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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목사가 외치는 잡담’의 해석학<교회개혁 담론투쟁 : 한국교회의 정치적 도착>
장효진(연세대학교 종교철학 박사원) | 승인 2016.04.07 13:20
사진 출처 : 서울 신문

나는 소강석 목사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인터넷의 수많은 잡담들 중 하나가 내 귀를 아주 거스르기 전에는. 그 잡담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시작한다. “최근 나는 국가조찬기도회 설교 이후 논란을 겪었다. 사실 나의 설교가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킬 줄은 몰랐다. 깊은 고심과 연구 끝에 다듬고 또 다듬으며 최대한 균형감을 갖춘 설교를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이 후에 잡담은 다음의 잡담이 이어지면서 잡담들끼리 서로 충돌해 아예 거친 소음이 된다. “ . . . 나는 예언자적인 안목을 가지고 시대와 역사를 향한 적용 중심의 설교를 한 것이고 어쩌구 저쩌구.” 귀를 심하게 거스르는 아주 소란스러운 잡담의 충돌이 수그러들 무렵, 곧바로 이어지는 아주 짜증나게 재잘거리는 공명 없는 노이즈. 전체 맥락이 아닌 일부분만으로 자기를 비판한다느니, 비판이 예의와 품격을 가져야 한다느니, 또 자칼언어가 폭력적이기 때문에 기린언어로 바꾸어야 한다느니, 이러쿵 저러쿵. 

내가 ‘잡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혹자는 하이데거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하이데거의 잡담을 이야기하고 있다. 소강석 목사의 자기변증을 잡담이니 잡담들이 충돌을 일으켜 소음을 낸다느니, 재잘거림이라느니 하며 비아냥거렸을 때, 나는 소 목사를 그저 하이데거가 말한 익명적인 ‘그들’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모하나? 소 목사에게 철학 이론을 밑에 깔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 그가 아무리 좋은 직언도 대통령이 안 들으면 소용이 없다고 말 했듯이, 아무리 심도 있는 비판을 시도하려고 노력해도, 혹 그 목적을 어쩌다 달성한다고 해도, ‘그들’이 알아듣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때 이르게 소 목사의 자기변증에 토를 하나만 달아보자. 그것은 다음과 같다. 

내 비판의 원색적이고 무례함은 그저 ‘그들’로서의 소 목사와 소통하기 위해 내가 취하고 있는 고육지책의 한 방편임을 소 목사 자신도 이해해야만 한다고. 그래야 듣는 귀가 없더라도, 혹은 듣기 싫더라도 나의 비판이 소 목사에게 어렴풋이나마 들릴 것이 아닌가? 나의 비판이 갖고 있는 이 원색적임과 무례함의 성질은 소 목사 자신이 대통령의 귀를 열기 위해 늘어놓은 칭찬의 애드리브가 갖고 있는 원색적임과 무례함의 성질과 유사한 것이다. 소 목사의 대통령에 대한 애드리브들은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그가 비교대상으로 삼은 외국의 여성 정치인들에게 무례했고 원색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소 목사가 외국의 여성 정치인들을 비하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한 말을 믿는다. 그러하기에 소 목사를 비하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나의 말도 소 목사는 믿어주길 바란다. 

