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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사35:1-10, 벧전1:22-2:3, 막9:33-37)대림절 넷째 주일(12월23일)
최병학(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18.12.25 20:25

1. 새로운 세상, We Will Rock You

임홍택의 『90년생이 온다』 (웨일북, 2018)라는 책은 1982년생인 저자가 1990년대에 출생한 신입 사원들과 소비자들을 접하며 받았던 충격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책입니다. 90년대생들을 관찰하며 그들의 특징을 ‘간단, 재미, 정직’으로 정리를 해 줍니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and Life Balance)’의 줄임말), 소확행(小確幸,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 『90년생이 온다』

이러한 90년생들이 생각하는 회사생활의 한 일면을 임홍택은 책에서 이렇게 들려줍니다. “회사에 헌신하면 헌신짝이 된다”, “충성의 대상이 꼭 회사여야 하나요?” 회사의 발전보다는 자신 개인의 발전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상사 눈치 안 보고 정시 출근과 퇴근을 하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싫으면 관두는 것이 바로 이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상사의 모습은 역시 ‘꼰대’입니다. 여기서 꼰대는 ‘전형적인 한국사회의 기성세대들’을 말합니다. 기성세대들인 꼰대들은 무조건 가르치려 들고, 젊은 사람들을 야망 없고 패기 없고 조직에 안 맞는 나약한 인간으로 평가절하하면서 자기 말만 늘어놓습니다. “한 때는 내가~!” “옛날에 우리 시절에는 말이야~!”

90년대생이 보기에 꼰대들은 자기 모순적입니다. 알아서 하라고 해놓고 보고를 안 하면 야단을 치고, 원하는 것이 뭐냐고 물어보고 말하면 그건 들어줄 수가 없다고 하니 종잡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꼰대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능력최우선’이라 말해놓고는 뒤로 가서는 연줄, 지연을 따지고 은근히 ‘서열’과 ‘계약조건’을 따집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개개인의 은사와 달란트보다 교회 조직의 논리와 목사-장로-권사 등의 서열 의식이 앞섭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조직에 누를 끼치지 말라!’는 논리를 정당화합니다.

이러한 꼰대들의 세상에서 90년대 출생들은 새로운 세상을 바랍니다. 그들의 열망이 여왕님, ‘퀸’을 부활시켰습니다. 국내에서 관객 800만 명을 가뿐히 넘겨 장기 흥행 중인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2018) 이야기입니다. 퀸은 7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까지 활동한 영국의 록 밴드입니다. 영화 제목인 ‘보헤미안 랩소디’ 앨범은 세계 최초의 뮤직 비디오였습니다. 40-50대들은 학창 시절 퀸의 음악을 들으며 자랐기에 이 영화와 영화 음악에 열광할 수도 있겠지만, 리드 싱어 프레디 머큐리가 사망한(1991년) 뒤에 태어난 90년대 생, 그리고 지금 10-20대 젊은 세대들까지 이 영화에 열광한다는 사실은 흥미롭습니다.

▲ <보헤미안 랩소디> 포스터, <록 밴드 퀸>, <프레리 머큐리>

많은 분석들이 있지만 프레디 머큐리를 험담하는 옛 매니저의 말이 정확한 분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 대사로 이야기 하자면, “그래, 우리 가슴 속엔 겁에 질린 꼬마가 살고 있었던 거야.”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프레디 머큐리를 슈퍼스타라고 칭송하지만, 사실 메니저가 곁에서 지켜본 프레디는 그저 ‘겁에 질린 파키스탄 꼬마’에 불과했습니다. 파키스탄 출신(영화에서는 파키스탄 출신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프레디는 탄자니아령 잔지바를 출신)으로 평생을 인종차별에 분노하며, 또한 양성애자(bisexual)라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극복할 수 없어 괴로워했던 파키스탄 출신 꼬마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부당한 비난과 편견을, 그 혐오를 이겨내기 위해 프레디는 노래를 지었고, 목이 터져라 불렀던 것입니다.

지금 퀸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그렇습니다. 희망의 출구를 찾지 못하고, 절규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날까봐 무서워하고, 성취하고 싶은 것을 이루지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사랑받지 못할까봐 슬퍼합니다. 모두들 겉으로는 즐거워하지만 속으로는, 가슴 속 깊은 곳에는 겁에 질린 파키스탄 꼬마 프레리가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프레리의 노래를 통해 위로를 받습니다. “한번쯤 소란도 피우고, 얼굴에 진흙 좀 묻히고 난리를 피우다 보면 언젠가 거물이 될거야.” “We Will Rock You(우린 널 흔들어 놓을 거야).”

