다. 

▲ <민주동지회> 회장 박원표 군, 우에노 공원에서

그 뒤를 이어, 조지송(趙志松; 전 영등포 산업선교회> 총무) 목사를 필두로 하여 오충일(吳忠一; <기독교대한 복음교회> 증경총회장) 목사, 박일성(朴日成;전 <감리교 인천 산업선교회> 총무)목사, 나상기 선생(전<기독교 농민회 총연합회> 사무국장) 씨, 임흥기(林興基; 전 <KNCC> 부총무) 목사, 김병균(金炳均; 전<목회자 정의 평화 전국협의회> 증경 회장)목사 등이 외국 회의를 참석했다가 동경에 내려 나를 찾아 주었다. 1986년 5월 망명하듯이 출국하는 나에 대해 섭섭해 하던 그 동지들이 그때는 이미 나의 소재를 알게 되었나 보았다. 

▲ <영등포 산선> 총무 조지송 목사(오른쪽에서 두번째)와 <아시아 자료센터> 관장인 야노 선생과 함께<자료센터>에서

▲ 인천 산선 총무 박일성 목사와 복음교회 총회장 오충일 목사 부부와 함께 하코네에서

▲ <목정평> 회장 김병균 목사와 함께 하코네에서

그들을 안내하는 나의 기행 일정은 하코네(箱根) 하루 코스였다. 신주쿠(新宿)에서 사철(私鐵)을 타고 하코네 유모토(箱根湯元)까지 가서 하코네 프리 패스(Free-Pass;일일 승차권)를 이용해, 등산 버스, 등산 철도, 해적선, 케이블카를 타고, 후지산을 바라보며 하코네를 일주하는 하루 코스였다. 이것은 내가 알고 있던 유일한 관광 코스로, 이 코스만 다니다 보니, 후지산을 사랑하게 되면 일본 사람이 된다는 말처럼 어느덧 나도 일본인이 돼버리면 어쩌나 하고 속 좁은 염려를 하기까지 되었다.
 
특히 임흥기 목사는 마음먹고 일주일 휴가를 나에게 투자(投資)하였다. 그는 1975년 <수도권> 간사 시절부터 1985년 <사선> 실행위원 시절까지 나와 같은 길을 걸어 온 친구요, 동역자(同役者)였다. 1982년 그와 나는 목사 안수 동기이기도 했다. 이런 나의 특별한 벗이요 동지인 임 목사를 권정인 씨도 알기나 하는 듯 특별한 대접을 해 주었다.
 
권 선생 부부는 가와사끼 자신들의 자택에서 하룻밤의 친교시간(親交시간(時間)을 보낸 후, 우리를 나가노(長野) 시가(媤家)의 별장(別莊)으로 안내하였다. 도요다 씨가 운전하는 승용차로 5시간이 걸려 도착한 일본 북 알프스 동해 쪽 산기슭, ‘곰 주의’ 표지판이 곳곳에서 우리를 겁먹게 하는, 울창한 삼나무 숲속 2층 별장에 짐을 풀고 첫 날을 쉬고 다음 날, 새빨간 홍엽(紅葉)으로 불타는, 일본 제일의 명승지(名勝地)의 가운데서 손가락 꼽히는, 호다카산(橞高山) 공원, 옥색 빛깔의 호숫가를 일주하는 환상적인 도보 코스였다.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어려웠던 지난 10여년의 시절이 되돌아보며, 이렇게 이런 호사(豪奢)를 누려도 되는가 하는 자문(自問)을 하기도 했다.
 
1990년, 가와사키 이인하 목사님이 안식년(安息年)으로 당신의 모교(母校)인 캐나다 토론토 대학에 연구차 떠나실 때, 나에게 <가와사키 교회>의 주일 대예배 설교를 맡기셨다. 국내에서도 설교라고는 별로 할 기회가 없었던 특수선교 목사인 나에게는 큰 배려임과 동시에 무거운 부담이었다. 내가 원고를 작성하면 권 선생이 일역을 해주었다. 나는 그 일어 설교 원고를 수 십 차례 반복하여 연습하였다.
그렇게 하여 겨우 설교를 마치고 어떻게 예배가 끝나고 설교단에서 내려온 나에게, 배 중로 장로는,
“목사님! 설교가 어려워요~”
하였다. 설교 내용이 어려웠던 건지, 내 일본어를 듣기가 어려웠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미국의 한 교회에서 설교를 마치고 내려 온 목사에게
“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어요~”
라고 한 어느 할머니가,
“그런데 한국말이 영어하고 비슷해요~”
했다는 일화(逸話)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권정인 씨는 1989년 8월 입국하지 못하는 장남인 나를 위하여 국내의 어머니를 초청해 내어 61세의 생신 잔치를 베풀어 주기도 했다.
권정인 씨는 이렇게 4년 반 동경 생활을 하는 동안 <자료센터>의 동료이자, 안내자이었으며 누이처럼, 어머니처럼, 나를 돌보아 준 가장 큰 은인이었다.
요즈음, 어머니, 시어머니, 작은 어머니 세 분을 요양원에 모시고 매 주말이면 양주(兩主)가 번갈아 병문안 가야 해서, 외국여행 한 번 하지 못하고 있다는 권정인 씨는 나의 보은기행(報恩紀行)에의 초대에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을 내보겠다고 응답해 주었다.

<필자 소개> 김경남 1949년 (66세) 전남 완도 생 광주제일고등학교, 서울법대, 한국신학대학 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한국민주화기독교민주동지회> 동경자료센터 관장,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무주<푸른꿈고등학교> 교장, <한국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업본부장, <한국교회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경남  gisoo93@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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