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넷에 공개된 <조선왕조실록>에서 옮긴 것은 궁서체로 나타내겠습니다. -필자주-

태상왕(太上王)이 별전(別殿)에서 승하(昇遐)하였다. -태종 8년 5월 24일.  

태종 재위기 태상왕(太上王)은 태조 이성계에 국한된 호칭이었습니다. 태조의 승하(昇遐)로 조선왕조의 첫 실록을 펴낼 시기가 드디어 왔습니다. 1년쯤 지나 태종은 실록 편찬에 착수했습니다.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하윤(河崙)에게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수(編修)하도록 명하였다. -태종 9년 8월 28일.

이인임의 인척이었던 하윤(河崙)은 조선 개국 후 이방원에게 밀착했습니다. 정적 정도전에게 굴복하느니, 이방원과 힘을 합쳐 맞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을 제거한 하윤은 태종의 훈구대신으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아래는 위 인용문에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임금이 하윤(河崙)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유관(柳觀),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정이오(鄭以吾), 변계량(卞季良)을 불러 대궐에 이르니 -태종 9년 8월 28일. 
 

유관(柳觀), 정이오(鄭以吾), 변계량(卞季良)은 태종 치세 하윤에 견줄 만한 무게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태조실록> 실록청에서 중요한 결정권을 행사할 상층부의 인물은 하윤 한 사람이었다고 판단해도 무방합니다.  그런데 유관, 변계량이 춘추관에서 사관들과 실록 편찬 실무에 관해 얘기하던 중 이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예전 사기(史記)를 보건대 모두 3대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전조(前朝) 때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태조실록>을 어찌 오늘날에 편수할 수 있습니까? -태종 9년 8월 28일.

3대 후 실록 편찬은, 사초를 심하게는 백년 넘도록 보관만 하자는 얘기가 됩니다. 영조, 정조, 순조 3대만 하더라도 재위 기간을 합치면 110년에 이르렀습니다. 중국 청나라의 경우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는 130년에 달합니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의문입니다. 
3대 후 실록 편찬을 원칙으로 삼았던 전례가 있었는지?

사관들은 상소를 올려 실록 편찬 사업을 정지시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관들의 뜻에 유관, 변계량이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하윤은 사관들의 주장을 근거 없는 것이라 일축했습니다. 충고를 건네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습니다. 

만일 상소하여 청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예전 법을 상고하시오. -태종 9년 8월 28일.
 
하윤의 충고를 춘추관의 사관들은 충실히 따랐습니다. 유가 경전 <서경>을 상고하여 요임금과 순임금의 사적이 당대가 아닌 후대에 정리됐으니, <태조실록>도 그 전례를 따라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당요(唐堯)-요임금-의 일은 <서경(書經)> 우사(虞史)에 기록되어 있고, 우순(虞舜)-순임금-의 일은 하서(夏書)에 실려 있으니 모두 다른 대〔異代〕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태종 9년 9월 1일.
  
중국의 고대 문헌에 의하면, 요(堯)임금은 자신의 두 딸을 어질다고 소문난 순(舜)에게 시집보내, 사위 순(舜)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했습니다. 순임금 때에 정리됐다는 요임금 치세의 역사는 3대 후 실록일 수 없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당대사입니다.
 

순임금은 어질면서 능력도 탁월하다는 평판이 자자한 우(禹)에게 왕위를 계승토록 했습니다. 우임금은 중국 최초 세습왕조로 후대에 알려진 하(夏)나라의 창업자입니다. 따라서 ‘하서(夏書)에 실려 있’다는 순임금의 사적도 당대 역사 기록입니다. 3대 후 역사 기록으로 해석할 여지는 없습니다. 하윤은 아마도 제가 제시한 논리적 접근법으로 반격에 나서라고 태종에게 귀뜸했을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처했습니다. 
   
왕씨(王氏)의 일을 이씨(李氏)가 편수하고, 이씨(李氏)의 일을 후대(後代)에 편수한다는 것이냐? -태종 9년 9월 1일.

단칼의 승부사 태종 이방원다운 반격이었습니다.  
고려 망한 직후에 ‘왕씨(王氏)의 일을 이씨(李氏)가 편수’했던 전례가 있었습니다. 정도전의 <고려사>와 조준의 공민왕 이후의 실록. 그런 식으로 <태조실록>을 펴내자는 것이냐? 사관들은 쩔쩔매면서, 그렇더라도 당대 실록은 불가하다고 답했습니다. 태종이 공자의 <춘추>를 사례로 들어 몰아붙였습니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찬수(撰修)한 것이 정공(定公), 애공(哀公)의 세상에 있었던 일인데, 정공, 애공 때의 일을 아울러 썼으니 -태종 9년 9월 1일.

