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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합당한 삶 (마가 3:13~19)2017년 1월 29일 주현절 넷째 주일 설교
이훈삼 목사 (성남 주민교회) | 승인 2017.01.31 11:13
 
 
1. 부르신 분의 뜻에 따라 사는 사람
 
1) 주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언하고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을 이루실 때, 혼자 일하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동역하셨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실패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습관 중 하나는 자기 혼자 일하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주님은 일찌감치 이런 부분을 아셨다. 주님이 행하실 사역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 나라는 본질적으로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인데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은 과정에서부터 사람들이 서로 의논하고 합의를 이끌어내고 협력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주님은 갈릴리 호숫가에서 안드레와 시몬, 야고보와 요한 등을 불러서 제자 삼으셨고, 세리였던 마태도 불러서 제자가 되게 하셨다. 여러 제자들은 직업도 다르고 사고방식도 다르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랐지만 딱 한 가지 점에서는 일치하였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주님을 따라 나섰다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그냥 한번 다니다가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 목적을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 두는 삶으로 완전히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람이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이다. 누군가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이냐고 묻는다면, 우연히 또는 그냥 문득 생각나는 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분명하게 나를 ‘부르신 분의 뜻’을 인생의 절대 가치로 믿고 산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다.
 
3) 우리는 매주 예배 마지막 결단의 찬송으로 기장 100회 총회 기념 찬양 ‘부르신 뜻을 사는 우리’를 부른다. 매주일 주님은 나를 왜 부르셨는지, 주님은 주민교회를 왜 부르셨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기도할 때 우리는 참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
 

2. 주님이 부르신 뜻
 
1) 오늘 주님께서 산에 올라 여러 제자들 중에서 특별히 12명을 선별하여 따로 부르셨다.
 
제임스 자크 띠소(1836~1902년), 예수님과 제자들
굳이 12명으로 한정한 것은 이스라엘 전통에서 열둘은 이스라엘 이루고 있는 12지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외적으로는 로마에 멸망당하여 식민지였기에 무너졌고, 내적으로는 그동안 믿어온 제사와 율법 중심의 신앙이 이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영적으로도 무너져 있었다. 12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 상황에서 주님은 12 제자를 불러 세움으로써, 이 제자들이 단순히 숫자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너진 이스라엘, 죽은 것과 같은 이스라엘을 재창조하는 목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셨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2천 년 전 로마의 식민지배 아래서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무너진 이스라엘을 새롭게 세우고, 지정학적인 이스라엘을 넘어 죽음에 직면한 전 세계 인류의 구원을 위해 놀라운 사역을 감당할 것이다. 그것은 때로 한없는 사랑으로 그리고 때로는 치열한 투쟁으로 전개될 것이다.
 
2)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특별히 부르신 제자들에게 두 가지 사명을 명령하셨다.
 
첫째, 전도 -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는 것이다.
 
전도는 원래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신학에서는 케리그마(Kerygma)라고 한다. 주님이 사람들을 부르신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부름받은 사람들은 그 사명을 홀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감당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 공동체가 교회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교회의 목적은 예수는 그리스도이며, 예수를 영접하는 사람과 사회에 구원이 임한다는 기쁜 소식 –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명 감당하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대부분 순교 당했다.
 
근래 한국인들이 가장 가보고 싶은 여행지 중의 하나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다. 이 길은 9세기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예수님의 제자 중 야고보의 유해가 발견되었다고 알려지고 야고보를 스페인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되면서 이후 유럽 전역에서 많은 순례 객들이 오기 시작했다.
 
카라바조, 엠마오의 만찬(부분), 1601년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 팔을 벌리는 이  제자도 옷에 조가비를 달아 자신이 순례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야고보는 멀리 스페인까지 가서 선교하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참수를 당해 제자 중 첫 순교자가 된다. 제자들이 그의 시신을 빈 배에 태워 바다에 띄웠는데 스페인까지 떠내려갔고, 해안에 닿은 야고보의 시신은 조개껍데기들에 싸여 손상되지 않은 채 보존돼 있었다고 해서 야고보와 산티아고 순례 길의 상징은 조가비이다.
 
