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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Day] 2016년 5월 15일 성령강림주일 요한복음 14:8-17 (25-27)<말씀의 잔치>
홍상태 목사 | 승인 2016.05.09 15:38

신학적 관점

오늘 본문에는 수많은 신학적 주제들이 등장하는데, 모두 성령론과 관련되어 있고, 어디에서 시작해야할지 정하기 힘들다. 빌립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요구에서 시작해보자.(8)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나? 그 답은 예수에 의해 주어졌다. 즉, 예수가 하나님 안의 진리와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다.(7) 이 문답은 계시의 주제 뿐 아니라 타종교의 문제나 신인지의 다른 방식과도 긴밀하게 연관된다. 예수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은 (아버지가 예수 안에 있듯이) 예수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뜻이다.(10a,11a) 이런 주장은 장차 완전한 성육신론으로 전개될 발판이 된다. 

다른 교리들도 본문에 등장한다: 예수의 인격과 사역(11),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교회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12), 예수의 재림의 성격(18-19), 기도의 효과(14) 등. 그러나 성령의 현존이라는 주제가 이 모든 것을 연결한다.

성령에 관한 언급은 16절에 가서야 비로소 명확하게 등장한다. 예수는 아버지가 다른 보혜사(수호자 혹은 중재자)를 보내겠다고 약속을 한다. 예수가 첫 번째 보혜사라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 이 다른 보혜사는 진리의 영인데, 예수는 그 보혜사가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성령에 관한 두 번째 명확한 언급은 26절에 나온다. 여기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버지가 예수의 이름으로 보혜사를 보낼 것이라고 확신을 준다. 그리고 이 성령이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가 한 모든 말을 생각나게 할 것이라고 말한다. 

성령이 주는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위로이다. 예수는 낙심하지 말라는 당부로 제자들과의 대화를 시작하신다. 그리고 동일한 당부로 말을 맺는다. (14:1, 27) 제자들이 불안한 이유는 예수가 자신과 베드로의 죽음에 대해 명백하게 예고했기 때문이다.(13:36) 이 제자들에게 이런 예고는 사탄의 승리와 자신들의 파멸을 뜻할 뿐이다. 예수가 주는 위로는 예수 같은 보혜사를 보내어 그들과 함께 있게 하겠다는 약속이다. 예수는 성령을 통해 제자들과 늘 함께 할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로 예수는 육체적으로는 그들과 떨어져 있지만 영적으로는 그들 가운데 머물 것이다.(14:18-19) 성령은 위로자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지금 영광 중에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제자들 옆에도 여전히 계시기 때문이다. 

성령의 현존의 특징은 애매하지 않게,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성령은 특별한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가 가르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고, 예수의 모든 언행의 의미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26) 이 구절에서 성령의 역할은 지혜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추가적인 진리를 전해주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행했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행하지도 않는다. 보혜사의 임재는 마음속의 예수의 임재이다. 그리고 이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분이다. 이런 의미로 보혜사는 진리의 영이다. 즉 성령은 진리인 예수에 관한 증인이다. 

이런 이유로 그동안 교회가 성령과 그리스도를 분리해 온 것은 중대한 신학적 오류이다. 바르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성령을 다른 형태의 영과 구별하는 기준은 성령은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과 절대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이다... 성령에 관한 모든 것은 예수로부터 기원하고, 예수에게서 완결된다.” 따라서 성령에 의한 어떤 새로운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이 이미 예수가 가르치고 행했던 것과 일맥상통할 때만 받아들여 질 수 있다. 

마지막 신학적 주제는 예수와 아버지와 성령의 긴밀한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구절을 나중에 확정된 삼위일체 교리의 확실한 토대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요한복음에서 이 삼자간의 관계는 예수의 사명과 관련하여 언급되었지 <신의 내적 존재 속에서의 예수의 위치에 대한 관심>과는 상관없었다. 예수는 영인 아버지께(4:24), 그의 이름으로(즉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달라고 구하고(14:16-26), 그렇게 함으로 성령을 통해 그가 제자들과 항상 함께 있게 해달라고 구한다.(14:18-19) 이 구절을 동서방 교회간에 논란의대상이 되었던 성령의 단순 혹은 이중발출설(single or double procession of the Spirit)과 연관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본문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예수의 육체적 부재나, 이 세상으로부터 받는 핍박이나, 홀로 남겨졌다는 고립감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대의 예수의 제자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근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예수가 아버지께, <늘 우리와 함께 있어서 우리에게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예수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불러오게 하는 보혜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다.

