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꿔 보다

꿈을 꾸곤 한다. 그리 넉넉한 형편에 있지도, 그렇다고 능력이 특출하지도 않은 나다. 어쩌면 지금 꾸는 이 꿈도 나에게 ‘주제 넘는’ 일일 지 모르겠다. 대학 입학금마저도 나라에서 꿔다 낸 나이기에, 지금 내가 꾼 꿈은 단지 타인의 미래를 꿔다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대2병¹⁾이니 사망년²⁾이니 하는 말들이 내 또래들의 고민을 보여준다. 생각 없이 20년을 보내고 이제 스물 하나, 20대의 시작이다.

학자가 되려는 작은 바람을 갖고 있다. 사실 밖에서 거리낌 없이 말할 만한 꿈은 아니다. 오히려 말하기 상당히 꺼려지는 꿈이다. 공부로 장학금을 쓸고 다니는 수재도 아니며, 설렁설렁 살면서도 유학에 대학원에, 여유로운 진학 계획을 감당할 수 있는 소위 “금수저”³⁾도 아니잖은가. 하나, “학자가 될 거예요!” 나는 이제 금수저로 오인 받겠지. 후퇴, 둘, “교수가 될 거예요!” 라기엔 난 너무나 작아 보인다. 마지막, 셋, “공부를 계속 하고 싶어요!” 마지막 이 말로만 나는 내 꿈을 말할 권리를 얻는다.

그렇다고 내가 정녕 “답 없는” 미래를 기다리는 것만은 아니다. “흙수저 담론”이니 “한남충 담론”, “헬조선 담론”이니 하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쌓인 ‘지금, 이 곳’에 놓인 나이지만 말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걱정한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음에도 나름 낙관적이다. 자, 이제부터 나(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좀 해 보려 한다. 꽤나 절망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 뒤에 희망이 들어선 이야기다.

“88만원 세대” 그리고 나

참 우스운 일이다. X세대니 N세대니 하는, 소위 “x86세대” 이후의 세대들은 그 어버이 세대로부터 이름을 받았으니 말이다. 자신의 삶을 단지 살아갔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어버이들은 이런 저런 이름을 붙여 그들을 특정 짓고, 그들의 삶을 규정했다.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최근 SNS 상에서 이슈가 된 X세대 인터뷰 중 한 내용이다. 저 인터뷰의 인위적인 모습처럼 당대 <이름 붙이기 풍습>의 인위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 또 있을까!

아, 우리 세대도 그런 비슷한 이름이 있다. “88만원 세대”, 경제학자 우석훈이 우리 세대가 이름이 없이 지내는 것이 애처로웠는지 친히 붙여준 이름이다. 아니면 경향신문이 붙여준 이름, “삼포세대”도 있겠다.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우리네 삶에게 붙은 이름이다. 이전 세대들의 이름과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는 우리 사회의 구조와 우리 주변의 주체들에 의해 규정된다는 부분이리라. 이토록 절망적인 이름 아래 살게 된 지금의 20대들은, 그 이름에서마저도 주체성을 박탈당했다.

그리고 나, 바로 이런 저런 이름들을 부여받으며 학교라는 태(胎)로부터 나온 내가 있다. 나면서부터 세상의 주인공이 된 여러 영웅의 이야기를 들으며, 죄 하나 없이 태어난 아기 예수의 이야기를 들으며, 대학 졸업장 하나 없이도 대통령이 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난, 내가 있다. 만화로 된 「그리스 로마 신화」와 「삼국지」를 탐독하고, 매년 성탄절마다 교회에서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신년 훈화를 들었던 나는, 20대의 삶을 시작함과 동시에 객체로 전락했다.

나의 20대, 나의 “헬조선”⁴⁾

88만원 세대는 사회에 나오며 “헬조선”이라는 극강(極强) 스테이지를 만난다. 이름만 보자면 <디아블로>⁵⁾ 불지옥 모드의 현실판 같기도 하다. 한편 이 이름은 꽤나 설득력을 갖고 있는 듯한데, “헬조선”에 관해 펼쳐진 수많은 이야기들이 이를 방증한다. 심지어 어떤 네티즌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⁶⁾의 “지옥불반도” 맵을 “헬조선”에 투영시킨 지도를 합성하기도 했지 않았나. 헬조선은 비단 남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다.

