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노시스(자기비움)를 통한 선과 악 이론의 재해석

1. 지나치게 풍요로운 시대, 우리가 말하는 선과 악이란?

본 글은 우리 시대에 맞는 선악의 규정을 새롭게 시도해보려는 목적을 지닌다.

선이란 무엇이고, 악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선이란 삶에 도움이 되는 것, 악이란 삶을 해치는 어떤 것으로 규정하곤 한다. 보다 현실적으로 이야기해본다면, 선이란 나 자신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악이란 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고 그럼으로써 괴로움을 주는 것을 지시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규정은 언제든지 옳기만 한 것일까? 오히려 이 안에는 선과 악에 대한 자기중심적인 규정이 들어가 있기에 선과 악 그 자체의 의미를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과거의 선악의 규정이 여전히 현대에도 유효할 수 있을까?

현대는 누가 뭐라고 해도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이다. 과거와 다르게 많은 지역의 사람들에게 더 이상 굶주림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더욱 더 많은 소비재들을 충만하게 소비할 수 있는 시기이다. 최소한 우리시대에는 결코 어떤 이가 굶어죽는다는 것을 예상할 수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풍족한 양식을 생산하고 있으며, 사람들을 굶기지 않으려는 좋은 사회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경제발전은 많은 아시아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왔다. 그들은 서구적 상황들로부터 파생된 자본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받아들였으며, 그럼으로써 다양한 동양적 상황들 안에서도 서구와 동일한 상황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부의 상승이 그러나 항상 올바르거나 좋은 어떤 것으로 결론나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부의 상승은 오히려 이기주의, 맘모니즘, 재화제일주의 등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인간들은 그들의 삶 안에서 돈만을 생각하며, 이러한 현상 안에서 모든 이들에게 백만장자 혹은 재벌이라는 말은 최고의 이름이 되었다. 돈은 의미가 상실되는 현상 안에서 행복하고 좋은 삶의 기준이기 때문에 이제 인간의 삶의 의미는 그가 얼마나 많은 재력을 소유했나와 연결된다.

이런 전제들을 통해 본다면, 우리시대에 가장 강하게 인식되는 선 혹은 좋음의 규정은 철저하게 돈의 논리에 따라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밝힌 것처럼, 이기주의, 맘모니즘, 재화제일주의 등은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돈의 가치에 따라 판단하고 있으며, 이것은 경제상황 및 돈에 따라 철저하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들의 존재기준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선, 혹은 좋음이란 정말 우리의 상식처럼 경제적인 상황으로부터 규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아우구스티누스

특별히 고전적 선악규정과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예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이다. 그에 따르면, 악은 실재하는 것이 아닌 선의 결핍이라고 말한다. 특별히 이러한 규정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그에게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이며, 또한 그분만이 전능한 선이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선만이 실재하는 실재이며, 악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선이 없는 곳에는 악도 없다.” 그러나 그 역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정을 좀 비틀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앞서의 하나님의 본성으로서의 선은 무엇인가를 가지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우고 놓아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현대신학의 흐름인 케노시스 이론으로부터 확인할 수 있다.

2. 현대에 새롭게 대두되는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

케노시스(κένωσις), 즉 “자기 비움(self-emptying)이란 예수의 신성이 육화를 통해서 비움으로 드러나는 신학 용어”¹⁾로서 빌립보서 2:5-11,²⁾ 그리스도 찬가에서 비움, 또는 스스로 비움의 행동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개념 자체는 잘 알려진 빌립보서 2장 7절의 표현 ‘자기를 비워(εαυτον εκενσεν)’에서 출발한다.”³⁾ 빌립보서 2장 5-7절과 관련하여 케노시스는 신의 비움, 또는 스스로 비움의 행동으로 규정되고 있으며, 특별히 신학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 찬가의 처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그러한 신성이 고난 받는 인성으로 낮아졌음을 강조함으로써 성육신을 하나님의 ‘자기 비움’으로 해석한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 안에 존재하지만, 다시 말해 하나님과 동일한 신적 본성이지만, 그는 하나님께 속한 영광 안에서 거주하기를 거부하고 신의 위치를 포기하고 종의 형상을 입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 안에 그리스도가 자신을 비웠다.”⁴⁾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과 동등해지고 싶어 불복종한 아담과 다르게 예수(마지막 아담, 고전 15:45)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종의 모습을 취하였다.⁵⁾

