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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마태복음 5장 13절)성령강림 열셋째 주일설교
이훈삼 목사 | 승인 2017.08.30 21:51

1. 독일 교회의 날 : 1999 슈투트가르트

1)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를 탄 것도, 한국을 벗어나 본 것도 1999년 6월 독일 교회의 날에 참석한 것이었다. 그 때 기장 총회 교육원에서 참가자를 모집했는데 한 사람이 모자라서 얼떨결에 가게 되었다. 
그 해가 목사 임직 받은 지 10주년 되는 해라 비행기 타고 해외 한번 가보고 싶은 소망을 이루기에는 딱 좋은 프로그램이었다. 지금도 독일에 도착해서 당시 독일 선교사로 있던 친구 목사네 집에서 첫날 자고 새벽에 깼는데, 베란다 밖 전깃줄에 새들이 앉아서 노래하던 모습과 창문을 열었을 때 그 상쾌한 공기의 느낌을 잊지 않고 지니고 있다.

2) 유럽은 사실 기독교 전통이지만 가톨릭 국가가 대세라고 보면 된다. 로마의 되를 이은 이태리, 프랑스와 스페인 등 대국이 모두 가톨릭을 국교로 삼고 있다. 개신교의 본산이요 마틴 루터가 활동하여 현재도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중추 역할을 하고 있는 독일조차도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 비율이 둘 다 40%가 좀 안되게 비슷하다.

▲ 2017 독일 교회의 날 (베를린)

독일은 매년 교회의 날(Kirchentag/키르켄타크)이라는 행사를 한 주간 동안 여는데 보통 10만여 명의 방문객이 참여한다. 독일의 가톨릭과 개신교가 번갈아가면서 행사를 주관하는데 올해는 개신교 주관으로 베를린과 비텐베르크에서 지난 6월에 열렸다. 교회의 날은 다양한 프로그램이 개최 도시 전체 곳곳에서 진행되며, 현재 교회가 관심해야 할 선교과제, 그리고 기독교 전통에서 우러나오는 여러 가지 문화 축제가 함께 벌어진다. 우리 교회는 작년 바인가르텐 교회와 협의하기를 우리가 원래는 2020년에 독일을 방문하는 것인데 2021년 방문하기로 조정하였다. 이렇게 한 해 늦춰서 조정하기로 한 이유 중의 하나는 2021년에 바인가르텐에서 가까운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리는 교회의 날에 참여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3) 1999년 개신교 주관 제28회 독일 교회의 날은 독일에서 6~7번째로 크고 인구 60만 정도 되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렸다. 교회의 날은 매번 주제를 새로 정하는데, 당시 주제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였다.

▲ 소금 주머니마다 ‘세상의 소금’이라고 쓰여 있다.

그래서 한 주간 동안 우리가 소금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고민하고 협의하고 표현한다. 그 때 이 주제를 상징하는 소금을 주머니에 담아서 나눠주고 또 도시의 중심지인 역 광장에는 엄청난 규모의 소금을 모래언덕 쌓듯이 모아놓았던 기억이 난다. 소금은 우리 생활에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주님이 바로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 우리들의 다른 이름은 바로 ‘소금’이다.

2. 소금이 맛을 잃으면

1) 소금의 기능은 여러 가지가 있다. 짠 맛을 내기도 하고, 부패를 방지하기도 하고, 무례하고 못된 인간들 다시는 오지 말라고 내쫓을 때 쓰기도 한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소금이라고 하시면서 소금이 만일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뜨끔한 경고를 내리셨다. 소금을 소금되게 하는 것, 소금의 정체성을 담보하고 있는 것을 상실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다.

싫든 좋든 명소가 된 잠실 롯데타워에 가면 롯데 시네마가 있다. 21개의 영화관이 있는데 다음에 우리가 가려고 하는 영화관은 21관 슈퍼플렉스 가장 큰 화면이 있는 곳이다. 영화관 건물에는 여러 가지 상점과 식당들이 있다.

지난번 당회원들이 심야영화 갔다가 사먹어 보고는 싶었으나 못 먹은 것이 **붕어빵이었는데 그 다음에 가서는 기어코 사먹어 보았다. 주로 500원짜리 붕어빵에 익숙해 있다가 하나에 3500원짜리 붕어빵이라 매우 아끼면서 먹었지만, 하나에 3500원짜리라고 해서 그 안에 금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붕어빵에는 무조건 앙꼬(단팥)가 들어가야 한다. 붕어 없는 붕어빵은 먹을 수 있어도 앙꼬 없는 붕어빵은 먹을 수가 없다. 앙꼬야말로 붕어빵을 붕어빵 되게 하는 첫 번째 조건이다.

