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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다시 ‘세상의 숨구멍’ 역할을 해 달라!<이병두 칼럼>
이병두 | 승인 2016.03.07 11:02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의 성역(聖域)’에서 ‘교회 권력의 성역’으로 변신한 명동성당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에 이른바 ‘시월유신’을 만났고, 대통령이 나라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명령하고 국민들을 혼내던 그 무서운 ‘긴급조치’와 더불어 대학 생활을 시작해 졸업할 때까지 그 ‘긴급조치’와 함께 지냈다.

그 시절에는 집회 통제가 엄격해서 열(10) 명 이상이 모이려면 당국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1975년 여름 어느 일요일에는 전국대학생불교연합회(약칭 ‘대불련’) 서울지부 체육대회를 한다고 해서 선후배 ‧ 친구들과 동국대 운동장에 갔다가 정보기관의 방해로 행사가 취소되었는데, 그냥 뿔뿔이 헤어지기 못내 아쉬웠던 우리 일행은 기차를 타고 교외로 나가 막걸리를 양동이채로 들어서 마시며 아무 잘못도 없는 ‘술’에 괜한 화풀이를 하기도 하였다. (그때 화풀이 술을 마셨던 경기 남양주 마석 천마산 기슭의 그 자리가 그리워 다시 찾아가 보니, 이제 커다란 아파트 단지로 바뀌었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불교 신자였고 대학에서도 당연히 불교학생회에 가입해 활동했지만, 그때 불교는 힘이 없어서 그랬던지 이런 상황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어서 답답하였다. ‘종로 5가’로 통칭되는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과 중구 명동의 가톨릭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인 명동성당만이 ‘신앙과 종교의 자유’를 이유로 ‘유신과 긴급조치의 무서운 손길[惡手]’을 피할 수 있었기에, 가끔 기독교회관에서 열리는 목요 ‧ 금요기도회와 명동성당의 시국미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75년 8월에는 고 장준하선생의 영결미사에 참례하러 명동성당에 가서 함석헌선생 등 기라성 같은 분들을 가까이에서 직접 뵙고 감격하기도 하였다.

그때  ‘종로 5가 기독교회관’과 ‘명동성당’ 이 두 곳은 나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답답한 가슴이 숨을 쉴 수 있게 해주는 숨구멍 같은 곳이었다. 나는 이 두 곳을 부러워하며, ‘조계사는 언제나 저럴 수 있을까?, 과연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반신반의(半信半疑)하곤 하였다.

이러던 두 곳이었다. 특히 명동성당은, 1970~80년대의 어두운 시절뿐 아니라 ‘종로 5가’의 역할이 슬그머니 사라진 199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힘들고 지친 이들이 찾아와 마지막으로 의지하는 곳’이었고, 그래서 종교사회학자 강인철 교수의 말대로 ‘한국사회의 취약한 고리’가 어디인지를 알 수 있는 곳이었다.

“1990년대 명동성당의 모습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중대한 함의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1990년대 이후 명동성당으로 몰려든 이들은 제대로 조직화되지 못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정치적으로 대변해줄 곳을 찾지 못하고, 장기간 지속되는 대규모적인 투쟁을 감당할 경험이나 자원은 턱없이 부족하고, 때때로 우리 사회의 무관심이나 편견으로 인해 무시당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아직 사회적 관심사로 공론화되지 못한 허다한 쟁점들, 고통들, 불행들, 욕구들을 성당 들머리와 마당으로 옮겨왔다. 그리하여 명동성당은 정치화될 것을 갈망하는 수많은 경제 ‧ 사회적 욕구와 절규들이 들끓는 용광로처럼 변했던 것이다. 이런 변화는 ‘민주주의의 심화’를 위해 한국사회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한국 민주화의 문제점과 취약한 지점들이 어디인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명동성당은 정치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지지부진한 경제적 ‧ 사회적 민주화의 압력과 욕구가 다양한 집단들에 의해 분출되는 장이었다. 언제든 그곳에 가면 한국사회의 취약한 고리가 어디인가를 당장 알 수 있었다. .." (『민주화와 종교 - 상충하는 경향들』/ 강인철 지음/ 한신대학교출판부. 229 & 230쪽)

▲ 명동성당에서 치러진 이철규 열사의 장례식에 참석한 수많은 학생들 (사진출처=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러나 이제는 명동성당도 더 이상 ‘외롭고 힘든 사람들이 찾아와 어려움을 호소하고 의지하는 곳’이 아니다. 특히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한 뒤로는 명동성당을 찾아가 호소하는 발걸음이 딱 끊겼다. 아니 몇 해 전부터는 이 정도에 머물지 않고 안 좋은 쪽으로 한 걸음 더 나가,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서 마지막으로 찾아든 이들을 성당에서 받아주지 않을 뿐 아니라 강제로 쫓아내는 일까지도 마다하지 않게 되면서, 더 이상 ‘어렵고 외로운 이들을 위한 이타적 성역(利他的聖域)’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대교구의 이익을 위하여 정관계(政官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기적 성역(利己的 聖域)’의 기능은 그와 반비례하여 점점 커져가고 있고, 이와 같은‘명동성당의 변신에 따라 명동 재개발사업과 서소문 순교 성지 추진 등 정권에게서 성과와 이익(?)을 크게 얻어내고 있는 것도 눈에 보인다. 