Philip Turner, Interim Dean, Episcopal Theological Seminary of the Southwest, Austin, Texas

주석적 관점

- 이 본문은 요한복음의 고별담화(Farewell Discourse) 전반부의 중심 구절이다. 저자는 공식적인 성찬제정사 대신에 예수와 제자들 간의 마지막 대화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것은 아마도 제자들로부터 촉발된 독백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은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요구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어 예수의 궁극적 운명(아버지께로 돌아감)과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14:3)는 예수의 바람이 표명된다. 도마가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14:5)라고 끼어든다. 여기에 대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고, 그들이 아버지를 이미 보았다고 말한다. 

- 예수는 빌립의 질문을 질책한다. 이것이 사실이면, 실제 대화의 사실적 기록으로서 빌립이 예수의 현존에 대한 중요한 점을 놓쳤고, 정당하게 질책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문학적으로 구성된 것으로서, 빌립의 질문은 요한복음의 “오해”의 고전적 예일 것이다. 이 오해는 저자에 의해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나 더 깊은 주제로 넘어가는 문학적 장치이다. 그것은 소크라테스의 반어법과 같은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그와 이야기하는 사람이 주제에 대한 올바른 생각의 방법을 발견하도록 일련의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이, 요한복음 저자도 예수의 대화자들이 무지나 오해를 드러내는 질문을 하게 한 뒤, 예수가 이 오해를 교정시킬 기회를 갖게 하고, 동시에 새로운 사실이나 구체적인 것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 이 경우에는 질문이 예수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묘사하도록 하는데, 말하자면 상호내재이다. 이 구절의 목적은 삼위일체신학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에게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오심과 현존의 결과를 묘사하는 것이다. 저자는 신비적 용어인 “하나님 안의 존재”를 사용함으로 예수와 공동체에서의 하나님의 현존의 경험을 말하고자 한다. 예수가 공동체 바깥에서 온(하늘에서 내려온) 교사로서(13:13) 또한 공동체 내의 지도자와 친구로서(13:12-15) 행동하기 때문에, 예수와 아버지 사이의 상호내재는 공동체의 신성을 향한 창문으로 작용한다. 예수는 공동체가 아버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요한에게는 아버지가 예수 안에 실질적으로 거하고 그의 말과 행동을 인도하며, 최소한 예수를 통해 그의 일을 하는 것이다.  

-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어려운 점은 예수의 뜻과 아버지의 뜻의 관계이다. 아버지의 뜻이 예수의 뜻을 대체할 것인가, 왜냐하면 아버지가 예수 안에 거하시는 것이니까? 이것이 후기 교부들에게 삼위일체 논쟁에서 삼위의 세 인격의 본질에 대한 매우 어려운 질문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요한의 관심사는 아니다. 도리어 그는 공동체를 강조하고 그들을 격려하는데, 그들의 예수를 체험함으로써 아버지에게 다가갔는데 왜냐하면 아버지와 예수 간의 상호관계와 연결 때문이다. 공동체가 신의 향한 창문으로서 예수 안에서 체험하는 것 외에 이 관계의 중요한 이득 중의 하나는 예수가 아버지에게 간다는 것은 공동체가 그들과 예수와의 연관 덕분에(14:13-14) 하늘에 변호자를 두는 것이다. 이 용어와 개념은 공동체에 보혜사(Paraclete) 보내는 것과 병행한다. 예수가 천국에서 공동체의 대변인인 것과 같이 보혜사는 땅위에서 공동체의 대변자이다. 이모든 대변의 용어는 parakletos의 이해에 달려있다.     

- 요한이 14:25에서 성령으로 사용한 parakletos라는 단어의 의미를 두고 학자들은 오랫동안 논쟁해왔다. 이 맥락에서는 잘 쓰지않는 이 단어의 가장 그럴듯한 의미는 법의학적 상황에서의 “변호자”이다. 요한의 심판에 대한 이해는 당시의 유대교의 묵시운동 문서에(바울과 다른 정경복음서와 연관된 것을 포함하여) 반영되는 것과 같은 묵시적 배경에 두지 않는다. 도리어 그의 심판에 대한 생각은 법적 연관을 갖는다. 보혜사는 고소된 자(이 경우는 공동체인데)의 변호인으로서 행동한다. 요한의 관해 흥미로운 것은 특징한 법정재판에 필요한 역할이 언제나 복음서에 나오는 특정한 인물과 연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가 대항해서 변호를 하는 사람이 불명확하다.         

