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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먹힌 교회의 실상, 시장(Market)은 어떻게 신적존재가 되었나?하비 콕스의 『신이 된 시장(The Market as God)』
이정배 | 승인 2018.07.11 19:25

『세속 도시』의 저자 하비 콕스가 신자유주의 체제를 비판하며 자본주의에 먹힌 기독교 실상을 흥미롭게(?) 연구, 적시했다. 오늘의 시장경제를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면서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관계를 여실히 풀어 낸 것이다. 책 제목이 말하듯 결론은 금세기에 이르러 시장이 신(神)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신학자 틸리히 말을 빌지 않더라도 시장에서 행해지는 경제적 활동이 궁극적 관심이 된 탓이겠다.

이렇듯 도발적 주제를 서술했으나 실상 누구도 놀라거나 깊이 탄식하지 않는다. 이런 추세를 대세라 여길 뿐이다. 오히려 본 흐름에 적합한 신학을 고안코자 온갖 힘을 쏟고 있다. 노(老) 신학자 캅(J. Cobb)은 이런 기독교 현상을 일컬어 ‘영적 파산’이라 칭했다. 그럼에도 저자는 『복음의 기쁨』에 적시된 프란치스코 교종의 개혁의지를 보며 신학에게 다시 희망을 두었다. 세계적 차원의 가난을 해결하는 것을 복음의 과제라 여겼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피케티가 말했듯 ‘神이 된 시장은 인류의 미래를 죽음으로 이끌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본 책은 인류 앞날을 위해 신학의 책무를 되묻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하비 콕스는 이천년 세월에 걸쳐서 신학이 경제와 관계했던 흔적을 현상학적으로 파헤쳤다. 본 책을 읽는 중에 가장 큰 흥미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1.

본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 첫 부분은 시장이 신(神), 곧 새로운 우상으로 등장한 현실을 개관했고 성서가 이 문제를 어찌 다뤘는가를 제시하였다. 말했듯이 가난을 주제 삼은 교종 프란치스코의 『복음의 기쁨』이란 책에서 자극 받았던 결과였다.

프란치스코는 오늘날의 경제적 불평등을 형제살인의 차원에서 독해했다. 세계 경제가 작동하는 방식이 살인 행위와 진배없는 탓이다. 그럼에도 이런 ‘시장’의 길을 변증하고 정당화하는 뭇 이론들이 산재한다. 마치 복음의 정당화를 위해 토마스주의, 칼빈주의, 웨슬리주의가 기독교 역사 속에 존재했듯이 말이다.

신정론 같은 난제를 신학이 풀어냈듯이 경제학 역시 시장 神의 전능함을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시장은 온 세상이 그의 통치를 수용해야만 하는, 경쟁자를 허용치 않는 지고 존재(神)가 된 것이다. 시장이 지배하는 한, 어떤 것도 신성치 않다. 인간 신비를 담은 유전자일지라도 사고 팔릴 수 있을 뿐이다. ‘하느님이 원한다’란 말을 ‘시장이 원한다’는 말로 바꾼 결과였다.

실제로 시장은 인간의 내밀한 욕망과 두려움을 너무도 잘 간파하고 있다. 하느님 이상의 전지(全知)한 존재인 까닭이다. 세계 종교가 서로 다를 지라도 시장 종교를 능가할 종교는 없다. 전통종교는 저마다 ‘한계’를 가르쳤으나 신흥(유사)종교인 시장 神은 무한 성장을 추동하고 있다. 그렇기에 본 책은 프란시스코 교종의 문제의식을 좆아 ‘시장의 탈(脫)신격화를 논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 전 지구가 파멸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성서의 지혜가 다시 필요하다.

2.

저자는 신학과 경제학의 유사성을 다음처럼 적시했다. 세 번째 파트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내용의 서론이라 할 것이다. 교황무오설이 존재했듯이 시장 무오류 이론이 작동되고 있다. 시장이 효율적이기에 항상 옳다는 것이다. 마치 교황이 교리를 반포하면 진실이 되듯이 말이다.

