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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삶의 자세<김명수 칼럼>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 승인 2016.02.22 12:06

하느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4:4)

For everything created by God is good, and nothing is to be rejected if it is received with gratitude.
(1 Timothy 4:4; NASB)


본문 말씀은 하느님께서 지으신 세계에 대한 절대 긍정의 창조신학이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천지만물은 다 선하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버릴 것이란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요. 왜 그런가요? 선하신 하느님께서 선하게 지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 니체는 기독교에 의해 사유화된 배타적인 하느님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렸어요. 세상의 한 쪽 편만 드는 기독교의 하느님에 대해 죽음을 선언한 것이지요.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쓴 책 가운데 『이 사람을 보라』가 있는데요. 이 책에서 니체는 유명한 말을 남기지요. “있는 것 중에 버릴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없어서 좋은 것이란 없다.”

니체의 이 말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만물은 근원적으로 선하다. 긍정적이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이 세상에 버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라고 하는 본문 말씀과 서로 통하는데요. 하느님의 피조세계에 대한 절대 긍정 신학이 바울의 말씀 배후에 깔려 있어요.

이 말씀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천적으로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과도 통하는 말씀이지요. 맹자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선하도록 프로그래밍화 되어있습니다. 그에게 선은 백성을 평안케 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는데요. 만약 권력자가 선천적인 선을 무시하고 백성의 뜻을 거역하며 반민反民 정치를 편다면, 갈아치워야 한다는 것이 그가 말하는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의 요체입니다.    

서구 기독교 신앙은 어찌 보면 플라톤의 이원론dualism 철학이 종교의 옷을 입고 나타난 현상이라고 니체는 보았는데요. 플라톤 철학의 핵심은 어디에 있나요? 이원론입니다. 세계를 둘로 쪼개어놓고 보지요. 선과 악, 빛과 어둠, 실체와 그림자, 진리와 거짓,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이 그것입니다. 세계를 이러한 서로 이질적인 두 세력 간의 갈등과 투쟁장소로 보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원론을 기독교는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니체는 생각했어요. 이 세상을 구원과 심판, 축복과 저주, 하느님과 악마,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으로 나누고, 이 두 세력 간의 대결장소로 그는 보았어요. 하느님은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고 멸망시키는 배타적인 분이었지요. 이런 식으로 기독교는 하느님을 사유화私有化하여 자기편으로 만들었다고 본 것이지요.

니체는 기독교에 의해 사유화된 배타적인 하느님에 대해 사망선고를 내렸어요. 세상의 한 쪽 편만 드는 기독교의 하느님에 대해 죽음을 선언한 것이지요.

이에 저항하여 니체는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한 축軸에 주목했어요. 이 세계는 음과 양, 빛과 그림자, 영혼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어둠과 그림자는 무시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인정하고 포용해야 하는 존재의 또 다른 차원임을 본 것입니다.

존재의 어두운 측면, 이 세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고통과 아픔의 측면을 포용하는 절대 긍정의 철학을 니체는 펼쳤던 것이지요. 니체는 인간의 본성을 자기 초월 능력에서 찾았습니다. 자기극복 과정을 통해서 부단히 상승上昇해 가는 데서 인간의 본래 면목을 찾은 것이지요. 나와 다른 타자他者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가운데서 자기 본성을 끊임없이 확장해가는 존재를 일컬어 니체는 위버멘쉬(Übermensch)라고 정의했습니다. 흔히 초인超人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요. ‘바람직한 인간’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이를 니체는 기독교 신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이지요.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께서는 엿새에 걸쳐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1장). 만물을 두루 살펴보시고 매우 흡족해하시며, 첫 마디 탄성을 지르셨는데요. “토브 메오드(tob meod)”가 그것입니다.(창1:31)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에는 부족한 것이나 모자란 것이 없고요. 완전무결하다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It was very good.”(King James Version) 그리고 개역성경에는 “심히 좋았더라!”로 번역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지으셨습니다. 다양한 모습 그대로 부족함 없이 완전하고 아름답게 지으셨어요. 하느님의 피조물 중에 없어서 좋은 것이란 하나도 없고요. 버릴 것도 하나 없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절대 긍정이 성경의 기본 입장임을 알 수 있어요.

   
▲ 하나님께서는 인연과보에 따라 천지를 만드시고, 사시사철로 돌아가도록 조립을 하셨어요.

하느님께서 부족함이나 모자람 없이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그 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찌하여 만족을 느끼지 못하나요?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고 있나요? 산다는 것은 일의 연속이지요.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러저러한 일을 겪게 되어 있어요. 일은 그냥 일일 뿐이지요. 쉽고 힘든 일이 따로 없습니다. 좋고 궂은 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지요.

원하는 것을 얻으면 좋고, 얻지 못하면 나쁜가요? 그렇지 않지요. 얻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만도 아니고, 얻지 못했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복이 화가 되기도 하고, 화가 복이 되는 것을 우리는 살면서 종종 겪기도 합니다. 구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서 지나치게 좋아할 것도 없고, 얻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기죽을 필요도 없는 것이 인생사이지요.