2) 지금의 주민교회 건물을 건축한 다음에 부임했는데, 신발 벗고 들어가서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는 공간인 명상예배실이 좋았다. 한동안 어린이부가 이 공간을 사용하다가 어린이부도 이제 유아실로 예배 장소를 옮겼고, 이 공간은 정말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교인들의 정성을 모아 기도 의자도 마련했고, 매주 수요일 저녁기도회 때 한 마음으로 개인, 교회, 사회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앞으로도 더 기도하기 좋은 공간으로 꾸며야할 텐데, 전면부에 놓인 십자가가 눈에 자꾸만 걸렸다. 십자가 크기와 모양이 이 공간과 좀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래 지켜보고 고민하다가 얼마 전에 좀 변화를 주었다. 내 눈에는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십자가를 치우고 그 자리에 성화를 하나 구입해서 놓았다. 스페인이 자랑하는 프란시스 고야의 ‘감람산의 그리스도’라는 그림이다.

▲ 프란시스 고야, 감람산의 그리스도, 35*47cm, 패널에 오일, 1819년, 스페인 마드리드

칠흑 같은 어둠이 그리스도를 내리누르고 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 간절히 붙잡고 기도하던 바위 외에는!

왼쪽 위 대각선 방향으로부터 쏟아지는 빛 속으로 아이 천사가 양 손으로 잔 두 개를 가지고 다가온다. 상황이 엄중한 만큼, 보통 귀엽고 귀족적 분위기의 어린 천사가 아니라, 어찌 보면 작은 악마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이 잔을 맞이하는 그리스도는 우리가 많이 본 푸른 눈과 긴 금발 머리카락의 호남 형 그리스도가 아니다. 별로 말끔하지 않은 행색의 그리스도는 어둠 속에서 동그란 눈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잔을 응시하고 있다. 화가는 주님의 오른 손가락들과 얼굴 군데군데에 핏기를 묻혀 놓았다. 두렵고 떨리는 이 엄청난 현실을 피하게 해달라고 바위를 붙잡고 밤새 기도했는가 보다.

처음 내가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양 팔을 벌린 주님의 모습은 ‘무엇이든지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기도하기 위해 그 앞에 앉아 자주 쳐다볼수록 ‘저보고 어쩌란 말씀입니까?’라고 울먹이며 항변하시는 모습으로 보인다.

십자가는 정말 그런 것 같다. 이미 갈보리 언덕에서 숱하게 처형당하던 유대인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던 모습과 짐승의 울음 같은 신음 소리까지도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인데, 이제는 직접 그 십자가에 못 박혀 매달리라는 하나님의 뜻 앞에 선 주님은 ‘알겠습니다. 달게 지겠습니다!’ 보다는 자꾸만 ‘저보고 어쩌란 말씀입니까?’하고 울먹이며 양 팔을 벌려 자포자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끝내 주님은 이 지독한 섭리를 온 삶으로 수용하시지만!

십자가야말로 그리스도 삶의 정점이었다. 주님의 삶 전체를 한 점으로 표시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십자가의 죽음이 될 것이다. 당연히 십자가를 빼고 기독교는 존립할 수가 없다. 십자가를 빼면 마치 신기루처럼,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바로 기독교다. 오늘, 한국교회의 위기는 십자가를 번영과 풍요로 지워간 것에 그 뿌리가 닿아있다. 

누구나 무릎 꿇고 간구하는 교회 기도실 작은 강대상에 이 그림을 주문하여 놓아두었다.

3. 기독교인의 핵심은

1)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매우 엄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아무리 생활필수품이라 해도 소금은 소금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을 때만 소중한 대우를 받는다. 이름만 소금인데 아무 맛을 내지 못하면, 짠 기운이 다 떨어져서 썩는 것을 방지하지 못하면 굳이 소금을 귀하게 간직할 필요가 없다. 자리만 차지하는 것들은 내다 버린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 의해 밟히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2)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기독교인들의 불의와 부정, 탐욕이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정말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비난을 받아도 마땅한데 사실 억울한 때도 있다.

