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째날(8월 4일,월) : 아! 천왕봉, 저 산이 무등산이다. 
<천왕봉 - 중산리 - 진주 - 광주 - 무등산>

밤새 잠을 설쳤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났다. 별이 하늘에 총총하다. 벌써 제석봉 쪽으로 후래쉬 불빛이 길게 늘어졌다. 세석산장 쪽으로 서둘러 떠나는 팀도 있다. 동행했던 안양 친구들이 어제저녁 가져다준 찌개를 데워 아침을 먹었다.

텐트를 걷고 배낭을 꾸렸다. 새벽 5시 20분 장터목산장을 떠나 제석봉으로 향했다. 여기저기서 텐트를 걷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느라 발걸음이 분주하다. 어젯밤에 비해 아침은 오히려 고요하다. 곳곳에서 버너소리만 아침 정적을 깨고 있다.

제석봉에 올랐다. 좋은 날씨다. 제석봉의 고사목들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자유당 때 도벌꾼들이 증거를 없애려고 불을 지르고 도망치면서 생긴 것들이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고사목들이 인간의 탐욕을 경고하며 서 있다.

다리가 다시 시큰거릴까봐 걱정 된다. 조심조심 걸었다. 장터목을 출발한지 50분 만에 천왕봉에 도착했다. 6시 10분이다. 야! 여기가 천왕봉이다. 그렇게 와 보고 싶던 곳이다. 지리산 종주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오르면 무엇인가 풀릴 것 같은 희망을 안고 왔던 천왕봉이다. 몇 년을 염원하던 봉우리였다. 일출을 못 보아도, 골짜기마다 구름바다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천왕봉에서 보기 힘든 쾌청한 날씨가 펼쳐졌다. 3대에 걸쳐 덕을 쌓아야 이런 날씨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서로들 운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 천왕봉 ⓒGetty Image

천왕봉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학만봉이 천왕봉을 향해 질서 있게 자리를 잡고 정성스레 경배를 하는 듯하다. 이틀을 고생하며 넘어온 주능선의 봉우리들과 바로 아래 제석봉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노고단 뒤편으로는 구름바다가 펼쳐졌다.

그 때 누군가 일러주었다. 구름바다 가운데 손수건 접은 섬처럼 보이는 작은 봉우리 하나를 가리켰다. 무등산이란다. ‘광주’, ‘무등산’ 이라니! 가슴이 싸아하다. 천왕봉에서 무등산을 볼 줄이야. 눈물이 핑 돌며 주르르 흘러내렸다. 왜 지리산을 그렇게 오려했던가. 이렇게 오려고 했던 것은 지리산 때문만이 아니었구나. 가자, 내려가자, 내려가 무등산까지 가자. 그리고 망월동에 들르자.

일러준 사람을 보았다. 까만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아무 짐도 없었다. 손에 막대기 하나 달랑 들고 무등산 반대편을 가리킨다. 덕유산 봉우리들이란다. 사방을 다시 둘러보았다. 저 봉우리 봉우리 사이사이 골짜기, 흐르는 물줄기, 땅, 그 땅에 사는 사람들. 아프게 아프게 살아온 우리 선조들의 삶의 터, 우리 강산이다. 다시 또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천왕봉에서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머물러 살 수 없는 봉우리, 애써 발길을 돌렸다. 내려가는 길은 계속 경사가 급했다. 법계사 아래 로터리 산장 옆에서 좀 늦게 아침을 해 먹었다. 산에서 먹는 카레가 맛있다. 칼바위를 지나 중산리에 도착했다.

산에서 이틀 밤을 자고 화엄사 - 노고단 - 천왕봉 - 법계사 - 중산리에 이르는 지리산 종주를 마쳤다. 다시 속세로 내려왔다. 냇물에 들어가 몸을 씻고 빵으로 점심을 때웠다. 막걸리로 목도 축였다. 3시 10분, 이틀 동안 동행했던 친구들과 헤어졌다. 그들은 남은 하루 휴가를 부산에서 보내겠다고 한다. 서로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이 시대 이 땅을 같이 살아갈 사람들이다. 어디선가 만날 날이 있겠지. 불과 이틀 사이에 정이 들었다. 손을 흔들며 헤어지는 기분이 찡했다.

4시 20분 진주에 도착했다.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광주행 5시 30분 표를 끊었다. 정류장 옆 잔디밭에 앉아 메모장을 꺼내 하루를 정리해 본다.