“빌립보서 2장 6-11절의 그리스도 찬가는 빌립보서의 핵심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의 핵심이며, 그것이 하나의 화두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요약하”⁶⁾고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우리는 케노시스 모티브가 또 다른 한 두 개의 구절들에 제한되지 않고, 신약성서의 중심 주제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⁷⁾ 그렇다면, 신학의 중심주제인 케노시스에 대한 현대 신학적 논의는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 개념에 대한 현대 신학적 논의는 17세기 개신교의 기독론 문제에서부터 부각되어 19세기 독일 루터교 신학자들에게서 유행하였으며, 그 이후 영국성공회의 몇몇 신학자들과 나아가 러시아 사상계에까지 확장되어왔다. “교리사적으로 케노시스 개념은 두 가지 큰 역할을 했다. 하나는 17세기의 루터 정통파 내에서 기센학파와 튀빙엔 학파 사이의 싸움에서이다. 그리고 다시금 19세기에는 몇 십 년 동안 케노시스론으로서 신학적으로 지배했다. 이런 과정은 다시금 나중에 두 가지로 반복되는데, 먼저 영국에서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변형에, 그리고 그 이후 케노시스가 러시아적인 종교철학에 [...] 의미를 가지게 되었던 러시아 안에서였다.”⁸⁾

이러한 개념의 확장의 과정을 통해 케노시스는 마침내 현대에 이르러 기독론의 이중본성론의 문제에 대한 답변을 넘어 철저한 신의 극단적인 자기 비움의 본성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세계로부터 십자가에로 몰아넣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 무력하시고 약하다. 단지 그렇기에 그는 우리 곁에 있으며, 우리를 돕는다. 마태복음 8장 17절에 따르면, 이것이 확실해지는데, 그리스도는 그의 전능으로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약함으로, 그의 고난으로 우리를 돕는 것이다. 단지 고난 받는 하나님만이 도울 수 있다.”⁹⁾

https://medium.com/@photontrip

오히려 그리스도의 힘은 그의 무력함, 즉 케노시스로부터 나온다. 그래서 “이것이야 말로 종교적 인간이 기대했던 모든 것의 전복이다.”¹⁰⁾ 살려고 하는 것, 가지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의 케노시스는 우리가 상식처럼 생각하는 풍요한 물질과 삶의 소유가 아닌 비움을 본질적인 것으로 제안한다. 하나님의 자기 비움, 즉 신적 케노시스에 대한 논의는 예수의 죽음으로부터 출발하여 현대가 요구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으로 재해석되고 있으며, 바로 이것이 현대가 이야기해야 하는 새로운 비움의 요구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들에게 자유를 주시고 그들의 충만함과 더불어 신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까지 주시는 분이다. 물론 하나님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은 전적인 타자인 그분에게는 일종의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신 스스로를 깎고 작게 축소시키고, 또한 아예 무화시켜 비움을 통해 자신과 전적으로 다른 자기 아닌 것들, 즉 존재자들의 자리를 마련한다. 어떻게 본다면,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비움의 고통을 근거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창조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신을 비우고 있으며 따라서 끊임없이 고통스러워한다.”¹¹⁾ 그는 우리는 사랑하기에 고통을 감내한다.

물론 하나님의 본질이기에 이 자기 비움은 인간에게도 본질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이러한 자기 비움이 결코 인간이 만들었거나, 혹은 그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비움은 하나님이 근원적으로 행하시고 있는 그의 본성이며, 모든 만물이 계속적으로 창조와 유지 안에 있을 수 있음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안에 속할 수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단지 “하나님을 신앙하고자 하는 자는 그가 자체로 소위 말해 아무 것도 없는 텅 빔 안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있을 때, 언제나 빈손으로 서 있는 존재일 따름이다.”¹²⁾

3. 선악론의 현대적 전환: 악이 선의 결핍이 아니라 선이 악의 결핍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이제 새로운 악의 규정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악이 선의 결핍’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정을 넘어, 정반대로 ‘선이 악의 결핍’이며, 그래서 끊임없이 부정성을 통해 악에 저항하고, 그 범위를 줄여나가는 것이 선의 본질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악이 선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되고 가사적인 세상 안에서 실체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악이며, 그것이 점차적으로 줄어듦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되어가는 과정이 역사라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우리는 우리의 근원적 타락의 상황으로서의 원죄를, 즉 “유한성과 죽음의 문제를 죄와 악의 개념으로부터 분리시켜”¹³⁾ 규정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인데, 그것은 우리가 언젠가 존재함을 중단하고 무로 사라질 위험에 놓여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한계 지어진 유한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는 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유한한 자이면서, 그 유한성을 알고 있는 자이기에, 그에게는 언제나 죽지 않으려 애쓰는 욕망이 함께한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괴로움을 느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렇다면,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가? 그 해결책은 바로 자기가 더욱 더 존재하려는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내가 더욱 더 안정적으로 존재하면 할수록, 그만큼 죽음에 대한 생각도, 죽음의 불안도 감추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위해, 나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나의 괴로움과 죽음을 피하기 위해, 나를 더욱 강하고 더욱 잘 존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악이란 우리로부터 분리된 어떤 사물이나 사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열등성과 악을 투사시켜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억압 관계 안에 존재한다.”¹⁴⁾ 그렇다면, 자기만을 더욱 잘 존재하게 하는 이러한 경향은 자기를 제외한 나머지 존재자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

