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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삶신학자가 본 삶과 죽음 3
김흡영 대표(한국과학생명포럼) | 승인 2018.09.11 16:55
이번 글은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Death” 부분을 많이 의존하였음을 밝혀둡니다.(미주 11)

“스스로 있는 자”로 정의되는(Yahwe) 하느님은 구·신약성경에서 “살아 계시는 하느님”으로 자주 언급된다(신 5:26, 수 3:10, 시 84:2, 마 26:63, 요 6:69, 롬 9:26 등). “오직 여호와는 참 하느님이시요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렘 10:10)라는 표현은 하느님을 말 못하고(합 21:8) 움직이지 못하는(사 40:20) 우상들과 대조하기 위하여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그 표현은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이방인들의 죽은 우상들과 대조하기 위하여 의도된 것만은 아니다. 살아 계시는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모든 것을 주신다(행 17:25; 창 27 참조). 그리고 그는 그의 뜻에 따라 생명을 거둬들일 수도 있다(신 30:19; 삿 13:3, 욥 34:14-15 참조). 이와 같은 여러 가지 표현을 통하여 『구약성경』은 신이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이며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살리는 생명의 기운이라고 진술한다.

『신약성경』은 성부 하느님은 생명의 소유권을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공유하였다고 증거한다.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느님이 지금 그 안에서 계시되었다고 고백하고(마 16:16),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부여자로 묘사된다(요 6:68-69 참조). 예수는 스스로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산다.”라고 하였다(요 6:57). 인간의 약함과 고난과 아픔이 수반되는 육체 안에서 삶을 살면서 예수는 매순간 끊임없이 아버지로부터 오는 보호와 지원에 의지한다. 생명의 근원은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있음을 확인시켜주면서, 예수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고, 적적으로 그에게 의지해야 되며, 또한 그를 향해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한다.

『구약성경』에서 ‘생명(life)’이라고 번역되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hay’(일반적으로 복수형 hayyim 사용)과 ‘nepes’이다. 이 중에서 ‘hayyim’이 가장 많이 사용되며 그다음으로 ‘nepes’가 많이 사용된다(754번). 『70인역(Septuagent)』은 전자를 ‘zoe’로 후자를 ‘psyche’로 구분하여 번역한다.

그러나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은 hayyim이 보다 bios에 상응하고, zoe는 오히려 “생명이 깃드는 능력”을 의미하는 nepes의 뜻과 가깝다고 주장한다.(미주 12) Hayyim의 핵심은 배고픔과 목마름, 그리고 욕망과 같은 생명의 표현에서 나타난다. ‘ruah’이라는 용어(378번 출현)는 보통 ‘nepes’와 동의어로 사용되며(사 26:9 참조), 일반적으로 “생명의 기운”이라는 뜻을 가진다. 인간과 동물의 동일한 “호흡”의 원칙으로서(전 3:19; 창 6:17, 7:15, 22 참조), 'ruah’ 하느님 안에 그 근원을 가진다. 때때로 ‘ruah'의 현존은 그것의 결핍상태인 죽음과 대조된다(창 45:27, 삼상 30:12, 시 104:29 참조).

실존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hayyim’을 가진다. 광의적으로 그 용어는 현저한 움직임과 관련된 활동적인 실존을 함의한다(창 72:1, 렘 11:10, 겔 11:17, 행 17:18). 이러한 생명운동의 반대는 중력과 같은 관성(inertia)이다. 신의 영이 움직일 때, 생명은 나타난다(창 1:2). 이러한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며(전 5:18; 8:15 참조), 그 하느님은 나를 “파멸에서 속량”하신(시 103:4; 애 3:58 참조) “내게 있어 생명의 하느님”이라고 묘사된다(시 42:8).

살아있는 존재인 인간은 또한 ‘nepes’를 가진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영혼(soul)’이라고 번역되며, 때로는 ‘호흡(breath)’ 또는 ‘생명(life)’으로 번역된다(99번). 인간과 동물의 ‘목숨’으로 동일하지만(욥 12:10), 인간 안에 있는 ‘nepes’는 신으로부터 분리된 인간 존재로 표현된다(창 2:7, 12:13; 출 12:15 참조). 그것은 신으로부터 그 생명을 끌어당긴 인간을 표현하는 ‘ruah’과 대조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구약성경에서 인간은 완전히 연합된 존재로 존재한다. 즉, 육체와 정신의 살아있는 연합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신의 최상의 선물이다. 그것은 그 반대인 죽음이 저주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축복”이다(신 3:19). 그것은 선한 것이므로 생명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함의를 가지게 된다. 신을 두려워하면서 사랑하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참삶을 사는 것이다(시 34:12, 36:9; 잠 10:11).