요즘 산티아고 순례 중인 향린교회 조헌정 목사님
가장 유명한 코스는 프랑스 국경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800km를 40일 동안 걷는 여정이다. 매일 평균 20km를 걸으려면 최대한 짐을 가볍게 해야 해서 꼭 필요한 것만 지녀야 하고, 친구도 TV도 문명도 끊긴 곳에서 오직 자연과 자신만의 순례 길을 걷다보면 어느 순간 하나님을, 자신을, 자기가 가야 할 길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야고보뿐만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이 순교하면서까지 하려고 했던 것은 바로 복음 선포였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자칭 진보적인 교회들은 전도하는 것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분위기가 있다. 전도는 곧 예수 천당을 떠올리고 전도까지도 마치 저급한 신앙 행위처럼 무시하는 분위기, 이러한 자세가 교회를 망치는 것이다. 진보든 보수든, 개인구원이든 사회의 구조적 구원이든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바로 복음 선포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라 고상한 종교 도덕가 또는 사회 개혁을 위해 그리스도를 이용하는 정치 전략가 수준에 머물게 된다. 이를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둘째,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악을 내쫓는 능력을 주셨다.
2천 년 전 사람들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은 선한 영과 악한 영의 대결이라고 생각했다. 인생과 역사의 슬픔, 고통, 질병, 시련, 죽음 등은 모두 귀신의 소행이며, 세상은 이렇게 악한 귀신의 지배 아래 놓여있다고 생각했다. 연약한 인간은 이 악령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메시아가 오셔서 귀신을 축출하고 선한 영의 임재를 통해 이제와는 전혀 다른 신세계를 시작하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 사역 중 하나는 귀신 축출이었다. 이것은 단지 귀신에 시달리는 개인을 치료했다는 것을 넘어서 이제 눈앞에 보이는 예수라는 메시아에 의해 새로운 시대가 도래 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귀신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하는 그리스도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중심 내용으로 삼고 있는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는 장면을 많이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만 보더라도 거라사의 귀신들린 사람을 치유한 사건(5장), 귀신들린 수로보니게 여인의 딸을 치료한 사건(7장), 주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시니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달라고 왔지만 제자들이 고치지 못하고 있다가 예수님이 고치신 이야기(9장)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귀신 축출은 그리스도가 몰고 오신 신세계의 상징이다. 과거에는 교회에서 이런 귀신 축출 경험이 드물지 않았다. 물론 가끔 귀신 쫓는다고 하다가 사고가 나기도 했지만, 또 많은 치유 사례도 있다. 이 경험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하나님의 영이 악령보다 더욱 강력함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오늘 교회는 더 이상 귀신 치유를 하지 않는다. 환자도 교회보다는 정신병원을 먼저 가고 교회도 귀신 축출을 시도하지 않는다. 오늘의 교회는 선교에서 아주 중요한 치유의 능력과 권한을 병원에게 거의 위임함으로써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반납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 교회가 무너지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다.

우리는 이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과 과감하게 투쟁해야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승리해야 한다. 그 악령이 개인이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든 집단적 권력이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세력은 악이며 우리는 이들과 싸우기 위한 그리스도의 전사로 부름 받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신 주님은 우리에게 그럴 능력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를 믿는 사람과 교회에 선교의 권능이 함께하실 것이다.

3. 선포와 치유의 능력을 지니려면
 
1) 우리는 어떻게 부르심에 합당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가?

결코 쉽지 않은 복음 선포와 악한 영의 축출 권능은 공부나 수련이나 명상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복음을 증거하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악령과 싸워서 이기는 능력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우리가 주님과 함께 있도록 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사람이 가장 먼저 할 일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2) 주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 그냥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정도에 멈추지 않는다. 그보다 더욱 악한 인생으로 떨어지고 만다. 오늘 12명의 제자 중 맨 나중에 예수를 판자 가룟 유다가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의 신임을 받아 예수 공동체의 재정을 담당했지만 예수와 함께 머무르려고 하지 않았을 때, 그는 곧 악마의 자식으로 추락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가까이 있을수록 늘 이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는 주님과 멀리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가까이 있으나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다. 1순위가 목회자, 2순위가 장로, 그 다음이 권사, 집사 이런 직분자들이다. 주님으로부터 중책을 받았음에도 그 사명을 붙잡고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을 때, 그들은 그저 사명 감당 못하는 사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악마가 될 수 있다.
 
3) 우리는 부름 받은 제자들로서 늘 주님과 함께 걷기 위해 애써야 한다.
 
내 생각 속에서 주님이 사라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내 눈에서 주님이 안보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내 귀에서 주님의 음성이 안 들리고 세속적 욕망만이 아우성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한다. 내 입술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끊어지지 않도록 거룩한 숯불을 담아야 한다. 내 손과 발이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례 길이 아니라 악마의 뒤를 따라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주님을 눈앞에서 보고 들을 수는 없지만, 늘 주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 모습을 그려보고, 주님의 섬김과 사랑을 실천하려고 모든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그 때 이 시대에 구원을 선포할 수 있고, 악한 힘들에 지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이 우리 가운데 생기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불러 세우셨다. 부르심에 합당한 사명자의 삶을 사는 것은 매우 두렵고 힘든 일이지만, 그 사명 속에 주님은 천국의 보화를 놓아두셨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복음 선포와 악령을 제어하는 능력을 받아, 우리 자신과 이 시대를 구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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