- parakletos의 가장 그럴듯한 의미가 무엇이든지, 26절에서의 사용은 어떤 맥락에서 조건지워진 것이다. 보혜사는 1)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가 파송한 것이고 2) 공동체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며 3) 예수가 그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할 것이다. 2)와 3)의 역할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고대사회에서 배움은 특별히 플라톤 시스템에서는 회상으로 형성된다. 여하튼 요한은 예수의 일(아버지/하늘에서 보냄을 받고 공동체에 살며 아버지의 일에 관해 공동체에게 가르치는)과 보혜사의 일(예수이름으로 아버지에게 보냄을 받고, 공동체에 살며 공동체에 예수의 길과 모든 아버지의 일에 관해 가르치는)과의 명확한 연관을 끌어내었다. 그래서 예수의 지상에서의 공동체와의 현존과 공동체 안에 계속 계시는 성령의 임재 간에는 기능적 등가관계가 있다. 요한에게 보혜사는 예수가 공동체에 육체적으로 부재하는 동안에 계속되는 예수의 현존이다. 요한에게 예수는 진정으로 공동체와 함께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그것은 성령을 통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Stephen P. Ahearme-Kroll, Associate Professor of New Testament, Methodist Theological School IN Ohio, Delaware, Ohio.

목회적 관점

요한복음 14장은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찍이 일어나고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목회적 관심을 제기하고 응답한다: 공동체의 설립자인 예수가 더 이상 주위에 없으면 어떻게 될까? 공동체가 예수의 현존 혹은 변화시키는 권능에 접근하지 않고도 그 자체로 남아 있는가? 요한복음의 저자와 우리가 관찰한 오순절은 공동체에게 예수가 떠나고 나면 다른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26절)이 오실 것이라는 약속을 기억나게 함으로 이런 관심사에 대하여 응답한다. 

다른 경우에 설교자는 예수가 12-14절에서 하신 약속에 초점을 맞출 수도 있을 것이다. 특별히 예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구하는 것(14절)이 무슨 뜻인지 혹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 예수보다 더 큰 일을 한다는 것(12절)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를 모색할 것이다; 그러나 오순절에 적절한 초점은 확실히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의 성령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성경의 약속일 것이다.

문화와 교회 모두에 만연한 개인주의를 감안할 때, 설교자는 본문이 공동체에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한다. 본문은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의 고별담화의 일부이고, 요한은 앞으로 계속 될 제자들의 공동체가, 보혜사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예수의 현존과 권능이 전혀 손실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지기 원했다.

그렇지만 빌립이 다시 제기한 문제(9절)가 있다: 제자들의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의 이야기에 개입되어 있고, 예수의 가르침을 듣고, 예수의 식탁에 초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예수가 “아버지”의 핵심적이고 궁극적인 계시인지를 알려고 하지도 않아서 예수를 “알지도” 못했거나, 전에 알았던 적이 있었던 것을 잊어버리는 기억상실증의 염려가 있었다. 그래서 “진리의 영”이 계신다고 약속하셨다. 진리의 영은 공동체 안에 있고(17절에는 대안적인 표현으로 “너희 안에”라고 한다)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26절).”

이것은 단순한 회상 이상 그 이상이다. 공동체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데 도움을 받을 것이고-어렵거나 쉽거나 간에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 전체-교회가 처한 상황의 지속적인 변화 가운데 그 말씀이 가진 의미 전체를 발견하는데 도움을 받을 것이다. 교회가 이 약속을 듣고 신뢰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면, 공동체는 새로운 확신과 신선한 명쾌함을 기대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기독교 교육과 예배의 실천과 관련이 있다. 교육을 통해-어린이이거나, 새신자이거나 혹은 오랫동안 주변에서 있었던 사람에게 하는-교회는 예수의 이야기를 말해주고 예수의 가르침을 마음에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공동체가 그 이야기의 의미를 “알게 해주고” 오래되고 익숙한 (그리고 낯선) 말씀들과 새로운 현실 사이를 연결하도록 도와주는 분은 진리의 성령이시다. 그래서 또한 교회의 예전의 실행을 돕는다: 예수의 이야기는 되풀이해서 말해지고, 그리고, 진리의 영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가 말씀하신 모든 것이 살아난다.