정공(定公), 애공(哀公)은 공자 살아생전에 노나라를 이끌었던 제후였습니다. 공자의 <춘추>가 당대 실록이었다는 것이 태종이 주장하는 바의 요지입니다. 태조 재위기에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의 실록을 펴낸 것도 당대 실록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3대 후 실록은 이치적으로도, 역사적 사례로도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하면 당시 사관들은 무슨 연유로 <태조실록> 편찬을 늦추려했던 것일까요? 그 까닭은, 태조 7년 8월 26일에 터진 1차 왕자의 난! 뒤로 미루고 싶었을 것입니다. 태종 사후까지 만이라도.

<태조실록> 편수위원장 하윤의 술책은 교묘했습니다. 춘추관 사관들 중 소수를 실록청에 차출, 누가 작성한 글인지 드러나기 쉬운 환경을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참외 사관(參外史官)-7품 이하 실무를 담당한 사관-은 우승범(禹承範), 이심(李審) 두 사람뿐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참여하지 못하였다. 사관(史官)이 하윤(河崙)에게 고하기를, “우리들은 직필(直筆)을 잡고 시사(時事)를 기록하는 자입니다. (중략)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다 참여도 못하게 하니, 두렵건대, 후인(後人)이 더욱 의심할까 합니다.” -태종 10년 1월 11일.   
  
하윤의 통제 하에서 1차 왕자의 난은 ‘정도전의 난’으로 정리됐습니다. 정도전이 먼저 이방원을 죽이려 들어 이방원은 정당방위 차원에서 반격에 나섰다는 것이 태조 7년 8월 26일 기사의 요지입니다. 아래는 실록에 적혀 있는 정도전의 마지막 말입니다.

“예전에 공(公)이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태조 7년 8월 26일.
 
예전은 공양왕 재위 마지막 해인 13924년-공양왕 4년-입니다
정몽주가 공양왕의 신임을 기반으로 정도전, 조준 등 역성혁명파 사대부들을 탄핵, 유배 보냈습니다. 때마침 이성계가 낙마하여 목숨이 위중하다는 소문이 퍼지는 등 정국이 맹렬하게 소용돌이쳤던 시기였습니다. 이방원이 나섰습니다.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척살했습니다.    

그때에 이방원은 정도전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방원과 대립했던 정도전이 위 인용문과 같은 얘기를 했다는 것은 정황상 말이 되지 않은 것입니다. 지난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방식으로 목숨을 구걸했다면 모를까. 1차 왕자의 난에 관한 <태조실록> 기사가 증언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현실정치의 승리자는 역사 기록의 특권도 행사한다는 것.
실록은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것. 

여기서 잠시 이성계와 정몽주의 관계를 살피겠습니다.
둘은 전쟁터에서 두 번 고락을 함께 했습니다. 1364년 삼선, 삼개 형제가 동북면에서 난을 일으켰을 때, 그리고 1380년 황산대첩 때였습니다. 두 번의 전투에서 정몽주는 전황을 중앙에 보고하는 역할을 맡았고, 이성계는 야전군 사령관이었습니다. 

정몽주는 이성계를 ‘고려를 위해 하늘이 내려준 장수’로 칭송했을 수 있습니다. 
이성계는 정몽주를 ‘칼로는 제압 못할 정신의 소유자’로 존경했을 수 있습니다.

정몽주가 이성계와 대립했던 시기는 그의 생애 마지막 딱 1년에 불과했습니다. 그 1년의 시기에 정몽주는 이성계의 맞수일 수 없었습니다. 이성계가 정몽주의 목숨을 앗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한데 이성계는 그런 마음을 먹지 않았습니다. 정도전, 조준 등 측근들이 탄압받자 이성계는 공양왕에게 사직을 청하는 것으로 불편한 심기를 알렸을 뿐입니다. 나아가 이성계는 정몽주의 비보에 격분했습니다. 아들 방원의 불충, 불효를 꾸짖으며 이런 말도 했다고 합니다. 

“우리 집안은 본디 충효(忠孝)로써 세상에 알려졌는데 (중략)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태조실록> 총서 131번째 기사.

<태조실록> 총서는 고려시대에 ‘이안사 → 이행리 → 이춘 → 이자춘 → 이성계 → 이방원’으로 이어지는 일가의 행적을 다룬 것입니다. 위 인용문에서 빨간색으로 나타낸 부분이 의미하는 것은 ‘정몽주에 대한 이성계의 애정’일 것입니다. 

정인택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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