하지만 교회 역사에 미치광이 교황이 존재했듯이 시장도 미칠 수 있음을 인정해야 옳다. 이점에서 저자 콕스는 경제학에게 실수를 인정하는 겸손을 요구했다. 주지하듯 인류 최초에 시장이 아니라 선물문화가 존재했었다. 선물문화가 점차 물물교환의 형태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이 경우 개인이익보다 집단 생존의 가치가 항시 우선이었고 시장과 제단(종교)은 공속(共屬)관계에 놓였다. 양자는 결코 적대적일 수 없었다.

하지만 도시가 생겨나면서 사원인접한 곳에 시장이 자리했다. 점차 성전은 환전(換錢)대를 뒤 엎은 예수에게서 보듯 강도소굴로 변해갔다. 종교(신앙)가치를 돈으로 셈하는 적폐의 공간으로 변질 된 탓이다. 하지만 목하(目下) 시장은 종교를 훌쩍 능가해 버렸다. 종교의 하수인 역할을 그치고 스스로 神이 되어 버린 것이다. 보험회사와 금융사는 지금껏 높았던 교회의 종탑을 한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3.

그래서 저자는 심각하게 묻는다. 어떻게 시장이 神의 속성을 가로 챘는지를 알고자 했다. 신이 아니라 시장이 사람을 창조하는 시대에 이른 것이다. 시장 神은 아담과 하와가 얻지 못한 불멸성과 책임 없음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불사의 존재인 시장 神이 불멸의 새 인간을 잉태한 것이다. 이 경우 법인(法人)은 시장 신이 창조한 인간의 다른 표현이겠다.

주지하듯 법인기업의 유통기한은 무제한적이다. 법인에게는 죄와 죽음의 법이 적용될 수 없다. 지속적인 변신이 가능한 까닭이다. 예컨대 인도, 보팔참사의 주범이었던 유니온 카바이트 사(社)가 다우 케미컬에 인수 합병되면서 면피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法人 속의 인간, 法인격은 불사의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법인 속의 개인은 결코 처벌받지 않았다. 실제로 기업(法人)내 구체적인 한 인간을 통해 범죄가 행해 졌음에도 말이다. 법인으로서의 기업은 정부(국가)의 지도와 감독도 거절했다. 이윤극대화를 위해 경영진과 주주들의 의기투합의 결과였다. 노동자를 해고하고 공장을 폐쇄시키는 만행을 반복해왔다. 시카고 증권거래소가 중국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도 이제는 더 이상 놀랍지 않다.

그러나 이들 기업역시 필멸의 존재일 뿐이다. 영원히 존속할 수 없다. 지구 및 인간 역사가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도록 자신을 한계 지워야 옳다. 시장이 창조한 인간(法人)은 인류 미래를 위해 재앙이 될 뿐이다.

4.

성서의 하느님과 이런 시장 神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하느님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잘 살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특정인에게 축적된 부(富)를 위험하게 여겼다. 무관심의 세계화를 염려해서이다. 따라서 성서는 고리대금업을 금했고 희년법을 통해 재분배를 명했다. 이자는 가난한 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들었고 부의 집중이 고아와 과부에 대한 홀대를 낳았던 까닭이다. 당대 교회가 고리대금업자에게 장례식도 치러주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다. 종교개혁 이후 칼빈 후예들인 청교도가 적당한 이자를 합법화 했으나 논쟁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부상하면서 지금 개신교, 가톨릭교회 모두가 이 늪에 자발적으로 빠져 버렸다. 지금 우리는 약탈적 대출에 포위를 당한 채 살고 있다. 모기지, 신용카드 그리고 담보대출이란 이름 하에서 말이다. 시장의 압력이 삶 자체가 되고 말았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듯이 기업들 역시 광고로 승부해왔다. 돈을 빌려서라도 상품 구매를 충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경제적 불평등이 가속화 되었다.

주지하듯 성서는 빚 탕감의 전통을 전승했다. 빚 담보를 무효화시켰고 노예를 풀어주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주기적으로 평평하게 만들고자 애써왔다.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죄’는 본래 ‘빚’으로 치환해도 좋았겠다. “...우리가 우리에게 지은 죄를 사하여 주듯이...”가 본래 빚의 탕감을 뜻했던 탓이다.