출처 : 국민일보

이제 본격적으로 ‘소강석의 꽃씨 칼럼’에 실린 소 목사의 자기변증에 대해 비판을 가해보자. 나는 그의 첫 번째 잡담, “깊은 고심과 연구 끝에 다듬고 또 다듬으며 최대한 균형감을 갖춘 설교를 준비한다고 했는데. . .”를 ‘잡담기역’이라고 부르고 두 번째 잡담, 예언자적 어쩌구 저쩌구를 ‘잡담니은’이라고 부를 것이다. 소 목사의 자기변증인 ‘잡담기역’과 ‘잡담니은’은 서로 충돌한다. 이것들은 논리적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상식 안에서 서로 충돌한다. 그래서 유독 기독교인들에게는 아주 짜증나는 소음으로 들리고 있는 것이다. 유독 두드러지는 그 소음은 물론 내가 소 목사에게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소음을 발생시키는 ‘잡담기역’과 ‘잡담니은’의 충돌을 이해하는 것에는 기독교 본질에 대한 깊은 소양은 전혀 필요하지도 않다. 그저 기독교에 대한 기본적인 상식만 있어도 이 충돌은 훤히 드러나고, 소음에 짜증이 나게 된다. 그 상식이란 ‘예언자란 누구에게 무엇을 말했었는가?’란 물음에 기독교가 내놓을 수 있는 일반적인 대답에 관한 것이다. 일반적인 상식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 우리가 모든 예언자들을 이 자리에 소환해서 “당신은 누구에게 무엇을 말했소?”라고 물어볼 필요는 전혀 없다. 그러한 수고로움을 요구할 정도의 비판이 필요했다면 나의 글은 애시 당초 이렇게 원색적이지도 무례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각설하고, 위 물음에 대한 상식적인 대답은 이렇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대언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저 주어진다. 대부분 본인도 난감할 정도로, 차마 입 밖에 꺼내기도 두려울 정도로 ‘섬뜩한’ 말씀이 유독 예언자에게는 그저 주어진다. 예언자들에게 주어진 선포되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우리의 창문을 넘어서 들어옴(렘 9:21)’과 같다. 예언자는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엄청난 말씀과 심판에 앞에서 그저 눈물을 흘린다(렘 9:10).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이들에게 예언자의 선포는 죽음의 메시지이다. 이 예언자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의 섬뜩함 앞에서 예언자는 그저 슬픔과 공포에 사로잡힌다(렘 8:22). 안타깝게도 소 목사 본인의 깊은 고심과 연구 끝에 다듬고 또 다듬으며 최대한 균형감을 갖춘 설교 전문은 하나님 말씀을 가리는 잡담일 뿐이다. 애초에 선포되어야만 하는 하나님 말씀에 설교자의 균형감각 따위는 필요 없다. 하나님 말씀의 ‘단호함’ 앞에서 설교의 연구 따위는 ‘애매함’만을 생산하는 잡담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다수의 설교자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소수의 예언자들을 통해 선포된다. 

소 목사가 내뱉는 잡담의 잡담성은 잠시 하나님 말씀에 나름대로 관심을 갖는 구색을 내다가 곧바로 애드리브에서는 그 본색을 드러낸다. 그 잡담의 잡담적 본색은 이중의 의미를 갖는데, 하나는 하나님 말씀에 대해 침묵으로 순종하지 않기 위한 ‘주저리 주저리 말을 내뱉어 댐’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 말씀이 향하고 있는 자들이 혹여라도 하나님 말씀을 듣고 성내지 않을까 ‘노심초사함’이다. 이렇게 보면 그가 자신의 예언자적 안목을 뽐내는 ‘잡담니은’은 ‘잡담기역’과 심하게 충돌하며 누구도 듣지 않을 수 없는 소음을 통해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예언자는 자고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재잘대지 않는 이가 아니던가? 그들은 묵묵히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뿐이지 않았던가? 그러니 어찌 ‘잡담기억’과 ‘잡담니은’이 뿜어대는 소음 앞에 짜증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내 나는 깨달았다! 소음에 익숙해지면 때론 그 소음 속에서 들리는 희미한 질서, 즉 화음을 읽어낼 수도 있음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부모의 마음이 단 한순간에 번뜩 이해될 때가 있는 법임을! 아! 소 목사님은 진정한 예언자시다. 소 목사님은 우리가 예언자로 고백하길 마다치 않는 요나, 즉 우리 시대의 요나시다. 아니 일그러진 요나시다.