쿵쿵, 짝! 쿵쿵, 짝! “We Will We Will Rock You”
(☞ 혹시 설교 시간에 이 박자에 맞춰 박수를 칠 때 성도들이 호응한다면 젊은 교회이고, 성도들이 무심하면 설교자는 자신의 목회 방향을 다시금 고민해야 합니다. ^^;;)

Buddy you’re a boy (이봐, 친구 너는 소년이야)
make a big noise (한번쯤 소란도 피워 봐야지)
Playin’ in the street gonna be a big man some day (거리에서 놀다 보면 언젠가 거물이 될거야)
You got mud on yo’ face (얼굴이 진흙 좀 묻으면 어때?)
You big disgrace (부끄러운 줄 알아)
Kickin’ your can all over the place (여기저기서 난리를 피워, 소란을 피워봐)
Singin’ (노래 불러!)
We will we will rock you (우리가 널 흔들어 놓을 거야!)
We will we will rock you (우리가 널 흔들어 놓을 거야!)

Buddy you’re a young man hard man (친구여, 넌 젊고 혈기 왕성한 남자야)
Shoutin’ in the street gonna take on the world some day (거리에서 소리치다 보면 언제가 세상을 가질 수 있어!)
You got blood on yo’ face (얼굴에 피가 좀 묻으면 어때)
You big disgrace (부끄러운 줄 알아)
Wavin’ your banner all over the place (전국 각지에서 네 현수막을 흔들어!)
We will we will rock you (우리가 널 흔들어 놓을거야!) 
Sing it! (노래 불러!)
We will we will rock you (우리가 널 흔들어 놓을거야!)

Buddy you’re an old man poor man (친구여, 넌 늙고 가난한 사람이지)
Pleadin’ with your eyes gonna make you some peace some day (처량한 눈으로 애걸하고 다니면 언젠가 평안해 지겠지)
You got mud on your face (얼굴이 흙 좀 묻으면 어때)
Big disgrace (부끄러운 줄 알아)
Somebody better put you back into your place (더 나은 누군가가 너를 제자리로 돌려 놓겠지)
We will we will rock you (우리는 너를 흔들어 놓을거야) 
Sing it! (노래불러)
We will we will rock you (우리가 널 흔들어 놓을거야!)

2. 어린아이, 약한자와 작은 자의 상징

신약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막 9:33)” 묻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집으로 오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막 9:34)’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군대에서 계급이 중요하듯 남성들의 사회(조직)에서는 서열이 중요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던 남성 제자들에게 ‘누가 크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을 달랐습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막 9:35-37)

이 당시 유대 땅에서 어린 아이의 존재는 지금 우리의 인식과 많이 다릅니다(사실, 별차이나지 않기도 합니다만). 어른이 아닌 어린 아이는 ‘이등 인간’ 취급을 당했습니다. 아니, 여성들과 이방인과 함께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어린 아이는 ‘약한 자’와 ‘작은 자’의 상징이었습니다. 어른들에 의해 무시당하고 따돌림 당하고 이용당했던 이들이 바로 어린아이들이었습니다.

▲ 예수님과 어린 아이 ⓒGetty Image

사회 구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는 제국의 시민/식민지 백성, 유대 사람/사마리아 사람(이방인), 남성/여성, 높은 사람/낮은 사람, 주인/노예, 가진 자/못가진 자, 정상인/장애인 등의 차이가 어른/어린 아이의 차이로 존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꿈꾸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것을 뒤집습니다.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작은 자, 약한 자를 섬기는 것이 참된 제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로 적용해 보면 기성세대인 꼰대와 ‘파키스탄 꼬마’를 가슴 속에 품은 젊은이들의 자리바꿈입니다. 따라서 겁내는 자들이 용기 있는 자들로 변하는 세상, 못 보는 사람이 듣는 세상, 못 듣는 사람이 잘 듣는 세상, 다리를 저는 사람이 뛰어 다니는 세상, 말 못하는 사람들이 하루 종일 말하는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소외당했던 사람들이 한번쯤 소란도 피우고, 얼굴에 진흙도 좀 묻히고, 난리를 피우는 세상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감각적인 것의 분할’이라고 말합니다. 랑시에르는  『감성의 분할-미학과 정치』 (도서출판b, 2008)에서 미학과 정치를 주제로 삼고, 민주주의와 평등 개념을 둘러싼 ‘정치’의 개념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감성의 분할〔감성(le sensible)보다는 감각적인 것으로, 분할(le partage)보다는 나눔(share)의 의미로 받아들여야 더 원 뜻에 더 가깝습니다만〕’이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이 분할되어 배제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하면, 듣고, 보고, 느끼고, 먹는 것이 배제된 이들, 물론 그 이유는 돈이 없고, 힘이 없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곧 비존재로 전락된 사회의 약자들이, 작은 자들이 자신들을 비존재로 만든 이 사회의 배제의 전략을 뚫고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어를 되찾고 보이는 자리에 서는 것, 들을 수 있는 곳에 들어가는 것, 느낄 수 있는 것을 만지는 것, 먹을 수 있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감성의 분할입니다. 자기 몫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각자의 몫을 주장할 때, 즉 기존의 감성의 분할을 뒤흔들어 더 많은 몫을 더 많이 공유하려고 할 때 비로소 정치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3. 속임이 없고 섞이지 않은 젖을 사모하라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베드로는 서신서 본문에서 현재 주어진 구원을 찬양하고, 동시에 현재의 시련과 연단을 통해 장래에 주어질 고난의 축복을 찬미합니다. 따라서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켜야할 의무에 대해서 들려주고 있는데, 그 핵심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순전(아돌로스)’하다는 말은 ‘속임이 없는, 섞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먼지나 불필요하고 해로운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낟알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앞서 90년대생의 특징을 ‘간단, 재미, 정직’으로 표현했는데, 순전하다는 것은 요즘 의미로는 간단하고 정직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간단하고, 정직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속이지 않고 외식하지 않고 시기하며 비방하지 않고 “갓난아기들 같으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을 들어볼까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벧전 1:22)