그러나 희년법이 성서를 비롯하여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뤄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경제적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희년법’ 사상이 교회를 배불리는 종교적(속죄적) 행사로 변질되었던 탓이다. 본래 개신교 종교개혁은 神과 시장의 은밀한 결합(거래)에 대해 반기를 든 사건이었다. 우리 시대의 개혁자 프랜치스코 교종은 희년의 성서적 의미를 복원시켜 세상에게 부채탕감을 도덕적으로 호소했다. 이를 위해 타락한 바티칸 은행부터 개혁하고자 했다. 평평한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5.

두 번째 큰 장에서 저자는 종교(기독교)가 시장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현실을 ‘장애와 질환’이란 질병으로 바라보았다. 세계경제가 금융자산을 실물거래 총량보다 10배나 많은 기형적 구조 하에 놓인 탓이다. 이런 금융화가 가난을 구조화시키는 불평등의 원인으로 꼽힌다. 경제학자 피케티의 증언대로 0.1%의 사람이 99.9%의 부를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상응물이 존재치 않는 가공자본(fictitious capital)이 시장에서 판을 쳤다. 실물경제를 고갈시킬 정도로 그렇게 말이다.

미국 월가에서 오큐파이(Occupy)운동이 일어 난 것은 너무도 필연적이었다. 불평등과 위험자산에 대한 항거였기에 말이다. 기독교는 낙타의 비유를 통해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어렵다고 가르쳤다. 이것은 부자의 富를 수도원으로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천국행을 위해 부자들의 기부가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부자가 된 수도원은 타락했다. 성직매매를 통한 성직자들의 치부가 극에 달한 것이다. 교황의 비호 하에 오히려 시장 神이 교회 안에서 활동했던 결과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기독교의 비호를 받던 이런 시장 神과의 단절이었다. 하지만 개신교의 ‘오직 믿음’은 다시금 자본의 하수인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 욕망을 확대, 재생산하는 종교적 기재로 전락한 것이다. 성장과 번영의 종교를 위한 마술적 주문으로 타락시켰다.

이점에서 하비 콕스는 거대 은행과 거대 교회를 유비적 관계로 보았다. 시장 및 소비 자본주의 정신이 이들 두 영역에 공통적으로 자리한 까닭이다. 이들은 물질적 재화 부족을 한 개인의 게으름 탓으로 여겼다. 이에 더해 교회는 영적 지수의 부족을 탓했다. 사람들을 자기 조직 속에 폭발적으로 흡입시킬 목적에서다. 거대한 규모의 조직에 속하는 것을 위안삼고 안정을 느끼라 했다.

하지만 저자 하비 콕스는 이런 거대한 실체를 시대적 질병현상-성장 염(growth-itis)- 으로 보았다. 세계 내 가장 큰 초대형교회 10곳 중에서 이 땅에 5개나 있고 모두가 그를 바라고 있으니 중증에 빠진 한국 교회의 실상을 가늠케 한다. 시장 神이 교회 내면에 자리했기에 신학(복음)대신 경영학(시장)이 교회를 지배한 결과라 할 것이다.

6.

본 책 3장은 가장 흥미로운 주제를 담았다. 경제학과 신학의 상관성을 여실히 밝힌 것이다. 어느 종교도 시장의 주문(呪文)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논쟁을 통해서 저자는 이들 상관성을 언급했다. 교리적으로 펠라기우스가 이겼으나 엄청난 부(富)를 소유한 아우구스티누스 추종자들이 판결을 뒤집었다. 물론 펠라기우스에 우호적인 황제가 죽은 탓도 있겠으나 저자는 본 신학적 논쟁에서 돈의 역할을 더 앞세웠다.

저자는 한 역사가의 판단을 인용했다.

“이 싸움은 적어도 무승부로 끝날 수 있었다. 그런데 추가 시간이 주어졌을 때 아우구스티누스와 그의 팀은 주심과 선심이 내린 수상쩍은 판정의 도움을 받아 승리했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재부(財富)의 출처를 묻지 않았고 그것으로 무엇을 하는가를 더 중시하였다. 아무리 악하게 번 재물도 선하게 사용하면 좋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저자 콕스는 이런 입장에 회의적이었다. 선하고 깨끗한 부(淸富)를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최근 장로교단 산하 재판위원회에서 명성교회 세습을 비판하는 목회자들 몇 명을 출교시켰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예측하건데 세습 정당화를 위해 아우구스티누스적 해법이 동원되었을 듯싶다. 하지만 성서는 교회 내에 富가 쌓이는 것 자체를 경고했다. 재물을 하늘에도 쌓지 말라고도 하였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의 몫인 탓이다.