버스 속에서 ‘왜 혼자 광주를 가고 있는 걸까’ 생각하니 다시 헛헛한 외로움이 엄습한다. 광주에 도착하여 택시를 탔다. 저녁 8시 20분 무등산장 부근에 도착하였다. 가게에서 라면을 샀다. 야영 나온 조선대 럭비부 3학년 학생들에게 텐트 칠만한 곳을 물어 보았다. 그들이 텐트 친 곳은 슬라브 화장실 꼭대기였다. 자리가 판판하고 비가와도 질척거리지 않아 그곳만큼 텐트치기 좋은 곳도 없다고 한다. 화장실 꼭대기로 초대를 받아 소주를 흠뻑 마시고 내 텐트로 내려와 3일째 밤을 잤다.

네째날(8월 5일,화) : 물러서지 않으리 
<무등산 - 망월동 -서울>

5시 30분에 일어났다. 엊저녁, 술에 취해 제대로 덮지도 않은 채 꼬꾸라져 잤다. 라면 두 개를 끓여 아침을 먹었다. 미숫가루를 조금만 남기고 아직까지 남아있던 감자, 라면, 햄, 통조림을 몽땅 털어 학생들에게 주었다. 지리산 종주도 마쳤는데 무등산이야 미숫가루만 가지고도 충분하겠지 싶었다.

7시 10분, 조선대 학생들과 헤어져 그들이 일러준 대로 계곡을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초입에 식수원을 보호하려고 철조망을 처 놓았다. 그 안에도 군데군데 야영을 하는 텐트 몇 동이 있었다. 올라갈수록 계곡은 참으로 깨끗하고 조용하다.

한 시간 반 이상을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길은 있는데 사람 다닌 자취가 거의 없다. 정상을 향해 경사가 급해지기 시작하는 부근까지 올라왔다. 계곡의 물길을 벗어나면서 사람 자취가 희미해졌다. 산꼭대기로 군부대 안테나가 비죽비죽 솟아있다. 이 길이 무등산을 감아도는 등산로로 통하는 길이 아닌 것 같다. 길을 잘못 들었음이 분명하다.

두 시간 쯤 오른 것이 아까왔다. 내려가서 다시 시작해야했다. 지도라도 준비해 왔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무등산을 꼭 오려고 계획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헤매고 있다.

계곡 꼭대기 웅덩이에서 땀에 젖은 옷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차고 맑은 물에 몸을 던졌다. 군부대 안테나의 위압에 불안하던 마음도, 헤매느라 초조하던 기분도 가라앉는다. 갑자기 또 담배 생각이 난다.

10시 10분 무등산장 부근에서 다시 시작했다. 한동안은 계속 오르막길이다. 인구 100여만에 가까운 광주를 낀 산이고 방학 때인데도 사람이 거의 없다. 꼬막재부터는 무등산 7-8부 능선을 따라 밋밋한 초원을 지나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었다. 산을 오른다기보다 조용조용 이야기하며, 말없이 걷기 좋은 길이다. 그 길을 이렇게 걷고 있다.

규봉암 전 너덜지대에서 미숫가루를 타 먹었다. 규봉암을 지났다. “조용히 귀 기울이면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것이고, 그 소리를 들으면 모든 번뇌가 사라질 것”이라는 글귀가 있다. 그 물에 목을 축이면 내 번뇌를 떨칠 수 있을까, 몇 걸음 올라가 물을 마셨다.

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다 털어 주었는데도 지친 몸에 배낭은 여전히 무겁다. 멜방이 어깨를 파고드는 듯 짓누른다. 장불재에 도착해 입석대, 서석대, 백마능선을 둘러보았다. 온통 사람키도 넘는 억새밭이다. 가을 억새꽃이 한창일 때는 일대가 온통 흰색으로 뒤덮여 장관이겠지. 정상엔 군부대가 차지하고 있어 쳐다만 보고 내려가야 했다.

밋밋하기만 하던 무등산이 은근하고 푸근하게 다가온다. 억새밭 때문인가. 원래 요란스럽지 않은 산이다. 은은하고 포근한 억새 초원에 누워 깰 때까지 자고 싶지만 앞길이 있는 나그네다.

중머리재를 지나 약사암 쪽으로 내려가 증심사 계곡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아침에 길을 잘못 들지 않았으면 무등산장 쪽에서 증심사까지 짧게 왔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걸은 길은 무등산을 휘도는 긴 산행길이었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광주시내 현대예식장 앞에서 25번 버스를 타고 망월동 묘역 들어가는 삼거리에서 내렸다. 오후 4시다. 길을 물었더니 잘못 가르쳐줘 한참 돌았다. 삼거리에서 망월동 광주시립 공원묘지까지 3.8키로라 한다. 십리길이다. 한여름 땡볕에 걸음마다 신작로 먼지가 풀풀 날린다. 몇 번이나 길가에 배낭을 벗어놓고 쉬다 걷다 하면서 묘역에 도착했다. 45분 걸렸다. 망월동 묘역에 들어오면서 지리산·무등산 다 지나도록 멀쩡하던 발에 물집이 생겼다.

