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기분이 몹시 혼란스럽다. 마음이 답답하다. 규장각 고문서 ‘첩정’의 면 이름을 찾는 색인을 만들려고 <호구총수>를 복사하였다. 면 이름에 ‘호구총수’의 쪽수를 표시하고 모두 오려 가나다순으로 배열하고 있다. 일이 지루하고 답답하다. 주위 사람들이 하는 행위들을 보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비타협적인 삶인지 혼란스럽다.

퇴근한 뒤 규장각에서 같이 공부하고 일하는 남지대 형, 도진순과 봉천동에서 족발·쟁반국수에 소주를 마셨다. 옆에 있는 카페 ‘예’에서 2차로 맥주를 마셨다. ‘예’는 쇼스따꼬비치의 ‘1917년 10월 혁명’을 들을 수 있는 카페였다. 마침 서양사학과 이민호 선생님이 혼자 술을 마시다 합석하셨다. 술기운이 좀 오른다. 저녁 9시쯤,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올해도 또 못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절박한 기분에 휩싸였다. 내일 가려고 했던 지리산을 하루 앞당겨 가야겠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출발(1986년 8월 1일, 금)

신림동 289 종점 맞은편 산꼭대기 반 지하 자취방에서 전쟁터에서 짐 꾸리 듯 허겁지겁 배낭을 꾸렸다. 밤 11시 45분 기차를 타야했다. 시간이 촉박했다. 서둘러 나서다 머리 위까지 불쑥 치솟은 배낭이 부엌 천정 형광등을 쳤다. 깨진 형광등 유리파편을 치울 새도 없었다.

택시를 타고 서울역으로 갔다. 11시 45분 기차표가 모두 팔렸다. 입석표를 끊으려는 줄도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전라선, 호남선, 경부선 창구마다 장사진이다. 서울역이 꽉 찼다. 표를 구할 수 없어 돌아가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다. 때 마침 순천행 임시 통일호 열차가 배치되었다는 방송이 들렸다. 가까스로 8월 2일 0시 35분표를 끊었다.

아! 지리산, 드디어 떠나는 구나. 일 때문에, 장마 때문에 몇 년을 애끓던 지리산이다. 내가 지리산으로 떠나는 것이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갈등과 고통 때문인지, 지리산에 대한 애틋함 때문인지 묘한 기분이 교차한다.

이세영 형에게 지리산에 갔다오겠다고 전화를 했다. 전화에 대고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담배를 한 가치만 피우는 일이라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지친 생활,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생긴 상처들, 남아있는 술기운... 착잡하다. 온몸을 적시는 느낌이다. 아직 출발 시간이 좀 남았다. 서울역 주변 생맥주 집에 들어가 맥주를 한 병 더 마셨다.

담배를 끊은 지 한 달 가까이 돼간다. 피고 싶은 욕망이 들끓을 때면 담배를 다시 피우면 미제국주의자들과 자본가들과 군사깡패들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입술과 혀를 깨물며 참아왔다. 가까스로 참았다.

8월 1일이 몇 분 남지 않았다. 올 해도 이제부터 내리막으로 치달으려 한다. 왜 이렇게 서울을 떠나고 싶어하나. 그렇게 훌쩍 떠나고 싶던 서울을 떠나기가 왜 이렇게 힘들었을까? 왜 일상을 떠나 산을, 지리산을 가야한다고 되뇌다가 이렇게 혼자 떠나게 되는가? 아주 멀리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며칠 뒷면 돌아올 떠남인데... 어디서 무엇부터 다시 싸움을 시작할 것인가...

첫째날(8월 2일,토) : 배낭이 어깨를 파고든다
<서울역-구례구역-화엄사-노고단-총각샘>

맥주를 마시고 서울역으로 들어가는데 벌써 배낭이 어깨를 내리누른다. 기차까지 가는 동안 땀이 쏟아진다. 배낭에 짐을 얼마나 무지하게 꾸겨넣었는지 일어서려면 ‘끙’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이다. 이 배낭을 지고 과연 지리산을 무사히 종주할 수 있을까.