7.

저자는 18세기 스코틀랜드 사상가인 애담 스미스를 경제학과 신학을 옳게 관계 지은 위대한 사상가로 보았다. 시장 우호적인 경제학자로 알려졌으나 정작 그의 에토스는 성서적이라 했다. 그의 책 『도덕 감정론』(1759)에 언급된 다음 말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많이 느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느끼는 것.... 우리들 이기적 애정은 억제하고 남에 대한 자비로운 애정은 내버려 두는 것이 곧 인간의 천성(天性)을 완성하는 길이다.”

이점에서 스미스는 자유시장의 수호자일 수 없다. 오히려 성서가 말하는 예언자의 반열에 세울 수 있다고 했다. 스토아 철학을 좋아했고 칼빈 계열이었으며 자연신학, 자연법 전통에 익숙한 학자로서 스미스는 경제학과 신학의 관계를 옳게 회복, 촉진시켰다. 즉 ‘도덕 감정론’을 통해 자기 소리를 빼앗긴 사람들,  가난하고 잊힌 사람들 사이에서 신의 목소리를 환기시킨 것이다. 하느님을 인간처럼 고통과 번민을 겪는 존재로 본 결과이겠다. 자신들 공동체(사회)안에서 자기비판자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것이다.

이점에서 저자는 스미스를 아모스와 이사야를 닮았다고 보았다. 공의를 물처럼 흐르게 하라 명했고(아모스 5:21-24) 제물을 역겹다(이사야 1:11-12)고 간파한 선지자의 하느님 이해가 스미스의 종교적 에토스였던 것이다. 재차 스미스의 말을 적어본다.

“부자와 권세가에 대해서는 감탄하고 거의 숭배까지 하는 성향, 가난하고 비천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경멸하거나 적어도 무시하는 성향은 .... 동시에 우리의 모든 도덕 감정을 타락시키는 가장 크고 보편적인 원인이다.”

이런 스미스의 생각을 저자는 프란치스코 교종과도 중첩 시켜 강조했다. 우리들 속에 체화된 유교의 대동(大同)사상, 사람을 하늘로 알고 섬기라는 동학 정신과도 일치한다.

8.

하지만 여전히 시장의 정신이 하느님 숨결, 성령만큼이나 우리들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자본주의 정신이 시장과 종교 모두를 회통시킨 결과다. 지금도 시장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시장정신을 전파하고 있는 중이다. 저자는 성령과 시장 神간의 유사성을 말했다. 성령이 인간에 내주하듯 시장 신 역시 자신을 돕는 동격의 협력자를 인간 속에 두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매하려는 의지이다. 이것이 없다면 시장의 영향력이 행사될 수 없다.

주지하듯 시장은 불균등성과 비대칭성을 혐오한다. 모두를 평균적으로 만들고자 시장은 구매의지, 곧 숨겨진 욕망을 추동해 왔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하도록 인간을 개조시키면서 말이다. 그 결과 인간의 내면적 감성은 평준화되었고 시장은 이를 ‘창조적 파괴’라 불렀다. 시장은 지속적 확대 없이는 정체하고 정체하는 즉시 사멸한다. 그렇기에 광고를 통해 시장 복음은 성령의 확산보다 빠르게 지구 곳곳을 누볐다.

저자는 이를 ‘새로운 오순절’이라 일컬었다. 일체의 차이를 삭제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소비 집단을 창조했던 까닭이다. 차이를 말소하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차이를 만드는 역설적 문화라 불러도 좋겠다. 세계 어디서나 ‘하나의 맛’을 선전하는 맥도날드가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기독교 역사가 이루지 못한 제국을 이렇듯 시장 신이 일궜다. 하지만 다양성으로 획일성을 극복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役事)이겠으나 세상은 지금 획일성의 통일을 지향할 뿐이다. 이런 영향이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들마저 변질시키기에 하비 콕스의 염려가 크다. 

9.