그렇지만 본문의 관심사는 기억 자체도 아니고, 온전한 이해로 인도하는 기억도 아니다. 기억하는 것은 신실하기 위한 것이다. 본문의 관심은 예수에게 복종하는 공동체, 예수의 계명을 지켜서 예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15절) 공동체에 있다. 요한은 성령이 순종하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다고 믿는 것 같다(15-16절, 23철 참조). 본문 전체는 또한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하심과 상관없이, 시험 당할 때(9/11처럼 외부적인 시험이든, 교회나 교파의 분열처럼 내부적인 시험이든) 기독교 공동체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것과 본을 보여 주신 것을 잊어버리고 비겁한 침묵이나 명백한 불순종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요한복음 14장의 목적은 믿고 순종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하나님의 계시를 굳게 믿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의 인격에서 오는 것이고, 그 공동체가 그 생활에서 계속해서 순종하며 생산적이게 하시는 진리의 성령의 지도력에 의존한다. 본문이 의도하는 공동체는 볼링 동호회나 바느질 동아리, 요가교실, 치유 모임이나 성경공부로 충분하지 않고, 예수의 사역을 닮은 “사역”으로 이끌게 될 것이다: 버림받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아픈 사람을 치유하며,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말해주고, 노숙인에게 주거를 제공하고,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제국을 향해, 그리고 제국에 관하여 진리를 말하는 것. 공동체가 기억하기 때문에, 공동체가 그들의 주님을 “알도록” 성령의 도움을 받기 때문에, 공동체가 예수의 계명에 순종하기 때문에, 공동체가 그의 사역을 하기 때문에, 그리고 공동체의 삶 속에 성령의 임재와 권능이 있기 때문에, 공동체는 불안하고 두려운 세대에서 염려하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공동체는 세상이 줄 수도 없고(27절) 가져갈 수도 없는 평화를 가지게 될 것이다.

오순절에 요한복음 14장을 본문으로 사용하는 것은 사도행전 2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보다 부드럽고, 조용하고, 좀 더 사색적이다. 예전은 덜 현란하고 덜 화려하고, 찬송과 기도는 좀 더 사색적이다. 그렇지만, 오순절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마음과 좀 더 접촉하게 될 것이고, 신실하게 되려고 하고 신실함의 권능을 얻으려고 하는 공동체에게 좀 더 용기를 주게 될 것이다.

EUGENE C. BAY President, Colgate Rochester Crozer Divinity School, Rochester, New York

설교적 관점

-이 본문은 매우 심오한 신학적 명제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설교자는 설교를 삼위일체에 대한 논문처럼 만들어 대부분 청중들을 졸게 할 가능성이 높다. 신앙인들은 물론 이 주제에 관해 깊이 생각하도록 해야겠지만 대다수 청중들은 20분도 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 나타난 사람들 간의 역동성 (interpersonal dynamics)에 주목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은 종종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큰 소리로 읽고 그 역동성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복음서는 보통 베드로를 먼저 말이 앞서는 자 혹은 성급한 일을 하는 자(예를들어 배에서 뛰어내리는 등)로 보여주고 있다. 요한복음도 13:37절에서 베드로의 이런 특징을 보여준다 (요13:37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따라가면  이슈가 되는 질문을 하는 사람은 도마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빌립이다. 나는 몇몇 학생들에게 이 본문과 관련하여 본문의 내용과 우리가 공통으로 경험하는 것과의 연관되는 점을 서술해보라고 한 적이 있다. 학생 중 하나가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말하고 즉시 그것을 후회한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예수꼐서 빌립의 질문에 응답하시는 방식이 빌립으로 하여금 이와같은 느낌 [곧 후회할 것 같은]을 갖게 할 수가 있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빌립의 질문에 이은 예수의 가르침은 단지 현장에 있는 군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다. 아마도 이 본문에서 가장 놀라운 일은 제자들이 하나님을 보기를 요청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 모두는 내심 하나님을 보기를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가 하나님을 실제로 보여줄 수 있음을 확신하기 전에 그 사람에게 하나님을 보여잘라고 요청하는 것은 일반적인 일은 아니다. 결국 심지어 모세도 하나님의 뒷모습을 아주 잠깐 보는 것이 허락되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빌립이 이런 질문을 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기대했을까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복음서는 보는 것과 믿는 것을 다루는 데 특히 요한복음에서 빛과 어둠, 보는 것과 보지못함등은 믿음과 불신앙을 대비시키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빌립에게 있어 아버지를 보는 것이 의미하는 것과  예수에게 있어 그것이  뜻하는 것을 대비시키는 설교는 재미있고 또 도움이 될 것 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17:20 예수의 기도에 나타난 선언과 연관되어있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우리가 예수와 연결되어 있는 것을 우리는 신앙(faith)이라고 부르고 그것는 보이는 것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보는 것(seening)은 믿는 것 (believing)이 아니다. 오히려 보는 것은 믿어야 할 필요성을 약화시킨다.  