8월 2일 0시 45분, 순창행 통일호 임시 열차가 드디어 출발했다. 며칠 동안 떠난다. 그 며칠 동안 규장각 일 말고도 망원한국사연구실 모임, 망원간사회, 역사연구방법론 세미나, 망원진로 토론, 역사과 모임, 근대사연구회의 ‘세계철학사’ 세미나, 조선후기 연구를 위한 고문서 카드 정리 원칙 검토 같은 일들이 연이어 잡혀있다. 일과 만남에 치여 허덕이면서도 머리 수 채우는 일은 거의 빠지지 않았는데, 며칠 동안 모든 만남을 잠시 접어야 한다. 기차 의자에 깊숙이 몸을 맡겼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자다 깨다 뒤척인다. 새벽이 조금씩 기차 창유리를 밀고 들어온다. 기차는 남쪽의 아침을 향해 계속 달린다. 05시, 날이 훤하게 밝아온다.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신록의 한여름이 싱그러운 냄새를 남기며 차창 밖으로 휙휙 날아간다. 혼란스러움과 갑갑함 대신 해방감이 가슴을 채우고 있다. 05시 30분 남원을 지났다.

구례구역에서 내렸다. 맵고 짠 국밥을 한 그릇 시켰다. 먼저 기차로 온 사람들과 이번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공터와 식당 주변에서 웅성거린다. 배낭을 벗어 놓고 지리산 지도를 꺼내 들고 갈 길을 가늠해 보느라 주변이 온통 설레임과 가벼운 흥분으로 가득 찬 듯하다.

07시에 구례구역에서 구례로 가는 첫 시내버스를 탔다(요금 150원). 7시 20분 구례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탔다. 화엄사에서 내렸다. 머리속으로 배낭 속에 든 물건들을 점검해 보았다. 구급약과 랜턴이 빠졌다. 석유도 모자랄 것 같다. 가게 문 열 때까지 기다리기가 귀찮다. 찜찜했지만 그냥 가기로 하였다.

▲ 화엄사 ⓒGetty Image

7시 50분 화엄사를 지났다. 예전에 두어 번 와 본 적도 있고, 이번 산행 목적에 들어있지 않아서 들르지 않았다. 공기 냄새가 다르다. 새벽기차 속에서부터 달랐다. 썩고 구린 서울 냄새가 아니었다. 상긋하다. 노고단으로 오르는 골짜기 입구에서 야영하던 등산객들이 아침식사를 하느라 분주하다.

텐트까지 챙겨 넣은 배낭은 세 사람이 산행해도 충분할 만큼 식량을 챙겨넣어 덩치가 크고 무겁다. 처음 오는 곳이라 걱정스러워 넣을 수 있는 것은 다 꾸려 넣었다. 호박에 감자에 도마까지 들어있다.

야영장을 지나 코재를 오른다. 화엄사에서 노고단까지가 지리산 종주에서 가장 힘들다더니 정말 힘들었다. 지금까지 산을 다니면서 "휴 힘들어 못가겠다"고 한 적이 없었는데 신음이 저절로 흘러나온다. 능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더 이상 못가겠다. 등산화를 벗어 놓고 물을 마셨다. 치즈와 초콜렛으로 힘든 몸을 달랬다. 누워서 한 잠 자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다. 어깨를 파고드는 배낭 무게, 기차 속에서 설친 잠, 엊저녁 술 때문에 더 힘이 든었다. 11시 20분 능선에 올랐다. 화엄사부터 세 시간 반이 걸렸다.