명동성당이 ‘이타적 성역’의 ‘거룩한 임무’를 포기한 뒤, 그곳에는 더 이상 어려움을 호소하는 현수막도 없고 구호를 외치는 함성도 없다. 이제 어려움을 호소하러“마지막으로 매달려 보자!”며 명동성당을 찾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런 흐름이 꼭 ‘김수환 추기경의 은퇴, 이 한 가지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분이 계셨어도 어쩔 수 없는 흐름일지 모른다. 그 흐름은 강인철의 분석대로, 서울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10개 동의 종교 분포가 ‘가톨릭 -> 개신교 -> 불교’ 순서라는 인구 통계결과가 보여주는 가톨릭 신자의 보수화 흐름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른바 강남(江南) 부자 신도들도 똑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니 그들의 말이라고 해서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의 힘이 교회 안에서 너무 커져서 다른 목소리들을 완전히 누르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것이다.

이런 사정을 십분 이해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있다. ‘박해와 순교’를 늘 거론하는 한국 가톨릭의 상징인 명동성당이 ‘박해’ 받는 이들의 길을 밝혀주는 등불의 역할을 포기하고 그들의 보호자가 되기를 거부한다면 어찌하는가. 김수환 추기경 이후의 추기경 두 분도 늘 ‘박해’와 ‘순교’를 강조하고 조선시대 순교자들을 선양하는 사업에 집착하면서 어찌 하여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박해받는 이들에게는 손을 내밀지 않는가. 아니 도움을 청하며 내미는 이들의 손길을 뿌리치고, 살려달라며 찾아오는 이들을 내쫓는가 말이다.

‘종로 5가’는 이미 오래 전에 ‘이타적 성역’의 역할을 접었다. 아니 어느 순간부터 그곳의 소식이 조용히 사라졌다. 2000년대 이후 명동성당까지도 그 역할을 접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조계종의 본산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가 명동성당의 뒤를 이어 15년 가까이 기꺼이 ‘이타적 성역’의 역할을 맡아주었고 그래서 이 땅의 어렵고 지친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호소하고 의지할 곳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말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 사태를 끝으로 이제 조계사마저(공식적으로는 “앞으로도 사회적 약자를 보듬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미 ‘이타적 성역’이기를 포기하였거나 자발적으로 해체하게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 2016년 현재 명동성당 ⓒ 최진

‘종로 5가’가 외면하고 ‘명동성당’이 못 본 체 하고 ‘조계사’마저 고개를 돌려 버리면, 외롭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이들은 이제 어디에 의지할까. 법률에, 국가에? 법률은 이미 돈과 권력의 조종을 받은 지 오래 되었고, 국가는 서민들을 압박하고 돈 많은 이들을 위해주기에 발 벗고 나서고 있는데 누가 법률과 국가에 어려움을 호소하겠는가.

그나마 마지막 호소를 들어주고, 때로는 권력과 중재 역할을 맡아주던 ‘명동성당’과 ‘조계사’마저 그 소임을 저버리고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권력과 거래하는 데에만 ‘종교 성역’임을 강조하는 ‘이기적 성역’ 정치에 전념하게 되면 이제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 힘없고 외롭고 지친 이들이 더 이상 호소하고 매달릴 곳이 없게 되면, 이들과 권력(국가 권력 ‧ 경제 권력)이 직접 부딪치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릴 수밖에 없다. 두 극단이 부딪히게 될 때에 어떤 결과가 나올지 과거 역사를 조금이라도 아는 이들은 그 답을 잘 알 것이다.

당부한다. 아니 간절히 기원한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 따라, 모든 존재의 안락과 평화를 위해서. 명동성당은 이제 다시 이타적 성역의 제 자리를 다시 찾아서 그 역할을 마다하지 말라! 세상의 숨구멍 역할을 다시 회복하여, 우리 사회의 폐기능이 멈추지 않게 해 달라!

덧붙임: ‘이타적 성역’의 역할을 포기하고 스스로 그 기능을 해체할 때, 자기 교단의 ‘힘’을 과시하는 데에 쓰는 ‘이기적 성역’기능도 힘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출처 : 가톨릭프레스 (http://www.catholicpress.kr/)

 

   
▲ 필자 이병두

 

 

한국외국어대학교 졸업.

불교계 여러 매체에 칼럼을 연재하였으며, 최근 경력은 문화체육관광부 불교 담당 종무관으로 5년 근무하고 2015년 5월 말 퇴직한 뒤 현재는 자유롭게 글 쓰기와 번역으로 소일하고 있다.

역저서에 『담마난다 스님이 들려주는 불교 이야기』, 『영어로 읽는 법구경』, 『북한산성과 팔도사찰』 및 『한국종교를 컨설팅하다』(공저) 등이 있다.

 

이병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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