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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으로 부르심(렘 31:10-14; 벧전 2:18-25; 눅 15:1-10)사순절 둘째 주일(2월28일) 3·1절 기념주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02.26 15:34

1.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지난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과 죽음을 향한 예루살렘행 순례의 길에 참 많이 외로우셨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b).”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 증거였었죠? 그런데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이러한 외로운 순례의 길, 혹은 고독한 사명의 길이 궁극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것은 곧 죄인 한 사람, 혹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구원하기 위한 생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길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도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는 목자의 마음으로 그 외로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렇게 죄인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고, 또 그 고난의 길로 저와 여러분들을 지금 이끌고 계십니다. 

따라서 복음서 말씀은 이렇게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큰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서신서 말씀인 베드로전서에서, 사도 베드로 역시 우리가 이렇게 한 사람이 회개하여 구원받도록 인도하는 사명의 길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구약의 말씀 예레미야서를 통해, 잃어버린 이들, 곧 멸망 당한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이 3·1절 기념주일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의 은혜와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우리 민족과 이 땅 위에 가득 차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누가복음 15장 말씀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3가지 비유의 말씀입니다. 첫째 잃은 양의 비유(눅 15:3-7), 둘째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8-10), 여기서 드라크마는 옛 그리스의 은화로 노동자의 하루 일당 정도의 금액이 됩니다. 셋째 잃어버린 탕자의 비유(11-32)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비유가 주는 교훈은 바로 잃어버린 생명의 소중함입니다. 따라서 잃었던 것을 다시 찾았을 때의 기쁨을, 곧 잃었던 생명이 다시 회복되었을 때의 기쁨을 잘 보여줍니다. 

말씀의 배경을 볼까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눅 15:1-2).” 그러자 예수님께서 3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는 2가지를 말씀하시고, 다음 주 사순절 셋째 주일에 3번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무튼 두 가지 비유의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눅 15:3-6)

▲ 목자와 잃어버린 양 한 마리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눅 15:8-9)

▲ 아테네 여신과 올빼미가 새겨진 드라크마 은화

그리고 각각의 비유에 대한 의미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 15:10).”

잃어버린 양 한 마리와 동전에서, 죄인 한 사람으로 확대되죠? 그리고 이러한 잃어버린 죄인이 회개한 것은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쁜 일이며 하나님의 사자들도 크게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사명은 이렇게 잃어버린 자들을 다시 찾는 것이며 그들이 다시 회개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상전이 아니라,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사실 오늘 본문 말씀 베드로전서 2장은 베드로 사도가,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들려주는 말씀입니다. 곧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해서 개인생활과 사회생활로 구분하여 권면하는 것입니다. 첫째 개인생활의 경우는 성화(聖化)입니다.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자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벧전 2:4-5). 둘째 사회생활의 경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이방인들과 국가 권세와 핍박자들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사환들아(οἰκέτης)!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18-20)

여기서 사환들, 오이케테스는 일반적으로 교육이나 훈련을 받은 후에 가사의 일부를 책임지고 돌보던 종들을 말합니다. ‘집안에 함께 거하는 종’이죠. 그런데 이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노예였지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러한 노예들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집주인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합니다. 게다가 베드로는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생각이나, 혹은 사도 바울의 혁명적인 가르침과는 많이 다릅니다. 물론 베드로전서가, 교회가 조직화 된 상황에서 그 당시 문화와 상황(노예 제도)을 인정하고 말씀을 전한 것도 있겠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께서도 우리의 종노릇 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종노릇 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나, 지금 우리들이나 노예는 아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종과 노예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인인 종들에게도 주인에게 순종하라는,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22-24a)

잃어버린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외롭고도 고통스러운 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러한 종의 삶이 아니라, 상전의 삶을 추구합니다. 길 잃은 양과 같이, 인생의 참다운 의미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아름다운 행복을 깨닫지 못하고 오직 권력과 명예와 부귀를 추구하여 세상에서 또한 교회에서 방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셨던 종의 삶을 소개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4b-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외로운 고난의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예수님께로 나아가,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예수님과 동행할 때, 고난은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행복과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구약 예레미야 선지자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민족의 멸망을 선포했지만, 그 멸망을 통해 다시금 회복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3.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오늘 구약 예레미야 본문 말씀은 이미 멸망해버린 북 왕국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 말씀 이후에는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될 남 왕국 유다에 관한 메시지도 있습니다(렘 31:15-30). 예레미야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렘 31:10-12)

하나님께서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물 댄 동산 같은 심령이 될 것이며 다시는 근심이 없을 것이라고 축복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들이,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고난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며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남녀노소 모두가 기뻐 춤을 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3-14)