삶은 선택입니다. 무엇을 선택을 하는가? 중요합니다. 헌데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자기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선택한 것을 자기가 책임지는 자세를 가져야 자기 인생을 주인으로 살게 되는 것이지요.
선택은 내가 해 놓고, 책임은 남에게 전가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편 탓, 아내 탓, 부모 탓, 자식 탓으로 돌립니다. 환경을 탓하거나, 사주팔자를 탓하는 사람도 있어요. 선택은 내가 해 놓고 책임을 심지어는 하느님께 떠넘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지 않는 것이지요. 

벌을 받지 않으려면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하지 않으면 됩니다. 법을 어겼으면 벌을 받으면 됩니다. 복을 받으려면 복을 지으면 되고요. 복 짓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복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앞으로 복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금부터 열심히 복을 지으면 될 것입니다. 

식욕을 조절하지 못하고 음식을 입에서 당기는 대로 먹으면서 살 빠지기를 바란다든지, 운동은 게을리 하면서 몸 건강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면, 요행을 바라는 것이지요. 세상  일엔 공짜가 없습니다. 무슨 행동을 하든지 반드시 과보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인연과보는 세상 돌아가는 창조의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연과보에 따라 천지를 만드시고, 사시사철로 돌아가도록 조립을 하셨어요. 봄이 오면 땅 속에 잠자고 있던 고 있던 생명의 씨앗이 움트지요. 싹이 돋아나고 파릇파릇 새순이 올라오지요.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만발하게 되면,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됩니다. 여름이 오면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고 신록이 우거집니다. 울창한 숲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풍요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가을은 어떤가요? 푸른 나뭇잎들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어가지요. 강가에는 갈대숲이 파도물결처럼 일렁이고, 들판에는 오곡백과가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수확의 계절을 맞이하게 되지요. 붉은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고 가을걷이가 끝난 텅 빈 들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겨울이 오면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낙엽이 다 떨어지고 나면 산천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만 남지요. 온 생명의 씨앗들은 땅 속에서 동면하게 됩니다. 텅 빈 들판에 눈꽃이 피고 기러기 떼가 남한강 위를 날아가는 것을 보지요. 눈 덮인 들녘과 겨울산은 마음을 고요하게 해 주는 명상의 계절입니다.

봄은 봄대로 아름답고요. 여름은 여름대로 아름답지요. 가을은 가을대로 아름답고요. 겨울은 겨울대로 아름답지요. 사시사철은 있는 그대로 그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습니다. 완전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지으신 이 세계의 참 모습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어릴 때는 어린이 나름대로 아름답고요. 청년은 청년 나름대로의 아름답지요. 장년은 장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고, 노년은 노년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이제 제 나이가 칠순이 되었는데요. 눈도 귀도 전에 비해 어두워졌습니다. 생각하는 것도 행동도 느려졌지요. 허나, 저는 지금 이대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정상으로 생각합니다. 아마도 이 나이에 청년시절처럼 눈이 초롱초롱하고 귀도 잘 들리고 행동이 날렵하다면, 그것은 좋아 보이기보다는 오히려 비정상적인 상태로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계를 부족한 것 없이 있는 그 자체로 완전하게 지으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부족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부족하다는 느낌이나 주관적인 생각이 있을 뿐입니다. 예쁘고 추한 것,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 행복과 불행,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이해는 실제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내 마음이 지어낸 산물들에 불과하지요.

나에게 생긴 일 자체는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좋은 일이 되기도 하고 나쁜 일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학창시절에 한 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학생시위에 참여했다가 최루탄이 정면으로 눈에 맞아 한 쪽 눈의 망막이 다 파열되었어요. 평생을 한 눈으로 살아가다보니, 거리 측정이 잘 안 됩니다. 시야도 훨씬 좁을 수  밖에 없지요. 자전거를 타다가 거리 조정을 못해 낭떠러지로 떨어져 팔이 부러진 적도 여러 번 있었어요.

한 눈으로 생활하다보니 여러 가지 면에서 불편한 점은 있지요. 허나 이를 불행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환경을 탓해 본 적도 없어요. 그나마 한 쪽 눈이 성하니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요. 어떤 일을 당하든지 인생에는 불행한 일이 따로 없습니다.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단지 다행한 일이 있을 뿐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실명한 한 쪽 눈에 집착하여 평생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 것인지, 아니면 성한 한 쪽 눈이라도 있음에 평생을 감사하며 은혜로 살 것인지는 전적으로 나 자신에게 달린 문제였지요. 존재 자체에는 좋고 나쁨이 따로 없죠. 내게 일어나는 일이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좋고 나쁜 것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것들은 행복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열린 마음과 긍정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도 선하고 아름답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부족함이 없고, 허약하면 허약한 대로 부족함이 없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풍족하면 풍족한 대로, 궁핍하면 궁핍한 대로 부족함 없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진정한 자유인으로 사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있고 없음을 비롯한 그 어느 경계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자세로 사는 것이지요.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길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어떤 삶이든 긍정하고, 늘 깨어있는 마음자세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일일호시일日日好時日입니다. 하루하루가 좋은 날임을 알아차리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사는 여러분이 되길 빕니다. 

김명수(경성대명예교수,충주예함의집)  kmsi@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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