▲ Thomas P. Barnett, Tree of Life, Saint Clement Catholic Church. ⓒGetty Image

『구약성경』에서는 개인 삶의 미래에 관하여 분명하고 연속적인 주장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아마도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존속 문제에 몰두하였기 때문 일 것이다. 그러나 사후생명에 대한 믿음은 유대인의 신학적 사유 속에 항상 존재해 왔으며, 그들은 불멸의 존재로 여겨지는 에녹과 엘리야의 전승에 익숙하였다. 고대 유대교에서 영혼은 불멸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신약성경』에서 생명(life)은 세 가지 희랍 용어와 관련되어 있다. 그들은 “bios”, “zoe”, 그리고 “psyche”이다. ‘Bios’는 가장 적게 사용되었지만(눅 8:14, 딤전 2:2, 딤후 2:4, 벧전 4:2, 요일 2:16) 실존의 현재 존재 상태와 그것을 유지하게 하는 원천이라는 뜻을 가진다(막 12:44; 눅 8:43, 15:12, 30, 21:4; 요일 3:7).

‘Zoe’는 자주 사용되는 단어로서, 활력을 가진 존재의 상태 또는 생명을 불어넣은(animate) 상태를 말한다. 이 용어는 자연적 죽음과 구분된 자연적 생명과 관련된 모든 개념을 포함한다(눅 12:15, 행 8:33, 17:25, 벧전 3:10).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구절과 지속적인 관련을 가진다(요 3:15-16, 36, 4:14, 롬 6:23, 딤전 6:12).

이 생명은 부패할 수 있고 제한적이지만, 생동력을 포함한다. 생명의 핵심은 힘이며, 생명은 매우 좋은 것이다(막 8:36-37). 그것은 빵으로만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용어인 ‘pneuma’에 의존한다. ‘pneuma’는 생명을 내적으로 가지고, 영원히 살고, 삶과 죽음의 주인이며,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며 생명을 부여하는 성령으로 생명을 살리는 하느님의 힘을 뜻한다.

‘Psyche’는 일반적으로 생명을 불어넣는(animating) 원칙인(행 20:10) 『구약성경』의 ‘nepes’와 동일하며, 그래서 인간적 자기(self)를 가지게 한다(행 2:43, 3:23; 롬 13:1 참조). ‘Psyche’는 지구상에서 현재 살고 있는 생명(마 10:28, 16:25 참조)과 하느님의 나라에 영원한 생명(눅 21:19, 히 10:39)의 두 가지로 구체화한다.

참된 생명(True Life)

죽음은 단지 자연적인 현상일 뿐 아니라, 죄에 대한 심판이다. 참된 생명(참삶)은 신의 생명이며, 그것은 파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현재생명은 단지 임시적인 것이다(고전 15:19). 그것은 육에 속한 생명이다(갈 2:20). 그 생명에 속한 자는 “죽은 자”들이다(마 8:22, 23; 엡 5:15; 계 3:1).

참된 생명은 미래에 오는 것이다. 그것은 파괴될 수 없는 것이고, 구원과 연결된 영원한 것이다(막 10:17; 롬 2:7; 갈 6:8). 자연적 생명이 창조에 의하여 이미 주어진 것처럼, 참된 생명도 부활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다. 영혼불멸은 없지만,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셨다(행 13:48; 계 13:8, 17:8, “생명의 나무” 참조).(미주 13)

『신약성경』의 새로운 점은 미래의 깨어남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실현에 의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스도교 복음의 핵심은 그분이 죽었었지만 지금은 살아계신다는 부활절의 메시지에 있다(눅 24:9; 롬 6:10; 14:9; 고후 13:4). 그의 생명은 영원하며, 죽음은 그 힘을 잃어버렸다. 그르므로 그리스도인의 미래 생명(zoe)에 관한 믿음은 더 이상 일반적인 신론에 의지하지 않고 유대인으로 탄생하시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지고 살신성인하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론에 근거한다.