▲ 5.18 광주시민혁명 희생자들이 모셔져 있는 망월동 묘역 ⓒGetty Image

망월동 묘역엔 1980년 광주항쟁 당시 희생된 분들의 무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곳저곳을 헤매며 희생자 묘역을 찾았다. 묘비도 모두 반듯반듯 규격화된 것들이다. 민주 위해 항쟁하다 전사했다는 묘비명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장의 일 끝낸 일꾼들에게 시민군 묘역을 물었다. 관리인집 옆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1980년 5월에 돌아가신 분들의 무덤이 한 곳에 모여 있다. 80년 5월 몇 일, 80년 5월 몇 일..... 이제야 이곳을 찾아뵙게 되었다. 1981년 대학원 답사 때 광주까지 왔다가도 들리지 못했던 곳, 망원한국사 연구실 후배들이 5.18 광주 망월동 묘역을 탐방한다고 떠날 때도 나중에 혼자 찾아오겠다며 그 동안 오지 않았던 곳, 지리산 줄기를 타고 무등산을 넘어 이제야 힘들게 찾아왔다. 눈물이 하염없이 줄줄 흘러 내렸다. 목에서부터 울음이 울컥울컥 치솟았다. ‘전진하는 5월’을 울음 섞어 불렀다. 아직 끝나지 않은 광주! 5월!

“저기 오네 젊은 넋들 들판 가로 질러 .....물러서지 않으리 사슬끊고 전진하는 오월 오늘은 물러서지 않으리”

적들의 간악한 회유에 의해 이장당한 열사들의 무덤자리엔 진달래 한그루씩 자라고 있다.

“동트는 꽃 새벽 무쇠 나팔소리 따라 진달래 붉은 가슴 여기 달려오네.....”

영령들께 다시 인사를 올리고 ‘결코 안주하지 않으리라, 편안하게 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묘역을 떠났다.

저녁 7시 30분 광주고속버스 정류장에서 서울행 버스를 탔다. 밤 11시 45분 서울에 도착했다. 4박 4일 여행을 마쳤다. 언젠가 이렇게 다녀오리라고 했던 다짐을 이제야 실현했다. 오랫동안 막혔던 가슴의 체증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도 같다.

천왕봉에서 배웠던 포용과 겸손을 지속할 수 있을까. 숱한 봉우리와 골짜기가 지리산 제일 높은 천왕봉에 정성을 바치는 듯했다. 그렇지만 천왕봉은 자기 몸에 빼어난 자태까지 갖추려 하지 않았다. 수수한 돌로 된 봉우리일 뿐이었다. 그런 차림으로 굽이굽이 산줄기와 봉우리를 굽어보면서 결코 오만하지 않았다.

화엄사에서 시작하여 천왕봉까지 종주를 하려면 성급하거나 초조해 하지 말아야 한다. 산에서 어떻게 걸여야 하고, 무엇을 지켜야 한다는 산행 원칙들을 서울 근교 산행에서는 그냥 귓가에 흘려보낼 수도 있지만, 지리산 종주에서는 지켜야 했다. 처음부터 급하게 걸으면서 욕심을 내다보면 중간에서 퍼지게 된다. 이 시대의 문제와 과제와 모순을 해결하고 극복하는 길도 마찬가지다. 한걸음 한걸음 꾸준히 걸으면서 싸워 얻어야 한다. 중간에 힘들다고 편한 곳 찾아 마냥 쉬거나, 다음 기회로 미루며 중간에서 샛길을 따라 내려간다면 종주는 실패다.

며칠 동안 신문을 보지 못했다. 그 사이 세상이 크게 바뀐 것도 없다. 참석해야할 모임이 몇 번 있었으나 나 없어도 모임은 잘 진행되었을 것이다. 일상의 타성에서 벗어나 잊어야 할 것은 잊고, 버려야 할 것은 버리자. 옳다고 생각하면 묵묵히 행할 것이며, 부정하고자 한다면 기존 틀에서 얻을 수 있는 기득권까지 함께 버려야 한다. 부정하고자 하면서 부정의 대상에서 주어지는 이익은 그대로 받으려고 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부정할 수 없게 된다.

박준성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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