넓은 길이 나타난다. 도로와 샛길을 섞어가며 걸었다. 노고단 산장이 처음 지리산 종주에 나선 나를 맞아준다. 공해연구소 최열 선배가 지리산에 가면 노고단 산장 함태식 선생을 찾아뵈라고 했다. 인사를 드렸다. 산의 공해와 성삼재 도로 확장 문제를 가지고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함 선생님이 내 배낭을 보더니 “혼자 종주를 하는데 그렇게 짊어지고 다니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 먹고 살라고...” 농담 섞어 한마디 하신다. 혼자 종주를 할 때는 텐트 대신 산장을 이용하고, 기본 간식거리도 모두 싸 짊어지고 다닐 필요가 없다고 일러 주신다. 버너도 개스 버너 하나면 된다고 한다. 내 배낭에는 개스 버너뿐만 아니라 석유버너까지 들어있다.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넣어오는 것이 아니었나 보다. 주위에 지리산 종주를 한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지도와 지리산 자료, 다른 사람들의 산행 기록만 보고 겁먹어서 잔뜩 싸 짊어지고 온 것이다. 어깨를 파고드는 배낭 때문에 계속 힘이 든다.

점심을 라면으로 때우고 1시 10분 노고단 산장을 떠났다. 노고단(1507)을 거쳐 능선을 따라 마냥 걸었다. 임걸령을 지나고 노루목에서 왼쪽으로 반야봉(1751)을 그대로 둔 채 삼도봉(날라리봉)에서 잠시 쉬었다. 화개재로 내려가는 급경사 길에서 왼쪽 다리가 시큰거리기 시작했다. 대학 때 축구하다 깔려서 다쳤었고, 대학원생들과 소요산 갔다 다 내려와서 다시 삐끗했던 다리다. 배낭 무게와 노고단부터 쉬지 않고 걸은 탓에 걷는 속도가 갑자기 떨어졌다.

4시 무렵 뱀사골 계곡으로 내려가는 화개재에 도착했다. 뱀사골 산장에서 하루 묵기에는 아직 일렀다. 가능하면 연하천 산장까지 가고 못가면 총각샘에서 야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화개재를 지나면서부터는 지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토끼봉(1534)에서 미숫가루를 타서 한 컵 마셨다. 비가 몇 방울 후두둑 떨어진다. 배낭 커버를 꺼내 덮었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고 어둠이 앞자락을 드리우기 시작한다. 음산하다. 인적이 끊겼다. 앞 뒤 주위를 둘러보아도 커다란 지리산에 나 혼자다. “산길을 간다 말없이 홀로 산길을 간다” 흥얼거리며 홀로 산길을 걷는다. 능선 위라 메아리도 없다. 적막강산이다.

6시경 총각샘을 가까이 둔 능선에 도착했다. 그 사이 어둠의 자락은 더 짙어졌다. 다리가 아파 더 이상 진행하기도 무리다. 능선 옆에 텐트 두세 동 칠만 자리가 있다. 1-2인용 텐트를 쳤다(6:30).

화엄사부터 얼마가 걸렸나. 10시간이 넘었다.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나뭇잎을 때리더니 세차게 바뀐다. 옆에서 갑자기 번개가 번쩍하면서 동시에 ‘우르 쾅’ 천둥이 친다. 들고 있던 스텐레스 컵을 집어 던지고 땅에 엎드렸다. 순식간이다. 머리칼이 곤두선 느낌이다. 정신이 멍하다. 나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옆에서 텐트를 치던 세 명은 머리만 텐트 속에 집어넣은 채 엎어졌다가 주섬주섬 텐트를 들춰내며 일어난다.

버너를 켜 저녁을 해 먹고 텐트 속에 지친 육신을 뉘였다(8:45). 졸음이 ‘쿡쿡’찌르며 몰려들었다. 종주 첫날을 꼼꼼히 짚어볼 새도 없이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둘째날(8월 3일[일]) : <총각샘 - 세석산장 - 장터목 산장>

05시 30분 일어났다. 어깨와 다리가 뻣뻣하고 온 몸이 굳은 듯하다.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밥과 찌개를 데워 아침을 먹었다. 능선 오른쪽 총각샘으로 내려가 물통에 물을 담았다. 옆 동 텐트 사람들은 벌써 떠났다. 조금 아래 두 동 사람들이 분주하게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7시 50분 총각샘을 떠났다. 명선봉, 연하천 산장, 삼각고지를 지났다. 형제봉 부근에서 안양세무대행사무소에 다닌다는 사람들과 동행이 되었다. 젊은 여성 세명과 그들의 요청으로 안내겸 같이 온 남자직원 일행이다. 사람들을 벗어나고 싶어 떠났는데 산에서도 혼자일 수 없다.