한 네티즌이 합성한 <헬조선 지옥불반도 지도>. 20대의 자조적 현실을 보여준다. (원본 출처: 트위터 @iKaMuSuMe__)

이런저런, 우리를 불러 온 이름들이 우리를 언어적 객체로 만들었다면, 헬조선이라는 사회적 맥락은 우리를 사회적 객체로 만든 것 같다(헬조선 담론에 이어진 여러 사회적 움직임에 내가 동의하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드러나는 여러 통계들과 경험담들은 청년들을 무력하게 했고, 우리네 세대는 주체로서의 힘을 잃고 말았다. 그나마 능동성을 강조하는 여러 주장들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20대가 겪는 고초의 원인에서 사회를 싹 지우고 개인의 책임에만 모든 탓을 지우는 “노오력”⁷⁾ 코드가 숨어있었을 뿐이다.

외부로부터는 유리천장과 “열정페이”⁸⁾, 내부로부터는 “노오력” 드립과 “헬조선” 담론에게 협공을 당하며 고전(苦戰) 중에 있는 우리 20대는 정신적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 나름 그런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 시도들도 있었다. 왜, 그런 것들 말이다. 우리가 청춘이기 위해 좀 아플 줄 알아야 한다고 “조언”하는 책들이나, 자기계발서적처럼 해석된 니체니, 여행을 통한 자기 발견이니 떠벌려대는 책들. 정작 이런 “조언”들 앞에서 청년들은 시큰둥했다. 돈이 없는 환자에게 무료 진료를 해주기는커녕 “건강을 평소에 잘 챙기면 각종 병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라든지 “한 번 아픈 경험이 있어도 그걸 긍정해야죠.”라고 해대니 시큰둥할 수밖에 없다.

불편할 수 없어서 불편한

그와 동시에 지금, 이곳에서 우리는 “불편함”의 시대를 맞고 있다. 때로 그것은 <메갈리아>⁹⁾로, <퀴어 퍼레이드>로, <깨시민>¹⁰⁾으로, 또는 <일베>¹¹⁾로 대표된다. 그 줄기에 속한 여러 갈래들이 옳은지 그른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메갈리아는 여성 혐오에 대한, 퀴어 퍼레이드는 호모포빅 코드에 대한, 깨시민은 “꼰대 우파”에 대한, 일베는 “좌파 좀비”에 대한 나름의 “불편” 운동이다. 그것이 발전해 나간 방향은 항상 논란이 되고 있으나, 그 근저에 비합리적이고 부조리한 사회적 맥락을 부정하려는 목소리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수많은 “불편한” 목소리들이 SNS에서, 더 나아가 현실에서 뒤섞인다. 그리고 그 운동은 “프로 불편러¹²⁾”라는 이름 아래 묶인다. 이 명칭은 일종의 비꼼이다.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외치는 소리를 “너네는 무슨 직업 마냥 불편해하니?”라는 비꼼으로써, “너네도 더럽잖아?”라는 양비론으로써 무력화하려는 구조적인 방어 기제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사회도 ‘나는’ 행복한데, ‘나는’ 불편하지 않은데 너네가 뭐라고 그 사회를 불편하게 생각하냐는 것이다. <20대 객체화 하기> 라운드 3, “행동하는 사람 비꼬기”로 상황은 넘어간다.

이제 프로 불편러들은 다시 연대한다. 이제 그들의 움직임은 훨씬 고양되어 있고, 그럼에도 원시적인 야만성을 절제한다. ‘강남역 10번 출구’로부터 ‘자유주의’에까지, 이제 프로 불편러들은 그 관객들을 “아마amateur 불편러”로 “선동”하기 시작한다. 불편할 권리조차 막은 “꼰대”들에게 실력을 행사한다. 우리의 목소리가 여전히 건재함을, 우리는 여전히 하나의 주체임을 말하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정 중앙에 “프로 불편러”들이 있다.

