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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 그리고 파파야[탐라, 사랑허염쪄]
임정훈 | 승인 2017.11.25 03:36

하나님께서 이 땅에 만들어 놓으신 만물 중에 과일은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다.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내가 일하던 외국의 어느 나라를 생각하면 경치 좋은 곳이나 유명한 유적지가 아니라 그 나라에서 먹었던 과일이 먼저 떠오른다. 동티모르에서는 파파야였다.

파파야, 동티모르

▲ 동티모르의 파파야 ⓒ임정훈

해질 무렵이면 나는 일삼아 배낭을 메고 바닷가로 나갔다. 그곳엔 저녁노을을 뒤로한 과일 가게가 줄지어 있다. 과일가게 꼴레가(친구)들과는 매일 보는 얼굴들이라 인사를 나누며 한 집 한집 과일가게를 돌았다. 그들은 내게 빨간 바나나를 권하기도 했고, 아야따 (구아바)를 권하기도 했지만 나는 언제나 파파야를 먼저 샀다.

내가 파파야라 부를 때도, “빠빠야”라 부르며 맛있는 파파야를 고르는데 신의 손을 가진 친구가 있다. 그가 골라 준 파파야는 언제나 향이 좋고 당도가 높았다. 나도 그가 알려준 대로 색감이 좋고, 겉이 매끄럽고, 들어봐서 무게감이 있으며, 길죽한 것이 아닌 약간은 둥그런 파파야를 골랐다.

그러나 내가 고른 파파야는 어느 땐 잘 익은 파파야 맛을 느낄 수 있었지만, 어느 날은 그린파파야처럼 반찬으로 만들어야 좋을 것 같이 밋밋한 맛을 내기도 했다. 배낭에 들어가지 않을 만큼 큰 파파야는 아기처럼 안고 집으로 와서 우선 파파야 속에 들어있는 씨를 뺐다. 그리고 껍질을 벗겨 먹기 좋을 만한 크기로 잘라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으면 보기만 해도 뿌듯하여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귤, 제주도

제주의 가을은 귤로부터 왔다. 내가 제주에 오던 때는 8월이었다. 그때는 귤이 나뭇잎과 같은 색이어서 귤나무에 귤이 얼마나 매달려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집을 나서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온통 귤 밭이었고, 호기심에 귤 밭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면 거기엔 탱자만한 초록빛 귤이 올망졸망 달려 있었다. 나는 명절을 기다리던 아이처럼 귤이 어서 익기를 기다렸다.

▲ 제주의 자랑, 귤 ⓒ임정훈

제주에 와있는 동안 태풍이 한 차례 지나갔고, 몇 번의 세찬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불 때 마다 귤이 다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염려로 매정한 바람을 탓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추나무에 다닥다닥 달린 대추처럼, 엄청나게 많은 귤이 나무마다 주렁주렁 황금공처럼 달려있었다. 그것은 마치 마술사가 하얀 손수건을 흔들다가 빨간 장미를 내보이는 것처럼 빠르게 일어난 일이었다. 그렇게 제주는 온통 귤 세상이 되어있었다.

소유권보다 사용권이 중요하다는 친구의 말이 맞았다. 나는 귤 농장의 대지주처럼 풍성한 귤 세상을 누리며 다녔다. “귤”이 “밀감”으로 더 많이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과일, 맛 그리고 기억

▲ 제주의 파파야 ⓒ임정훈

오십년도 더 넘은 이야기이다. 무슨 일로 제주에 가셨는지 기억이 없지만, 제주도를 다녀오신 아버지께서 밀감 몇 개를 가지고 오셨다. 세상에는 앵두, 자두, 복숭아, 포도, 감과 명절에 볼 수 있었던 사과, 배가 과일의 전부라고 알고 있던 시절이었다.

밀감이란 것을 처음 본 나는 내 몫으로 주어진 밀감 한 개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아버지께서 하시는 데로 살살 껍질을 벗겼다. 그 속에는 한 쪽 한 쪽 떼어 먹을 수 있는 말캉한 밀감의 속살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을 한 개씩 떼어 막대사탕을 빨아먹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먹었다. 그 때 먹은 밀감의 새콤달콤한 맛은 태어나서 한 번도 맛본 적이 없는 상큼한 맛이었다.

밀감을 먹어 본 다음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밀감이란 과일을 자랑했다. 나는 그 시절, 밀감을 먹어 본 아이였기 때문이다.

지난주, 제주의 귤을 알리는 귤 박람회가 있었다. 그 축제 현장에 학생들과 함께 갔다. 행사장은 어느 곳이나 귤이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마음껏 귤을 먹으며 귤 따기 체험을 하였고, 귤 하르방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 귤 속에 묻혀 상쾌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행사장을 나오며 무심코 바라본 어느 작은 과일 코너에서 파파야를 보았다. 파파야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동티모르에서 날마다 먹던 파파야가 제주도에서도 재배되고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에서 파파야가 나온다는 것을 어쩌면 나만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참 변덕스럽다. 아니 나는 참 변덕스러웠다. 그동안 제주에서 그렇게 귤이 빨리 익기를 기다렸고, 귤이 익어 풍성한 가을을 누리고 있으면서도 파파야가 눈에 띄었을 때 내 눈에는 오직 파파야만 들어왔으니 말이다. 파파야를 손에 든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동티모르에 대한 그리움이 쏴아 하니 밀려왔다.

세월이 약이라고 한다면, 약으로 쓸 만큼의 세월은 얼마만큼 지나면 되는 걸까 싶게 동티모르는 내 마음 속 깊이 들어있었다. 집으로 오는데 동티모르에서 파파야를 먹으며 지내던 소소한 행복도, 추억도 함께 따라 왔다. 그동안 어쩌면 나는 제주에 있으면서 동티모르를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코 내 마음속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동티모르는 파파야 속에 들어있었다.

임정훈  author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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