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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향한 작은 나라”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80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 승인 2019.07.17 18:33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게 하라. 열과 백 사람의 그릇이 있어도 쓰지 않도록 하고, 백성이 죽음을 무겁게 여겨 멀리 옮겨 다니지 않게 하고,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게 하고, 비록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진을 칠 일이 없게 하고, 사람이 다시 결승(끈 매듭)을 사용하게 하고, 음식은 맛있고, 옷은 아름답고, 거처는 편안하고, 풍속은 즐거워하도록 하라. 이웃 나라가 서로 보이고, 닭과 개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다니지 않게 하라.”
- 노자, 『도덕경』, 80장
小國寡民, 使有什(十)伯(百)<人>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乘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人復結繩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樂其俗, 隣國相望, 鷄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전 세계가 한 나라처럼 가까워지고, 짧은 시간에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세상에서 노자의 가르침은 황당하기도 하다. 자연의 순리인 도(道)에서 너무 멀리 떠나온 사람들은 노자의 가르침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고 한다. 노자 도덕경의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하여 권력이나 이익을 추구하려 한다면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권력을 잡아서 남을 지배하거나, 경쟁하는 사람들을 이기고 소위 성공하려 하거나, 이익을 많이 남겨서 부자가 되려는 사람에게 노자의 가르침은 허황된 소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자는 인민이 모든 인민들과 자연과 더불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궁극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과 이익과 성공을 추구하면 서로 경쟁하고 싸우고 해치게 되기 때문에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는 모든 인민의 몸과 마음의 바탕에 자연의 도가 깔려 있어야 한다. 노자는 지금 인민들이 거의 이해할 수 없고 따라 갈 수 없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인위적인 정치를 그치고 태고의 자연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소박한 마음으로 잔잔한 풍속을 즐기며 사는 모습이다. 작은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끼를 매듭지음”(結繩)의 의미는 고대의 간편하고 쉬운 정사를 가리킨다. 그리고 새끼의 매듭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했던 시대로 돌아가자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고대에는 새끼의 매듭 모양과 수로써 의사소통을 했다고 한다.

막다른 골목에서 울다가
돌아 나온 사람들은 모르지
그곳이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음을

막다른 골목에서 주저앉아 울다가
결국 막다른 골목이 된 사람들도 모르지
당신이야말로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음을

막다른 골목에서 결국 쓰러진 사람들도 모르지
낙타가 쓰러지는 건 깃털같이 가벼운
마지막 짐 하나 때문이라는 것을

막다른 골목에 핀 민들레는 알지
사막이 쓰러지는 것도 결국은
한마리 쓰러진 낙타 때문이라는 것을
- 정호승, “막다른 골목”, 「이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은 크고 강한 것을 추구하는데, 그 단점도 많이 드러나고 있다. 이제 경제도 성장은 멈추었기 때문에 분배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모색하고 있다. 정치도 중앙정부보다는 지방정부가 가까운 곳에서 복지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특히 에너지(전기)는 중앙통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에너지 자립마을이 효과적인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모든 생명과 인민의 평화를 위하여 노자의 작은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실제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기후변화와 에너지 위기에 대한 문제 인식을 바탕으로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통해 에너지 소비는 줄이고, 에너지 효율과 신·재생에너지 생산은 늘려 에너지자립도를 높여가는 마을공동체를 에너지 자립마음이라고 한다. 에너지 절약과 효율화, 자체 생산을 통해 전기요금도 아끼고 지구환경 보호는 물론, 잉여 에너지를 판매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마을이 많아지면, 지속가능하고 안전한 에너지 사용이 먼 미래가 아닌 바로 내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크게 미칠 수 있는 신의 아들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큰 것을 추구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것은 사람의 아들인 인민들이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자연의 도(道)를 따르는 일은 궁극적으로 세상의 평화를 이루는 일이다.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 속에서 언제나 자기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성서를 번역할 때에 “人子”라고 하면 선입견에 의하여 대단한 어떤 존재처럼 느껴지지만, 풀어서 말하면 “사람의 아들”입니다. 마각복음에서 보여준 예수님의 능력, 즉 병을 고치고 귀신을 축출하고 풍랑을 잔잔케 하는 능력을 보면 당시 사회에서 충분히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수 있지만, 예수님은 굳이 자기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악한 세력들은 예수님을 매수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신의 아들이다. 저런 벌레 같은 떨거지들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신의 아들이 뭐가 아쉬워서 그러느냐. 차라리 우리와 손을 잡자. 우리가 하는 일을 그대로 두고 상관하지 말라. 그러면 당신은 그 능력으로 부와 명예와 권력을 손에 넣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 것이다.’ 악한 세력은 이렇게 “하느님의 아들”을 들먹이며 예수님에게 애원하고 부르짖으면서 유혹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대해서 예수님은 꿋꿋하게 “사람의 아들”로서 행동하였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처형해 놓고 나서 처형된 예수님을 쳐다보며 “이 사람은 진실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하고 고백했다는 것은 그 처형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했다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곧 로마 백부장의 외침은 로마 정부의 패배의 외침이 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추앙받는 지위를 마다하고 철저하게 사람의 아들로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고통받고 억눌린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고난을 받으면서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사람들의 고통에 함께 신음하시는 하느님의 본질을 행동으로 옮기셨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아들의 죽음은 하느님을 떠나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에게 도전하는 권력에 대항하여 사람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처절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처절한 고통 속에서 죽임 당한 것, 그리고 그러한 사람의 아들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극심한 박해의 상황 속에서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인가?”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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