-이 구절의 일차적인 관심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예수의 친밀한 관계 그리고 그것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주는 의미이다. 그래서 빌립의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얻은 것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것이고 이것은 또 다른 신적존재인 보혜사 성령(the Paraclete, 보혜사는 이 파라클레테의 음역)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신적 파워 (divine power)에 대한 약속은 이 강력한 신적존재들로 인해 예수의 제자들이 위대한 일들을 이루는 것이 가능함을 의미한다. “위대한 일들” (great things)을 떠올릴 때 종종 우리는 소위 기적을 너무 많이 생각한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룩한 일보다 더 큰 일을 성취하였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예수는 시공간에 제한되어 있었으나 (짧은 인생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지역에 한정되어 살았다), 그의 수많은 추종자들은 2000년동안 세계를 다니면서 치유, 위로, 변화 그리고 대체로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일을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부정적인 결과도 역시 있었다. 그러나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인간의 어려움에 하나님의 권세와 현존으로 다가갔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사역을 하는 한 우리의 사랑사역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만일 네가 나를믿으면”: 이 단어들은 “너는 나의 계명들을 지키게 될 것이다”라는 것과 긴밀한 관련 하에 놓여져있다. 너무 흔히 우리 문화에서 사랑은 관대함을 전제한 부드러운 감성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을 이러한 이해의 틀 안에 두려는 바램은 오늘날 영성에 대한 이해에 잘 들어맞지만 그것은 성경에서 묘사된 하나님을 서술하는 것은 아니다. 신적 속성인 은혜, 긍휼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의, 거룩, 순종을 위한 신적 요구와 연결되어있다. 설교자는 15절에 관한 증거들에 대해 세심하게 관찰해야 하는 데 그 이유는 많은 고대사본들이 이 말을 “너는 지킬 것이다”라는 명령형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순종을 명령하고 있든지 혹은 순종을 그의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특징이라고 하든지간에 설교에서 큰 차이는 없다. 이와 동일하게 예수의 사랑과 그의 말씀을 지키는 것 사이의 연관은 21절, 23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서 본문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18절에서 시작하는 본문의 주 목적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에서 계속해서 신적 현존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다른 성서 본문에서도 나타나지만 (로마서 8:9-11을 보라) 신약성서는 신적현존을 약속이나 사실로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체계화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현존, 그리스도의 현존 그리고 성령의 가르침이 혼재되어 있다. 이 사실은 설교자에게 신자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역할을 묘사하는데 너무 체계적으로 하려하지 말하는 경고로 생각하면 된다. 우리가 듣고 의지해야하는 것은 일반적 약속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버려 두지 아니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매우 익숙한 27절 즉 그리스도의 평화를 약속하는 구절로 이르게 된다. 샬롬이라는 히브리 개념에 담긴 의미에 관한 설교는 신자들이 평화란 적대관계의 부재보다 큰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세상이주는 것과는 다른” 이라는 예수의 말씀은 설교자가 현대 회중들에게 설교할 때 드러나는 차이점을 보게해준다. 우리의 평화를 혼란스럽게 하는데서 비롯되는 두려움은 잠깐이고 피상적이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깊은 평화는 우리에게 휴식을 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도록 이끌게 된다. 

BRUCE E. SHIELDS
Russell and Marian Blowers Professor of Christian Ministries Emeritus, Emmanuel School of Religion, Johnson City, Tennessee

홍상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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