내가 더욱 굳건하게 존재하면 할수록 타자들의 존재는 약해진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인가를 가져다가 내 자신을 위해 쓰면 쓸수록, 그리고 다음을 위해 저축해놓고 안정을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을 위해 타자를 부리면 부릴수록, 타자는 반대로 더욱 더 죽음에 가까워지고, 불안정해지며, 또한 고통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에게는 가장 좋은 선이라 보였던 것이 타자에게는 악이 된다.

“악은 ‘잘못된 관계’ 안에 존재한다.”¹⁵⁾ 내가 더욱 편하게 존재하려고 하는 것이 타자에게는 고통이 된다.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 나의 승리는 타자의 패배로 인식되면서 타자를 죽음으로 내몰며, 그것은 죄와 악의 형태로 드러난다. “죄는 삶을 자아의 중심에 두는 것, 자아를 스스로, 그 자체로 확립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 거짓된 삶은 이기적인 삶이다.”¹⁶⁾ 그렇다면, 이에 비해 선한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한 삶이란 모든 것들이 잘 존재하기 위해, 다시 말해 모든 것들이 잘살기 위해, 내가 내 자신의 욕심이나, 내 자신의 안정감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많이 가지는 것, 혹은 수명이 길어지는 것이 반드시 행복과 평안함을 지시하지는 않으며, 내가 타자를 억압하고 나의 욕심을 채운다면, 나의 존재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러한 나눔, 연대, 그리고 스스로를 낮추어감이 바로 존재함 자체에 알맞은 선이다. “하나님의 질서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자아(‘이기심’)가 중심 밖으로 밀려나고, 하나님에게 뿌리를 두고 이웃에 관심을 갖는 자아(‘신성화’)가 다시 중심이 되는 질서다.”¹⁷⁾

오히려 존재함이란 결코 혼자 살 수 없는 나눔의 작업이며, 다른 것들의 고통을 돌아보면서 스스로를 천천히 낮추어감이기에,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선을 이기적인 자아만이 영원히 존재하고자 하는 욕망의 실체화로서의 죄와 악이 결여되는 사건이라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선이란 자기의 욕심 때문에 타자에게 가해졌던 고통과 악을 줄여나감이다.

악이 선의 결핍이 아니라, 오히려 선이 악의 결핍이며, 제대로 살아감이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모두가 함께 타자를 위해 자신을 제한하며 살아감이다. “만약 우리가 모든 면에서 [...] 공동체 안의 존재라고 한다면, 어떻게 나의 선이 너의 선과 연결되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너의 쇠약함이 나의 쇠약함과 무관할 수 있단 말인가? 나 홀로 번영하는 것이 가능한가? 네가 고통 받는다면 나도 고통 받지 않을까?”¹⁸⁾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선이란 악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새로운 선과 악의 규정을 통해, 이제 ‘신은 선하다’라는 전통신학의 고백은 그 현대적 정당성을 새롭게 획득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우리를 유한함 안에서 존재하도록 해주며, 그의 희생이 바로 그의 선함의 모습 자체이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하고, 가장 비참한 곳에서 신이 드러난다고 이야기했던 앞서의 논의들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며,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행위가 모든 형태의 생명들을 풍요롭고 충만하게”¹⁹⁾ 만든다.

물론 참된 선을 위한 케노시스의 의미는 우리시대에 상당히 당황스러운 제안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풍족한 시대에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존재를 줄여나가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풍요로운 시대에 새로운 선의 모습을 깨달을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비움이 오히려 선이라는 사실, 즉 악이 선의 결핍이 아니라 선이 악의 결핍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더욱 더 존재하려고 하는 삶의 의지를 결핍해나가는 것이 선이며, 이 선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케노시스의 발현이다.

현대에서 선이란 내가 더욱 더 존재하는 것을 의미했다면, 이제 우리는 더욱 더 자신의 존재를 줄여나감을 의미하는 선을 실현해 나가야 한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진 현대에 우리는 바로 이 지나친 충만을 내려놓고 자신을 비워나가야만 한다. 자기 비움만이 진정한 선에 이르는 길이다.

이관표 (협성대)  webmaster@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