선비샘에서 물통에 물을 채웠다. 세 여성 가운데 좀 잘 걷는 한 사람이 남자 직원과 먼저 떠났다. 나머지 두 사람과 일행이 되었다. 밀며 끌며 함께 갔다. 칠선봉을 지나 영신봉을 오르는데 한 사람이 다리에 쥐가 났다. 힘주어 발을 밀고 마사지를 하여 쥐를 풀어주었다. 한참을 쉬었다. 미숫가루를 타주고 과자와 사탕을 권했다. 내 배낭은 너무 무거워 문제인데, 이 분들은 어쩌자고 이렇게 준비없이 지리산에 왔을까. 두 여성의 배낭을 받아 양어깨에 걸치고 천천히 걸어 세석평전까지 왔다. 1981년 1월 겨울 속리산에 가서 문장대를 오를 때 겪었던 비슷한 일이 떠올랐다. (지난 세월 따라 역사 따라에 올린 문장대 사건)

▲ 세석산장 ⓒGetty Image

문장대 겨울산의 기억을 떠올리며 세석 평전에 도착했다. 먼저 떠났던 일행을 만났다. 점심을 먹고 3시 15분 세석산장을 떠났다. 촛대봉으로 가파르게 올랐다. 다리가 더 시큰 거린다. 함께 온 남자직원은 자기 몸 가누기도 벅찬 듯하다. 뒤로 처지는 두 사람 얼굴이 거의 사색이다. 그냥 두고 갈 수가 없다. 아프지 않은 오른쪽 다리에 힘을 주면서 끌다시피 하며 걸었다.

연하봉을 오르니 습한 안개가 주위를 휩싼다. 안개사이를 뚫고 군데군데 고사목이 신비롭게 자태를 드러냈다 사라진다. 세석산장에서 두 시간 걸려 장터목에 도착했다. 오늘 잘 곳이다. 벌써 산장 가까이 평평하고 텐트치기 좋은 곳은 다른 팀들이 다 차지했다. 자리가 마땅치 않다. 오던 길을 다시 되돌아 산장에서 좀 떨어진 곳에 텐트를 쳤다.

다리를 펴고 앉았다. 그대로 눕고 싶다. 지리산은 지리산이다. 국내 단일 산 가운데 가장 긴 종주코스를 간직하고 있다거나, 어머니다운 산이라거나, 그런 것 말고도 지리산은 봉건 착취에 저항하던 저항의 근거지, 해방후 무장투쟁의 터, 가장 치열한 역사의 현장, 싸움의 장이었다는 생각이 이제야 떠오른다.

지리산에서는 만나는 사람마다 ‘수고하십니다’, ‘수고 많습니다’,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 하며 인사를 나눈다. 서로 나누고 도우려고 한다. 저 아래 세상에서도 이런 풍성한 마음들이 가득하다면 훨씬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터인데... 그러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산에도 쓰레기를 버리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있다. 샘물은 졸졸 새어나오는 데 길게 늘어선 줄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 물통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기주의자들, 고성방가하는 무리들,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 못마땅한 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런 인간들이 점점 많아져 간다고 한다.

내일은 이틀 걸려 걸어온 지리산 능선 종주의 마지막이자 지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을 오른다. 장터목으로 다시 되돌아 내려와 백무동으로 내려가는 것보다 바로 중산리쪽으로 내려가기로 행로를 정했다.

시끄러운 노래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옆 텐트 안에서 밤새도록 떠든다. 어제 저녁과 달리 깊이 잠들지 못하겠다. 다리와 어깨는 더 뻐근하다.

박준성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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