진리에 순종함으로 영혼이 깨끗해졌으니 거짓이 없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말씀에 기초한 썩지 아니할 씨로 우리가 거듭났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말씀, 썩지 아니할 씨, 복음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벧전 1:24-25a)”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꼰대의 기질을 버리고 젊은 세대를 이해하려고 해야 하며,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이 바로 이러한 실천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벧전 2:1-2)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할 수 있습니다(벧전2:3). 서로 섬기며 사랑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새로운 세상 제자도의 모습입니다. 농부 철학자인 윤구병 선생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서로 도우면서 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생명체로 태어났으니까 품을 서로 주고받아야 한다. 품을 산다, 품을 판다는 말도 있고, 품앗이라는 말도 있고, 엄마 품 아빠 품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품이라는 것은 실제로 울타리 안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되고, 더 넓은 품으로 품들이 확산돼야 한다. 그 힘들이 확산될수록 좋은 세상은 온다.”

함께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참견이 아니라 참여하도록 해야 합니다. 『90년생이 온다』에서 임홍택도 이렇게 말합니다. “새로운 세대는 참여라는 말에는 긍정적이지만 참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참견(參見)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와 별로 관계없는 일이나 말 따위에 끼어들어 쓸데없이 아는 체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함’이고, 참여(參與)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일에 끼어들어 관계함’이다. 이 정의에 따르면 그들은 자기와 어느 정도 관계있는 일이나 말 등에 직접 나서고자 한다.”

기성세대와 90년대생들이 참견이 아니라, 참여를 통해 속이지 않고 가식이 없고, 시기하며 비방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했던 섬김의 의미이며 베드로 사도가 이야기하는 참사랑의 의미인 것입니다.

4.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이 그리로 행할 것이며

그러나 모두가 이 말씀대로 살지는 않습니다. 또한 이 말씀을 들으나 수용하지 않습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벧전 2:2). 구약의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유대 제 13대 히스기야 왕 당시, 앗수르 제국의 왕 산헤립은 유다를 두 번 침공합니다(사 33장, 36-37장 참조). 이사야 선지자는 이때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멸망시킬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경외하라.”라는 위로를 전합니다. 결국 이 전쟁에서 유다가 승리합니다(사37:36-38 참조). 구약 본문 말씀은 33장과 36-39장 사이인 35장 말씀으로, 전쟁의 한 가운데서 평화의 왕, 회복의 주, 메시야를 대망하는 말씀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도래하게 될 영광스러운 메시야 왕국에 대해 노래합니다.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 온갖 죄악으로 인해 황무지처럼 파괴되었던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다시금 에덴동산처럼 회복시키실 것임을 예언합니다. 전쟁의 한 가운데서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음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사 35:1-2)

따라서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서 고난과 역경을 당하는 이들은 약한 자들입니다. 겁내는 자들입니다. 못 보는 사람, 못 듣는 사람, 다리를 저는 사람, 말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사 35:3-4)

하나님께서 오시어 구해주시는 그때에는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사 35:5-6a)”하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세상은 이렇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공동번역: 늪)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공동번역: 샘터)이 될 것이며 승냥이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사 35:6b-7)

그런데 말입니다. 이 세상으로 가는 길(대로)은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만이 다닐 수 있다고 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만이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사 35:8-10)

<혹성탈출>(1968)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인류 문명은 무너지고, 유인원(원숭이)들에 의해 인간이 사육되는 미래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주인공이 메마른 바닷가 사막 한 가운데 무너진 자유의 여신상 앞에서 절규하는 장면은 영화사에 기억될 유명한 엔딩 장면입니다.

▲ 영화 <혹성탈출> 마지막 장면

이사야는 이러한 인간의 교만과 죄악으로 세상이 ‘광야와 메마른 땅, 사막’이 되어 버린 황무지를 예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구속받은 이들(사 35:8)’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희망은 여기에 있습니다. 전쟁의 한 가운데서 평화의 왕으로, 회복의 주로, 메시야로 임하시는 아기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진리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리고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고 모든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릴 때 가능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최병학(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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