4. 3·1절 기념주일과 건국절 논쟁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은 3·1절(三一節) 기념주일입니다. 3·1절은 대한민국의 국경일로,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1일 토요일 (음력 1월 29일), 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만세 시위를 벌인 독립선언일이자, 대한민국 헌법에서 명시한 헌법 이념인 3·1운동 정신의 탄생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 1948년 9월 1일 발행된 대한민국 관보 1호에서도 발행일을 대한민국 30년 9월 1일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대한민국의 시작이 1919년 삼일절이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 1948년 9월 1일 이승만 대통령이 발행한 대한민국 관보 1호

도산 안창호 선생은 ‘대한민국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라고 3·1운동을 소개하며 1주년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삼일절! 이 날은 가장 신성한 날이요. 대한민국 자유와 평등과 정의의 생일이니, 진실로 상제가 허하신 날이오. 이 날은 일이 개인이 작정한 것이 아니오. 2천만이 하였고 다만 소리로만 한 것이 아니오. 순결한 남녀의 혈로 작정한 신성한 날이오.”

단지 만세 소리뿐만이 아니라, 피로서 작성한 신성한 날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날을 상제(上帝)가 허락하신 날이라고 하는데, 상제는 곧 하나님이죠? 그 이념이 자유, 평등, 정의입니다. 또한 대한민국 2년 2월 27일 혈성단(血誠團, 1920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정식명칭은 대한애국청년혈성단)의 3·1절 축하 경고문은 이렇습니다.

“아! 경사로다! 건국의 기념일이여! 반도강산 이천만 민족의 생명은 이 날부터 부활하기 시작하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 날이 다시 돌아오니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지 않을 수 없다. 굽히지 않는 열성과 꺾이지 않는 충정으로 원수의 엄혹한 단속에도 굴하지 않고 찬란하고 위대한 활동을 위하여 축하해야 할 것이다. 아는가? 3월 1일이 무슨 날인지?”

이러한 3·1운동은 세계에서도 비슷한 예가 많지 않은 대규모의 집단적 저항 운동입니다. 광복에 대한 한국인의 염원과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만천하에 알린 사건입니다. 3·1운동은 베드로 사도의 말처럼, 이방인들과 일제의 권세와 핍박 앞에서 거룩한 만세운동이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부당하게 고난을 받았지만, 참고 견디고 이겨내 마침내 해방을 이룬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따라서 대한민국 헌법은 3·1운동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였으며 그 정신을 승계하여 1919년 4월 11일 정부를 수립했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건국절 논쟁이 있었습니다. 8·15광복절을 건국절로 해야 한다는 것이죠? 1948년 8월 15일은 36년간 일제에 빼앗겼던 주권을 되찾은 날입니다. 광복절입니다. 북한에서는 제 124대 쇼와(昭和, 1901-1989년, 본명 히로히토) 일왕이 항복했다고 해서, ‘소화 손들기’라고 합니다.

아무튼 실제 대한민국 건국은 1919년 3·1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에서 수립했지만, 8·15광복절을 건국절로 해야 한다는 이들은 국민·영토·주권이 확립된 1948년이 대한민국이 건국된 해라고 봅니다. 따라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정부를 출범한 8월 15일을 건국절로,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라고 주장합니다.(물론, 이승만 대통령은 그런 생각이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광복절이 건국절이 아닌 이유가 바로 3·1절과 관련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그 전통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임시정부는 3·1운동을 계기로 하여 한반도를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존재하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힘을 합쳐 민주적 제도를 통해 수립한 것입니다. 이것은 근대적 국가 성립 개념인 국민·영토·주권을 넘어선 민족의 부활이며 원수의 엄혹한 단속에도 굴하지 않고 일궈낸 찬란하고 위대한 새 역사인 것입니다.

5. 친일파의 잔재

따라서 1948년 8월 15일을 광복절, 곧 해방 기념일이 아닌 건국절로 하자는 주장은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친일에 뿌리를 두고 있는 현재의 기득권 세력들에게 그들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기억나는 분들이 많으시겠는데,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10.7.-1992.2.6.)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스즈끼(박근형 분)라는 악질 고등계 형사가 나오는데요, 이 자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잡아 고문하고 죽입니다. 아무 죄 없는 사람들에게도 누명을 씌워 잡아갑니다. 주인공인 하림(박상원 분) 역시 스즈끼에게 가족들을 잃은 희생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스즈끼는 하림도 잡아넣으려고 계속 괴롭힙니다. 그러던 중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하림은 일제의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해, 미군 특수부대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합니다. 그리고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해방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하림은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림은 경찰서에 들렀다가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합니다. 경찰서에서 여전히 부하들을 호령하고 있는 스즈끼를 발견한 겁니다. 눈이 돌아간 하림은 뛰어가 스즈끼의 멱살을 잡습니다. 믿을 수가 없어서 소리를 지릅니다. “스즈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해방이 되었어! 스즈끼!” 멱살을 잡힌 스즈끼는 부하들을 시켜 하림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하림은 무력하게 경찰들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비명을 지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스즈끼는 침을 뱉듯 말합니다. “저런, 빨갱이 새끼.”