이처럼 시장은 靈적 영역에서 상징적 개념을 차용했다. 시장이 종교적 외투를 걸치고 영적 아우라를 갖게 된 것이다. 종교도 점차 시장 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자신들 교회력을 장삿속으로 활용한 것이다. 성탄절의 상업화는 대표적 예일 것이고 부처님 오신 날 역시 시장 神의 먹잇감 된지 오래이다. 미국의 경우 추수감사절 축제에 시장 神이 가장 분주하다. 모든 백화점들이 저렴하게 물건을 파는 세일 축제를 하는 탓이다. 어머니 날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본래 세계평화를 위한 어머니들의 요구를 청취하는 날이자 어머니의 헌신적 희생을 기리는 날이었으나 지금은 백화점을 분주케 하는 날로 변질되었다. 더구나 어머니 존재를 여성 신(神)의 귀환이라 여기면서 말이다. 모신숭배를 등에 없고 어머니날을 상업화시킨 시장 神의 오묘한(?) 활동이 참으로 놀랍다.

이제 시장은 인간 속 욕망을 온전히 아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었다. 판매량 증가를 목적하여 인간의 내적 욕망(구매력)에 대한 지식이 출중하다. 오히려 욕망을 모방토록 하며 새롭게 창조하기까지 한다. 마치 교회가 고해성사의 제도화를 통해 교인들을 자신들 영적권위 하에 묶어 두려 했듯이 시장도 더 많은 영향력을 행사코자 욕망을 창조해 냈다. 죄 고백 통해 새사람 되듯이 이전 것을 버리고 새것을 사라고 할부구매, 담보대출, 신용카드를 창조해 냈다. 상품가치를 의도적으로 감소시키는 ‘계획적 진부화’도 신장 神의 섭리활동 중 일부라 하겠다. 이로써 브랜드의 힘을 믿고 자동적인 욕망(충동)적 구매가 우리들 일상을 지배하는 하비투스(habitus)가 되었다. 지금껏 기독교가 노력했던 성서(신학)적 덕목의 내면화를 맘껏 무화(無化)시키면서 말이다. 

10.

주지하듯 시장 神이 이처럼 무소불위의 존재가 된 세상은 진보만을 가치로 여겨왔다. 진보 이념 자체가 종교의 지위로 격상된 것이다. 따라서 과거는 불편하고 야만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다. ‘오래된 미래’의 의미를 탈각, 지워 버린 것이다. 현대문명을 지배하는 신적 힘으로서의 진보, 그 기원은 19세기 다윈의 진화론에 있다. 이후 많은 진화론자들의 토론이 있었으나 대개는 ‘인간 원리’에 의견을 합했고 인간을 우주의 정점으로 여겼다. 인간의식의 출현이야말로 우주의 필연이란 것이다.

하지만 이것 자체를 우연으로 보는 시각도 공존한다. 진보를 대신하여 순환사관을 말하는 역사학자도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시장 신이 정신적으로 ‘진보 이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여지를 다시 생각한다. 시장 신이 궁핍한 사람을 위해 봉사할 가능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난 역사를 반면교사 삼아 종교(기독교)와 시장의 호혜적 관계를 모색했다. 종교의 본 뜻을 갖고서 타락한 시장의 영혼을 구하는 일을 신학자의 과제로 여긴 것이다.

그럼에도 정말 시장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일까?를 저자는 자문한다. 사탄일지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본래 교부들의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먼저 종교로 변질된 시장문화를 수정해야 옳다. 구원은 언제든지 회개로부터 가능한 탓이다.

우선 건전한 경쟁을 말살시킨 죄를 고백해야만 한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신적 창조성이 지배하는 공간, 그 곳이 바로 본래 시장이었다. 이를 위해 탈(脫)집중화, 즉 시장 권력의 해체가 선행되어야 옳다. 구체적으로 거대 은행과 금융제국의 해체가 관건이다. 본 책 결론으로 저자는 하느님 천지창조 이야기를 거론했다. 神의 자기 해체, 곧 탈(脫)집중화 과정으로서 신적 창조행위를 말하기 위해서다. 세상의 창조성을 위해 神이 자기를 해체시켰다는 것이다. 神의 자기 해체, 그를 통해 세상이 창조성을 갖게 되었다. 이에 부응하여 시장 신 역시 인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해체시킬 일이다.

11.