얼마 전에 어떤 목사가 도로에서 운전자와 시비가 붙자 격분하여 총을 겨눴다가 체포당했다는 기사가 연합뉴스에 실렸다. 연합 뉴스가 보도했으니 이런저런 신문들이 또 옮겼을 것이다. 제목만 보고 벌써 그 기사 밑에는 기독교 목사들을 마구 욕하는 댓글들이 많이 달렸다. 그런데 기사 내용을 보니 미국에서 일어난 이 사건의 당사자는 미국 성공회 신부였다. 외국에서는 성공회 신부를 목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도 성공회 신부를 목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이 나쁜 소식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보도한 연합뉴스는 굳이 우리는 아무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 성공회 신부를 목사라고 번역해서 제목을 달았다. 왜 그랬을까? 성공회 신부들을 의식해서? 아니다. 우리나라 언론사가 이렇게 조심할 정도로 우리나라 성공회의 교세가 강하지 않다. 결국 한국 천주교의 눈치를 보느라 굳이 신부라고 번역하지 않고 목사라고 번역하여 보도한 것이라고 보인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또 한번 울화통이 터졌다. 방향은 다르더라도 역시 힘 있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조심하고 상대적으로 응집력이 없어 무력한 한국개신교는 마음대로 물어뜯는 우리나라 언론인과 지식인 사회의 비과학성과 이들에게 정말 미움의 대상이 되고만 한국 교회의 현실에 다시 한번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한국사회의 지성인들도 냉철한 객관성과 합리성을 찾아야 하고 한국교회도 정말 정신 차려야 한다.

▲ 십자가 실종(http://timbeinganddoing.blogspot.kr)

한국교회는 오늘 왜 이 지경까지 온 것인가? 한 마디로 우리가 기독교라고 하는 이상 반드시 유지하고 수호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한 가지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간의 탐욕을 투영한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지워나갔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현대인들은 교회 와서 인생의 방향을 묻지 않으며 지혜를 구하지 않는다. 지치고 상한 심령이 위로받거나 격려 받지 않는다. 교회가 무엇을 해도 별로 감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밟고 차고 침 뱉고 진저리를 친다. 왜 이리 되었는가? 소금이 맛을 잃었기 때문이다. 소금이라고 불리려면 짠 기운을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가 교인이라면, 교회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은 결코 잃지 않고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데, 다 사라지고 욕심만 남았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를 잃어버리는 교인이나 교회는 가차 없이 길에 던져 밟히게 하신다. 주님의 십자가 없는 교회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 빨리 십자가를 되찾아야 한다.

4. 너의 십자가가 무엇이냐?

1) 석양이 교회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저녁 홀로 신발 벗고 들어가는 마룻바닥 교회당 뒤편 의자에 앉아 강단의 십자가만 바라보아도 가슴이 뭉클해지고, 십자가 찬송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던 때가 그리워진다.

그 때 나는 신학도 모르고 역사가 무엇인지도 몰랐지만, 내 영혼에 십자가를 간직하고 있었다. 참으로 나 스스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신학을 할수록, 역사의 모순을 인식하고 새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가질수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오히려 더 흐려진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다. 그래서 학문과 사회과학을 통해 세상을 좀 더 체계적으로 인식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 은총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분투하고 있다.

2) 오늘 주님이 우리들 각자에게 너의 십자가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찌 대답할 것인가?

이 물음에 망설이거나 아직 잘 모르겠다는 사람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상실한 것이다. 소금이 맛을 잃은 것처럼 말이다. 그 결과는 버려지고 밟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 말씀 앞에서 두렵고 전율해야 한다.

목수는 다른 건 몰라도 나무는 누구보다 잘 다뤄야 한다. 육상 선수는 인문학적 지식은 없다 해도 달리기는 잘 해야 한다. 농부는 영어를 잘 못해도 괜찮으나 언제 모내기해야 하고 언제 논에 물을 대는 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만약에 목수가 만들기는 못하고 농사 지식만 해박하던지, 육상선수가 달리기는 못하면서 영어만 잘하던지, 농부가 농사는 못 지으면서 사회의식만 발달하면 그 직위를 유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누구나, 어떤 직책이든지 다 양보하고 포기해도 그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이 빠지면 존재가 상실되는 것이다.

3)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십자가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각 자 주님이 주신 십자가를 고백하고 그 십자가를 지고 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지키고 간직해야 할 것, 내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 목사, 너의 십자가는 무엇이냐?”고 주님이 물으시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제 십자가는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살아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게 맡겨주신 주민교회 교우들과 함께 주민교회를 바로 이 시대에 주님의 십자가를 증언하는 공동체로 만드는 것입니다”라고!

