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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모에서 창녀로, 성적 수탈과 죽음<버려진 죽음, 버려진 목소리 3>
임미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 승인 2015.06.30 15:39

식모는 여러 고용 관계 중 가장 사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 그 뿌리가 과거 밥하는 계집종을 뜻하는 식비(食婢)였다는 데서, 그리고 고용주가 가장 근원적인 1차 집단인 가족이라는 데서 이 같은 ‘사적’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

고용 형태가 사적이다 보니 식모에 대한 수탈도 매우 사적인 형태로 이뤄졌다. 여기서 ‘사적’이라 함은 고용 관계를 넘어서 인신 예속적인 수탈이 이뤄진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같은 수탈을 공적 기구가 방기했다는 의미다.

식모에 대한 사적 수탈 중에서도 가장 개인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이뤄졌던 것은 바로 성적 수탈이다. 많은 식모들이 남자 주인의 성적 노리개가 돼야 했고, 그 결과 원치 않은 임신과 강제 낙태, 그것을 감추기 위한 살인과 유기가 뒤따를 때도 있었다.

식모에 대한 성적 수탈은 그 직업에서 떠난 뒤에도 이어지는 일이 많았다. 농촌의 소녀들이 무작정 상경해 식모살이를 하다가 얻는 직업은 버스차장이나 여공이 많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은 경우에는 윤락가로 흘러들었다.

   
▲ 어느 윤락여성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은 기사(동아일보 1962.02.05).
1964년 보건사회부 통계에 의하면 매춘여성 19,986명 가운데 11%가 넘는 2,300명가량이 식모 출신이었으며, 1965년 동두천 지역 매춘여성 195명에 대한 표본조사에서 전직이 식모였던 경우는 26.2%에 달했다.

이 같은 이유에서 1970년대까지 식모는 국가에 의해 ‘잠재적인 윤락녀’ 또는 ‘범죄자’로 취급됐다. 1965년에는 각 파출소에서 식모의 ‘신상카드’를 작성하겠다고 하며, 이유를 무단가출과 이에 따른 타락, 유괴, 절도, 범죄 예상 때문이라 밝혔다(김원, 「근대화 시기 주변부 여성에 대한 담론」, 『아시아여성연구』 제43집 제1호).

식모살이를 하던 많은 식모들이 억울한 죽임을 당하거나 한 맺힌 자살을 선택했듯이 창녀 또한 그랬다. 차이라면 창녀들의 경우 식모에 비해 자살은 적고 타살이 비교적 많다는 것이다.

1950년대와 60년대 신문을 검색하면 “식모가 음독자살”, “식모가 투신자살”, “식모살이 비관자살”처럼 같은 제목인데 내용이 다른 기사가 제법 많이 눈에 띈다. 간혹 “분신유행 식모도” 같은 기사도 보이는데 1963년 베트남 승려들의 잇따른 분신이 국내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붙여진 제목이다. 식모란 직업 탓에 그 죽음조차도 얕잡아 보는 뉘앙스가 깔려있다.

식모의 자살은 발생건수가 많을 뿐만 아니라 둘 또는 셋의 집단자살도 제법 있다. 식모살이를 비관해 두 처녀가 얼싸안고 자살하고(1958.05.22), 식모와 여공으로 보이는 20세 전후의 처녀 넷이 한꺼번에 음독하고((1965.09.21), 주인에게 돈 5만환을 훔쳤다고 추궁당한 뒤 14세와 18세의 두 자매가 함께 죽기도 했다(1959.09.16).

창녀의 경우 식모처럼 “식모가 음독자살”, “식모가 투신자살” 같은 정형화된 제목들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을 감안할 때 식모처럼 자살이 많았던 것 같지는 않다. 또 “갈 곳 없는 창녀 신세비관 자살”(경향신문 1958.06.16) 등으로 기사제목도 비교적 구체적이다.

창녀의 자살이 식모에 비해 적은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으나 적어도 성적 ‘자의성’에서는 창녀가 식모보다 나은 위치였다는 것도 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식모 자살의 상당수를 초래한 성적 관계와 임신이 집주인이나 그 아들에 의해 이뤄진, 강제 또는 반강제적인 것이었다는데 비해 창녀의 윤락행위는 어느 정도 자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남녀의 애정관계와 이에 따른 성적 접촉도 식모에 비해서는 다분히 자발적이고 독립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창녀의 상대적으로 적은 자살건수의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타살에서는 상황이 역전된다. 죽임당한 창녀의 상당수가 바로 애정관계에 있던 남자 또는 손님으로 온 남자에 의한 타살이다. 또 그 같은 죽음에는 얼마 되지 않는 금품의 강탈이 뒤따랐다.

다른 남자와 교제한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때린 뒤 교살하고(1964.07.21), 함께 자다가 목을 졸라 죽이고(1966.06.27), 집 나온 10대가 유흥비를 위해 동침하던 중에 목을 졸라 죽이려다 실패하고(1967.04.01), 남산으로 바람 쐬자고 유인해 살해하고(1967.11.06), 동거를 거절한다고 살해하고(1968.06.15), 결혼하자고 꾀어 시골에 끌고가 살해했다(1969.03.26). 그리고 그 남자들 모두 여자가 가진 돈을 뺏어 달아났다. 한편으로는 치정살인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강도살인이다. 스스로 죽지 않는 한 견디기 힘든 식모살이에서 탈출해 찾은 자유의 대가치고는 참으로 가혹하다.

식모살이를 하다 창녀가 된 어느 여인의 기구한 자살 하나도 눈에 띈다. 그 죽음이 휴지통에 처박힌 듯 기사의 꼭지 제목도 <휴지통>(동아일보 1962.02.05)이다.

창녀 한 명이 남자와 동침한 다음 날 자살했다. 그녀는 세 살 때 양친을 여의고 거리를 방황하다가 대구의 어느 집에서 식모살이를 했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오빠를 찾기 위해 각처를 떠돌다가 창녀가 되어 춘천까지 오게 됐다. 11월 어느 날 손님으로 오게 된 남자와 동침을 하였는데, 남다른 정을 느꼈던지 남자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했다. 다음 날 그녀는 남자를 보내고, 윤락여성선도위원회 회장 앞으로 한 통의 유서를 남긴 뒤 수면제를 먹고 자살했다. 어젯밤 그 남자가 바로 자신의 오빠였기 때문이다.

임미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전문위원)  ecumenian@webmast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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