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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 참살이의 입구”살며 묵상하며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 승인 2019.12.26 03:21
1 그 때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는데, 2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시행한 것이다. 3 모든 사람이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고향으로 갔다. 4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므로, 갈릴리의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에 있는 베들레헴이라는 다윗의 동네로, 5 자기의 약혼자인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올라갔다. 그 때에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는데, 6 그들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마리아가 해산할 날이 되었다. 7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누가복음 2:1~7/새번역)

어떤 외국인이 표현한 한국사람의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한국인이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냉정하게 보이지만 알고 보면 친절하고 따뜻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처럼 학연이나 지연 등으로 관계가 확증되면, 너무 잘해줍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눈치보고 신경 쓰면서 배려합니다. 그러나 ‘남’이라는 영역에 남겨진 타자로 인식되면, 너무 냉정하게 대하곤 합니다. 무시하고 없인 여기며 냉대합니다. 두 얼굴의 야누스를 닮았습니다. 김한민 작가의 말처럼 한국사람은 “이해관계 지향적”(『아무튼 비건』, 13쪽)이기 때문입니다. 이해관계 안으로 들어오면 더 이상 남이 아니지만, 이해관계 밖에 있다면 막 대해도 되는 타자일 뿐입니다.

▲ Oswaldo Guayasamin ⓒOswaldo Guayasamin Facebook

김한민 작가가 어릴 적 받은 문화 충격이 인상적입니다(『아무튼 비건』, 11, 12쪽).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스리랑카와 덴마크에서 자라고 초등학교 2학년 때 귀국합니다. 교실 뒤쪽에 공용 연필깎기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학급 물품을 내 것처럼 아끼자.’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 글귀가 작가에게는 충격이었습니다. 외국에서 배운 바에 따르면 다르게 적혀야 했습니다. ‘학급 물품을 남의 것처럼 아끼자.’ “‘내 것’이라면 다소 소홀히 해도 좋을지 모르지만, ‘남의 것’ 혹은 ‘우리 것’이라면 더 조심하고 아껴야”(12쪽) 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받은 충격이 긴 여운을 남깁니다. ‘내 것처럼 아끼자’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문화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관점의 뒷면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남의 것은 막 써도 된다는 전제가 처음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남의 것을 막 다뤄도 된다고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남의 것은 막 쓰고, 내 것은 아끼는 태도가 일반적이라는 생각이 전제 된 것입니다. 물건뿐 아니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내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잘해주고, 이해관계 밖에 있으면 막 대해도 되는 남입니다. 이런 타자화와 배제와 배타가 우리 주변에 만연하지 않습니까. ‘저 사람 잘 해줘봐야 아무 소용없어.’ 이해관계를 따라 판단하는 단적인 표현입니다. 자신에게 득이 될 사람은 우리이고, 득 될 게 없는 사람은 남, 타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 신앙에서 너무 익숙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내 것처럼 아끼자’라는 관점 안에서만 살아간다면, 어떨까요? 자신에게 득이 되는 예수님만 사랑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더 폭력적인 타자화를 낳기도 합니다. 이해관계에 따라 믿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타자화에 의한 배제와 배타, 혐오와 폭력에 앞장서는 한국 개신교인의 모습도 이와 관련되지 않는지, 돌아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더 이기적인 이유는 아닐지. 주님을 믿는 삶은, 원수를 사랑하는 삶은 남이기 때문에, 타자이기 때문에 더 사랑하는 삶이 아닙니까.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기 때문에 더 존중하는 삶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해관계 중심의 타자화가 아이들에게 스며든 결과, 빌거, 월거, 전거…라는 가슴 아픈 혐오가 자라납니다. 빌라 사는 거지, 월세 사는 거지, 전세 사는 거지, 그래도 거지는 사람이건만, 월급이 이백만 원이면 이백충, 벌레가 됩니다. 차별의 은어로 혐오를 놀이 삼는 아이들, 우리 시대가 낳은 현재이자 미래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지나며 “메리”가 생기를 잃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구유에 누운 거지, ‘구거’이겠습니다. 구거의 탄생을 축하하는 기쁨을 어찌 알겠습니까. 집도 없이 떠돌아 다니셨던 예수님의 삶, 그런 삶을 향한 성탄을 어찌 이해할지. 아이들이 교회에서 성탄절 연극과 캐롤을 부르고 새벽송을 돈다고 이해하겠습니까.

아기 예수님 누운 구유는 이해관계에서 득이 되는 자리입니까, 손해만 끼칠 자리입니까? 약자 중에 약자의 자리, 득이 되기보다는 짐이 될 자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그렇게 소외된 약자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유는 은유이자 상징입니다. 타자화하여 배제하고 억압한 약자의 자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로 보여준 성육신의 은유입니다. 그때 타자는 배타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로 드러납니다.

성탄을 축하할 때, 그러므로 구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자 계시입니다. 구유에 누울 수밖에 없는 타자가 계시로 드러납니다. 약자가 하나님의 부르심이자 계시로 드러납니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의미를 새롭게 합니다. “사람답게 사는 삶은 다른 사람(타자)에 눈뜨고 거듭 깨어나는 삶이다.”(엠마누엘 레비나스 『윤리와 무한』, 158) 레비나스의 관점에서 타자는 사람답게 사는 삶의 입구입니다. 성탄을 축하할 때, 그러므로 빌거, 월거, 전거, 이백충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빌거, 빌라에 거하시는 하나님, 이백충, 이백만 원으로 살아도 충분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하태혁 목사(단해감리교회)  devi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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