소 목사님의 ‘잡담기역’, 즉 ‘하나님 말씀 앞에서 주절대며’ 그들에게 향하는 하나님 말씀을 ‘자신의 잡담으로 가로챔’은 ‘잡담니은’이 고백하고 있는 자신의 예언자적 안목과 조화되어 아주 매혹적인 장송곡을 연주한다. 아니, 잡담끼리 조우하면 서로 소음만 쏟아낼 뿐이다. 이제 ‘잡담니은’은 더 이상 잡담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다. 소 목사님의 예언자적 안목은 소 목사님을 일찍이 하나님 말씀 앞에 세웠다. (‘잡담기역’은 그 자체로 ‘잡담니은’이 잡담이 아닌 진정성 있는 자기고백의 언어일 때만 존립할 수 있다. 여하튼 ‘잡담기역’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동이니깐!)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의 국정지도자들에게 소 목사님을 통하여 말씀하시길 원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친히 소 목사님을 국가조찬기도회 강단에 세우셨던 것이다. 

예언자란 하나님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면서도 처음엔 ‘되묻곤’ 한다. 예레미야와 같이 자신의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섬뜩한 말씀에 끝임 없이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결국 예레미야는 잡담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침묵’함으로서 자신의 민족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한다. 차라리 소 목사님께서는 예레미야보다는 요나에 가까운 예언자이시다. 일찍이 요나는 이방 도시 니느웨가 회개하기를 촉구하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깊은 고민에 잠긴 바가 있다. 소 목사님께서도 ‘다른 나라’ 정치인들이 회개하기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깊고 깊은 고민에 잠기셨다. 요나가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이방 도시에 전할 수가 없어 스페인으로 도망갔다면, 소 목사님께서는 깊은 고심과 연구 끝에 다듬고 또 다듬으며 하나님 말씀을 가릴 수 있는 최대한 균형감을 갖춘 ‘애매한’ 잡담을 준비하셨다. 

예레미야는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 말씀을 선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요나와 소 목사님께서는 원수의 악덕함이 심판받기 원하는 정의로운 마음에서 한 사람은 도망을, 한 사람은 잡담을 쏟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 소 목사님이 조찬기도회에서 외친 잡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른 나라의 위정자들에게서 가로챔’이었다.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혹여라도 회개할까 걱정하는 ‘노심초사함’이었다. 그래서 소 목사님께서는 조찬기도회에서 하나님 말씀에 자신의 잡담을 얹어 위정자들에게는 참으로 듣기 좋은, 하지만 그들을 죄의 심판과 죽음으로 내몰 수 있는 아주 매혹적인 세이렌의 연주를 들려주셨다.

소 목사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기를 마다하시지 않으셨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조차도 하나님의 심판의 희생자가 되기를 자처셨다. 이는 요나도 하지 못한 진정한 순교다. 요나는 결국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으로서 예언자라 불릴 수 있었지만 소 목사님은 이제 위정자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 말씀을 잡담으로 가리시면서 예언자의 영예로운 자리마저 빼앗기셨다. 그는 진정 우리 시대의 영웅이며 일그러진 예언자다. 그가 쏟아낸 일그러진 조찬기도회 잡담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대한민국의 수많은 위정자들에게 임할 것이다. 세이렌의 매혹적인 장송곡이 그들을 깊고 깊은 수면 아래로 내치실 것이다. 물론 우리의 순교자 소 목사님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 누가 우리 소 목사님께서 조찬기도회에서 쏟아내신 그 잡담을 감히 비난할 수 있으랴!   

<필자 소개>

필자 장효진

 

 

감리교신학대학교/대학원에서 신학과 종교철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종교철학 전공으로 박사과정 중에 있습니다. 범신론적 일원론과 초월론적 이원론을 연구하며 최종적으로는 이 두 이론 틀 내에서 성립하는 각자의 신론-우주론-인간론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장효진(연세대학교 종교철학 박사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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