천지창조에 있어 하느님은 물을 갈라 땅을 만들며 자신의 힘을 상당부분 이양시켰다. 그 땅에서 나무와 풀이 돋아날 만큼 그렇게 말이다. 神없이도 땅은 생명을 잉태했다. 神의 권력이양은 땅으로 하여금 창조성을 발휘토록 한 것이다. 이를 통해 하비 콕스는 시장이 강요하는 왜곡으로부터의 해방을 역설했다. 권력의 수평적 분산만이 인류 미래를 존속시킬 수 있는 까닭이다. 탈(脫)집중화는 탈(탈)위계화로 표현될 것이고 거기서 창조성이 발현될 수 있다.

창조의 하느님은 낮과 밤에게도 자기 권력을 분산시켰다. 낮과 밤을 다스리는 일을 자신의 권한에 두지 않은 것이다. 이어진 다섯째 날에도 神은 동식물들이 스스로 번식, 생존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했다. 피조물과 자신의 창조력을 공유한 것이다. 이를 일컬어 저자는 경제의 민주화라 했다. 둘째, 셋째 날의 창조가 수평적 협동조합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면 네, 다섯째 날의 사건은 지역의 분권화를 떠 올려준다. 자기 삶에 영향 미치는 결정을 스스로 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까닭이다. 여섯째 날 신의 형상(Imago Dei)에 따른 인간 창조가 있었다.

▲ 이정배(顯藏아카데미)

그렇다면 하느님 형상이란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땅의 흙을 지칭하는 아담이 하느님 형상이란 말뜻을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저자는 이를 神의 창조성을 공유하는 일이라 여겼다. 동물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성서 증언이 바로 이를 적시한다. 신적 특권이 아담에게 주어진 탓에 짐승에게 자리를 부여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인간을 욕망덩어리(구매력)로 새롭게 창조한 시장의 神과는 너무도 달랐다.

이렇듯 자신의 권한을 나누는 神은 신약성서, 특히 오순절 사건에서 명백하게 재현되었다. 바벨탑 저주의 역전으로서 오순절은 각기 다른 언어로 말했으나 상호 소통된 세상을 드러냈다. 시장 神처럼 획일적 통일성이 아니라 다양성에 입각한 교제(Koinonia)를 가능케 한 것이다. 허나 이런 일은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계 곳곳의 종교들 역시 이런 경향성을 지향하고 있다. 아울러 하느님의 창조성은 비단 교회나 종교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이 삶의 전(全)영역에 침투하는 성령의 역사이다.

이런 방식으로 시장에게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영혼을 되찾게 해야 한다. 시장이 사회 약자를 위해 하인(종)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말이다. 그럼에도 시장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 시장의 구원, 그를 위해 기독교를 위시한 제 종교 모두가 이 땅에 존재한다. 시장의 탐욕에 먹힌 채로 그 요구를 예배(의례)화하는 못난 모습을 이제는 탈(脫)해야 할 것이다. 시장이 神의 자리를 내려올 때 시장도 훨씬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확신이다.

12.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하비 콕스는 종교의 미래를 누구보다 염려한 신학자였다. 한국에서 수차례 방문했고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여의도 순복음 교회 예배에도 참석한 적이 있다. 그 크기에 자신의 영혼을 빼앗길 뻔 했다는 이야기도 본 책에서 살짝 비추었다. 시장 神이 교회에서 체화된 실상을 여실히 경험한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하느님의 창조가 세상, 곧 자연과 인간에게 자기 권한을 이양 하였듯이 시장을 지배하는 금융 권력의 분권화를 강력히 주장했다. 협동조합과 지방자치의 의미와 중요성을 신학적으로 밝혀준 것이다. 필자가 추구해온 소위 ‘작은교회’ 운동의 토대도 여기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종교개혁 500년을 지나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에 먹혀 버린 한국 기독교의 현실을 크게 걱정했다. ‘오직 믿음’의 교리가 천민(賤民)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절차로 전락한 현실을 보았던 탓이다. 이점에서 종교와 시장의 유비를 흥미롭게 적시했고 그 잘못된 관계의 청산을 통해 새로운 연관성을 창출코자 하는 본 책은 영적 파산에 이른 한국교회에게 큰 메시지가 될 것이다.

이정배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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