이 사명이 내가 져야 할 십자가로 각인되지 않으면 내가 하는 모든 말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이 십자가를 온전히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이 부족하지만, 날마다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 앞에 나 자신을 내려놓는 훈련을 한다. 나는 이 사명을 오늘 우리 시대와 주민교회 교인들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 시대와 그 문화를 연구하고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회적 상황과 내면의 심리를 연구하고,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장 잘 전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고 그림을 찾고 논리를 세워 원고를 써서 설교를 한다.

이 일을 진심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나는 십자가를 상실하게 되고 그 순간 밖으로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히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에게 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잘 간직하고 수행하여, 버림당하는 소금이 아니라 소중하게 쓰임 받는 사명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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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원고와 PPT 작성까지 지난 목요일에 시작해서 금요일 오전에 설교 준비를 다 마치고 좀 가벼운 마음으로 토요일 결혼식장 가는 버스 안에서 이번 주 WCC 뉴스 레터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정말 내 눈시울을 적신 감동적인 뉴스가 있어서 추가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지난 8월 21일 제네바 UN본부에서 세계인도주의의 날 시상식이 열렸다. 세계인도주의의 날은 매년 8월 19일이다. 2003년 8월 19일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발생했던 테러로 22명의 인도주의 활동가가 희생된 날을 기념해서 2008년 UN에서 제정했다.

올해 수상자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 레베카 달리 여사다.

그녀는 지금까지 여성과 어린이, 굶주린 사람 등 약자들 38만 명을 돌보았다고 한다. 

특히 나이지리아 북부에는 보코 하람이라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가 민간인들을 상대로 테러와 납치를 자행하고 있다. 보코 하람은 올해만 83명의 어린이들을 자살 폭탄 테러에 사용했다고 한다. 

보코 하람은 2014년 4월 나이지리아 동북부 기독교 도시인 치복의 한 학교를 급습, 여학생 276명을 납치하면서 전 세계의 공분을 일으켰다. 달리 여사는 남편이 나이지리아 형제 교회 목사님인데 납치당한 치복 학교의 여학생들 중 상당수가 남편이 시무하는 교단의 기독교인 학생들이었다. 치복 학교 여학생들은 납치 당시 57명이 혼란을 틈타 도망쳤고, 올해 5월 만 3년 만에 82명이 포로 교환으로 석방됐지만, 아직도 113명이 보코 하람에 납치되어 있다. 이 여학생들 중 상당수가 폭력과 강간을 당했고 강제로 보코 하람 남성들과 결혼을 했다. 레베카 달리 여사는 이 여학생들처럼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 트라우마로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모금하고 상담하고 정상적인 일상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 것이 인정을 받아 올해 인도주의의 날 수상자가 되었다.

딸을 무장단체에 납치당한 부모들은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간다.

특히 가슴 아픈 것은 납치되거나 폭행당해서 돌아온 소녀들이 외상과 정신적 상처만이 아니라, 아이를 임신한 상태일 때가 가장 난감하다고 한다. 제 3자는 그래도 어찌하냐고 할 뿐이지만, 더욱 이 소녀의 가족들이 간신히 살아온 소녀들 받아들이기를 완강히 반대한다고 한다. 아기가 악마 같은 보코 하람의 자식인데 어떻게 그 더러운 피를 받아들이냐고 항변할 때, 레베카 여사는 가장 힘들다고 고백했다. 이 말을 하는 가족과 이 말을 가족들로부터 들어야 하는 임신하거나 출산한 소녀는 얼마나 이중삼중의 상처를 받는가! 이런 상황에서 가족들을 설득하고 산모를 다독거리면서 일상을 회복하도록 돕는 사역은 정말 진을 빼는 고통의 일이다. 

그렇지만 레베카 달리 여사는 이렇게 고백한다.

물질적, 정신적, 육체적 피로로 몸은 탈진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극도의 공포를 느끼면, 정말 이 사역을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다. 그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다시 기억한다. 하나님은 나를 거절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은 나 때문에 그렇게 피곤해 하지 않으셨다. 그러니 내가 어찌 사람들 때문에 피곤하다 할 것인가? 나는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우리가 자신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믿는다. 그는 세상을 화해시키기 위해 오셨으니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화해하도록 도와야 한다. 나는 주님 때문에 이 사역을 계속 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지고 가는 십자가는 세계 곳곳에서 묵묵히 주님 주신 십자가를 지고 행동하는 많은 이들에 비하면 너무 가볍고 미안한 십자가다. 우리에게 너무 힘들지 않고 견딜만한 십자가를 주신 주님께 감사하며 오늘 주신 십자가를 기꺼이 감당하면서 주님 일에 최선을 다하자.

 

이훈삼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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