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학림다방 옆 골목으로 100여 미터 들어가면, 골목이 오른 쪽으로 꺾기며 담과 집이 온통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아담한 2층집이 보이는데, 백기완 선생님이 계시는 통일문제연구소다. 파란 쇠문을 열고 들어서면 시멘트 바닥의 작은 공간이 있고 바로 마루로 오르는 현관문인데, 그 왼쪽 벽돌을 쌓아 화분처럼 흙을 채워 만든 한 평 남짓 공간에 제법 큰 살구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햇볕도 잘 들지 않고 흙도 깊지 않아 늘 말라 있는데 그래도 살구나무는 껑충하게 큰 키로 그런대로 잘 자라고 있다. 연구소 직원인 원희 씨의 갸륵한 정성 덕분이다.

백 선생님께서 재야 민중후보로 대통령에 출마하던 때는 이 집도 문전성시를 이루어 발 디딜 틈이 없었지만, 어디에 소속하거나 어느 정파든 한쪽의 우두머리를 싫어하는 성품 탓으로 가끔 찾아오는 연구소 후원회원이나 투쟁사업장 노동자들이 들릴 뿐 늘 한가했다. 그래도 꾸준히 드나들며 선생님의 탁월한 문화 예술적 감각과 경험에서 오는 구수한 입담을 즐기는 몇몇이 있었는데 나도 그랬지만 신학철 화백도 그 중 한 분이었다.

▲ 살구나무 ⓒGetty Image

특히 신 화백은 백 선생님으로부터 예술적 영감과 작품 활동에 대한 자극을 많이 받는 것 같았다. 선생님께서 신학철 화백과 대화하시며 새로운 그림에 대한 영감과 구상을 얘기하시면, 말없이 듣고 있던 신 화백은 작업실로 돌아가 선생님 말씀을 바로 그림으로 살려냈다. 그리고 그 그림을 선생님께 헌정하시기도 했다.

백 선생님은 나에게도 시와 글쓰기에 대한 끊임없는 격려와 채찍을 주셨는데, 말씀과 함께 언제나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시는 모습으로 모범을 보이시며 가르쳐 주셨다. 나는 백 선생님의 그런 모습을 보며 번쩍 정신을 차리곤 했다.

언젠가 시에 대한 얘기를 하시면서 신경림의 시에 나오는 살구꽃에 대해 얘기하셨다. 그 의미와 상징이 너무도 감동스러워 듣는 우리는 경탄할 따름이었다. 백 선생님께서는 신경림 시인의 작품에는 <농무> 등 우리 민중의 삶을 노래하는 시도 많지만 <월악산 살구꽃>이 그 중 최고라며 멋지게 외우곤 하셨다.

“월악산에서 죽었다는 아들의/ 옷가지라도 신발짝이라도 찾겠다고/ 삼십 년을 하루같이 산을 헤매던 아낙네는/ 말강구네 사랑방 실퇴에 앉아 죽었다 한다// 한나절 거덕대기에 덮여/ 살구꽃 꽃벼락을 맞기도 하고/ 촉촉이 이슬비에 젖기도 하던 것을// 여우볕이 딸깍난 저녁나절/ 장정 둘이 가루지기로 메어다가/ 곳간 뒤/ 바위너설 아래 묻었다// 찾아다오 찾아다오 내 아들 찾아다오/ 너희들이 빨갱이라고 때려죽인/내 아들 찾아다오// 이슬비 맞아 여우볕/ 딸깍난 저녁나절이면 아낙네는 운다/ 살구꽃잎 온몸에 뒤집어 쓴 채/ 머리칼 홑적삼이 이슬비에 젖은 채”

그리고 얼마 뒤 신 화백이 연구소에 왔다. 손에 나무 묘목이 들려 있었다. 신 화백 고향 시골 동내 어귀에도 살구나무가 있었는데 봄에는 꽃도 너무 곱게 피어 언젠가는 꼭 그려보리라 했는데, 백 선생님 살구꽃 얘기를 듣고 사왔다는 것이다. 원희 씨 정성으로 무럭무럭 자라 5년쯤 지나니 봄이면 제법 꽃도 어우러지고 여름이면 살구까지 노랗게 달려 맛도 괜찮았다. 살구꽃이 필 땐 모여 신경림 시인의 <월악산 살구꽃>을 읊조리며 꽃놀이도 하고, 살구가 익을 땐 몇 알이라도 이웃과 나누었다.

백 선생님께서 촛불혁명의 그 차가운 겨울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집회와 시위에 나가시더니 몸이 많이 쇠약해지셨다. 그 다음해 봄날 살구꽃 필 무렵인데 웬일인지 연구소 앞 살구나무도 시들시들했다. 지난겨울이 너무 추웠나 보다.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도 달랠 겸 심장수술 후유증으로 입맛 떨어진 선생님 모시고, 그나마도 고향 맛으로 맛있게 드시는 평양냉면을 먹으로 갔다. 신 화백과 나 그리고 이웃인 학림다방 이 사장과 원희까지 선생님과 함께, 살구나무 아래서 결의를 하고 한 달에 한 번 씩 냉면을 먹기로 했다. 먼저 학림다방에 모여 선생님 말씀도 듣고 얘기도 나누다가 냉면을 먹으러 가는 모임이라 ‘학냉모’라 이름 붙여 보았다. 이렇게 우리의 작은 냉면모임이 시작됐다.

선생님이 회복하시면 올봄에도 활짝 핀 살구꽃을 보리라. 노랗고 달콤한 살구 맛도 보리라.

아 봄이 기다려진다.

▲ 백기완 선생님 ⓒGetty Image

이수호 이사장(전태일재단)  president110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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