어린 꼰대와 어버이, 어버이

꼰대란 누구를 말할까? 남의 말을 안 듣고 내 의견을 열렬히 피력하는 이를 “꼰대”라고 하자면, 젊은이 또한 “꼰대질”의 주체가 될 수 있으리라. 앞서 말한 “불편한” 사람들, 그들은 바로 이 꼰대질을 전두지휘하는 이들이다. 나에게 강요되어 온 당신들의 기준을 무시하고 나의 주체적 기준을 당신네에게 들이미는 우리, 그런 우리는 이제 “어린 꼰대”다. 똘똘 뭉친 어버이들이 주시는, 물과 가스로 나게 하는 세례에도 우리는 더 이상 “구원”되지 않는다. 구원은 우리 스스로에게서만 나오리라 믿으며, “BRITAIN STRONGER IN EUROPE¹³⁾” 피켓을 든다.

이를테면, 지금 “어린 꼰대”들은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해 가는 중이다. 앞선 사회가 우리의 주체성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우리는 알아서 우리끼리 주체성을 획득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취지다. 당신들이 우리를 나쁜 놈이라고 하든, 무뢰한이라고 하든, 또는 교양 없는 종자라고 하든 ‘우리는 우리 나름의 삶을 살아가련다’ 하는 마음가짐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헬조선” 담론과 “삼포세대” 담론을 발전시킨다. 단, 자조적 목소리가 아닌 해학적 목소리로. 스스로를 ‘Bitch’라고 부른 여성들과 ‘Nigga’라고 부른 흑인들처럼¹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헬조선 신민”이라고 부르며 연대한다. 객체로서 부여된 이름을 주체의 그것으로 사용하면서, 우리에게 이름이라는 짐을 지운 이들의 주체성을 기각한다. 무기력했던 우리네 세대는, 자기모순의 긍정을 통해 또 하나의 주체로 부활하려는 대안을 찾아낸다.

“나름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온갖 걱정과 “고나리질”¹⁵⁾ 속에서 삼포세대는 스스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답이 없다며, “흙수저”니 “헬조선”이니 하는 자조적인 목소리들을 긍정하지만, 매몰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조적인, 수동적인 목소리를 가장 앞에 세워 전진한다. 우리(그리고 나)에게 덮친 억압의 목소리는 이제 다시 우리 무기가 된다. “약한 나로 강하게” 하는 나름의 기적이 시작된다.

그렇기에 나는 헬조선 속에서 낙관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끝없는 문제제기와 비판의 목소리, 소위 “불편함”의 연속이 우리가 대면한 모순을 무너뜨리리라 믿는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나대는, 발랄한 꿈을 꿀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사람들은 우리의 미래를 이러리라 저러리라 점치지만, 내가 기대하는 내일은 ‘나름 희망찬’ 내일이다.

이제 막 생일이 지나고 스물 하나, 만으로 스무 살이 된 20대의 시작에 들어섰다. 한국장학재단 공지 하나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한다. 꿔다 먹은 돈으로 주제넘은 꿈을 꾸고 있는 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주변을 본다. 자조적으로나마 분노할 기력이 남은 이들을 본다. 넉넉하지도, 특출하지도 않는 내가 나름의 희망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런 꿈을 꾸곤 한다.

<필자 소개>  박원재  연세대학교 의도치 않은 방황(?)으로 종교와 인간을 배워가고 있는 전직 '법학도-지망생'. 2학년에 갓 올라와 또 다른 성장통을 겪고 있다. 그래도 함께 고민하고 토론할 친구들이 있어 행복하다. 글도 쓰고 공부도 해야 하는데, 이놈의 "게으름벽"이 몸을 쉽사리 놓아 주지 않아 슬프다. 맥주와 노래, 사람을 사랑한다. 개강 후엔 농땡이꾼, 종강 후엔 백수가 되는 '나름 평범한' 스물 한살의 삶.  현재 “연세대학교 중앙인문학 동아리 자유교양 회장”일을 수행하고 있다.

박원재 (연세대)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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