현재생명(Present Life)

예수는 생명을 신으로부터 비롯된 신성한 신뢰로 생각했으며, 그것을 생애를 통하여 계시하였다. 그는 생명을 파괴하기 위하여 오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구원하기 위하여 왔고(눅 9:56), 그것에 넘치는 활기를 주었다(요 10:10).

그러나 그는 생명의 수단에 관련된 지나친 걱정은 배척하였다. 생명의 가장 낮은 모습에 있는 이들에게 성부는 우선적 관심을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다(마 10:12, 눅 12:14). 참삶이란 빵의 문제만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있다(마 4:4).

영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고자 이기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생명을 잃고 만다. 반면에 오히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잃는 것이 생명을 구원하는 것이다(마 10:39, 16:25).

영원한 생명(Eternal Life)

영원한 생명이라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속해 있다(마 19:29, 25:46; 18:8-9, 19:17 참조). 요한의 글들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영생은 단지 계속 유지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질적으로 새로운 차원의 생명, 곧 신적인 생명을 말한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죽음과 비교함으로써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요 36:5-24, 12-18). 신과 분리된 생명은 영혼의 도덕적 멸망이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참된 운명을 상실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육화이자 수여자는 그리스도이며, 그것은 하느님과 교제하는 것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초월한다.

요한은 현재에도 그러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신자들이 가진 그 무엇이다(요 33:36, 6:47; 요일 5:12-13, 16). 그리스도와 소통하는 이러한 삶은 본질적으로 신적이며(요 5:26, cf. 1:4), 믿음은 그러한 특별한 은총을 부여받을 수 있게 하는 절대적인 조건이다(요 3:36, 5:24, 6:40, 47).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중요성을 생명의 관점에서 표현했을 때, 바울은 요한과 일반적으로 대동소위하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생명의 근원이며 동시에 중보자이다(롬 6:23). 그리스도와 생명이라는 두 단어는 실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다(갈 2:20, 빌 1:21, 골 3:3-4). 때때로 바울은 생명이란 단순한 단어에 영원한 생명이 가진 모든 함의를 포함하기도 한다(롬 5:17, 고전 5:4, 빌 2:16).

그러나 이러한 생명은 누구에게 강요해서 되는 것은 아니고 취해야 하는 것이다(딤전 6:12, 19). 그것은 믿음에 의하여 획득되는 것이다(딤전 1:16; 롬 6장, 고후 4장 참조). “새 생명”(롬 6:4), “영의 새로운 것”(롬 7:6; 갈 5:25 참조),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롬 6:23, 8:2, 고후 4:10-11; 딤후 3:12 참조)와 같은 구절들은 영원한 생명을 표현하고 있다.

생명의 부활(Resurrection Life)

영원한 생명은 현재의 소유만이 아니라, 그것은 미래의 실현에 대한 소망을 구현한다. 신성의 대한 약속은 현세의 삶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삶의 양자 모두를 보장한다(딤전 4:8). 바울은 미래적인 측면에 대하여 강조하였으며, 죽음(롬 6:23) 및 부패(갈 6:8)와 대조하면서 그것을 불멸성과 관련지었다(롬 2:7; 고후 5:4, 딤후 6:10 참조). 그 자신이 곧 부활이요 생명이신(요 11:25), 그리스도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나할 것을 드러내”셨다(딤후 1:10).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은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확실하게 되었다(딤후 1:1. 딛 1:2, 3:7).

그리스도는 신자의 지금 현재와 미래의 생명이다(골 3:3-4; 갈 2:22, 빌 1:21 참조). 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신자가 또한 사는 것이다(요 14:19).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은 이 세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전 15:19), 그가 재림할 때에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장막이 무너지고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게 되고(고후 5:1-2, 고전 12:42-43), 그래서 결국은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바” 될 것을 믿는다(고후 5:4).

미주

(미주 11) H. D. McDonald, “Death,” in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640-642.
(미주 12) R. Bultmann, Theological Dictionary of the New Testament, ed. by Gerhard Kittel and Gerhard Friedrich, tr. and Abridged in One Volume by Geoffrey W. Bromiley (Wm. B. Eerdmans, 1985), 292.
(미주 13) 같은 글, 294.

김흡영 대표(한국과학생명포럼)  heupki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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