▲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장면(오른쪽 위 제복 입은 이가 스즈끼)

당시 <여명의 눈동자>에서 이 장면은 정말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을 드라마가 알려준 것입니다. 사실 친일파는 해방이 되어도 처벌받지 않았고,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빨갱이로 몰려 두들겨 맞았습니다. 해방이 되었는데, 세상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것이 드라마의 극적 구성이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최근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이 논란이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부(prostitute)’라고 주장한 논문을 3월 발행 예정인 학술지(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s)에 실을 예정이라고 합니다. 논문 제목은 ‘태평양전쟁에서의 성 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이라는 제목인데, 논문 요약본을 보면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여성들은 전쟁터로 가기 때문에 단기 계약을 요구했고, 업자는 여성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계약을 요구했다”, “업자와 여성은 (여성이) 충분한 수익을 올릴 경우, 일찍 떠날 수 있게 하고 1년 또는 2년 단위 거액 선불금을 결합한 계약을 맺었다.”

램지어 교수가 본 계약 문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당시에 계약서를 읽고 동의하고 간 여성들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일제의 강압에 어쩔 수 없이 지장 찍고 끌려간 것이겠죠? 기가 막힌 것은 일제가 독일 법의 영향을 받아 법 관련 문서 작성을 아주 철저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네 이익에 맞게끔. 그런데 오늘 우리나라의 학자들도 그 당시 일제가 작성한 문서를 보고 왜곡된 역사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성서도 맥락을 읽지 못하고 문자만 읽으면 전혀 의미가 달라지는데, 이처럼 근본주의자들은 맹목적입니다.

사실 램지어 교수는 유년 시절을 일본 미야자키현에서 보냈으며 전공은 일본 법률입니다. 게다가 2018년에는 일본 정부의 훈장인 욱일장(旭日章, 일본 최초의 훈장으로 1875년 메이지 천황에 제정되었으며 남자에게 수여되는 훈장) 종류의 하나인 ‘욱일중수장(旭日中綬章)’을 받았습니다. 욱일중수장은 일본 정부가 국가 또는 공공에 공을 세운 이들에게 주는 훈장인 여섯 종류의 욱일장 중 하나입니다. 욱일(旭日)은 ‘아침에 떠오르는 밝은 해’라는 한자어입니다. 일본의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주위에 욱광(旭光, 아침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덧붙여 만든 일본의 군기를 뜻합니다.

▲ 히틀러와 하켄크루즈, 아베와 욱일기

1920년대에 독일 히틀러의 나치당이 공식적으로 하켄크루즈(Hakenkreuz)라 부르는, 구부러진 십자가를 당의 깃발과 배지, 그리고 완장에 사용하였죠? 바로 하켄크루즈와 동일한 의미가 욱일입니다. 독일은 하켄크루즈를 부끄러워하지만, 일본은 자랑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힌 일입니다.

아무튼 우파적 성향의 일본 <산케이신문>은 최근 램지어 교수의 논문을 “세계에 확산되는 ‘위안부=성노예’ 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했습니다.

“어떤 대상이든지 간에 인간은 주어진 조건 하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경제학 수법을 이용해 분석했다. 위안부도 예외가 아니다. 논문은 다른 연구자 업적과 당시 일본과 조선의 사료에 기반해 조선인 위안부도 일본인 위안부도 공인된 매춘부였으며 일본에 납치당해 매춘을 강요당한 ‘성노예’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위안부를 둘러싼 문제점은 조선 모집업자였다는 것을 지적한다.”

여기 뼈아픈 대목이 있죠? 위안부를 모집한 이들이 ‘조선 모집업자’였다는 말입니다. 스즈끼같은 친일파, 그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일본에 빌붙어 살았던 이들! 해방이 되었어도 그 기득권을 놓지 않고 지금껏 권세를 누린 이들입니다. 따라서 지금 대한민국 내에도 친일파가 많죠? 사실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 대통령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친일파를 모두 흡수합니다. 세상이 뒤집히고 처벌이 될까 두려워 덜덜 떨던 조선총독부의 관료들, 경찰들은 살기 위해 이승만에게 가서 붙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납니다. 친일파들의 살길이 열렸습니다. 그들은 이제 ‘빨갱이’를 입에 달고 삽니다. “빨갱이가 쳐들어온다”, “빨갱이가 우리를 죽이려 한다”, “우리가 빨갱이로부터 너희를 지켜주겠다.” 그렇게 친일파는 식민지 시대의 권력을 그대로 유지한 채 지금까지 사회 지도층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스즈끼가 하림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듯, 친일파들이 살아남는 길은 무조건 상대방을 빨갱이라고 몰아붙이는 겁니다. 최근에는 ‘종북 좌파’, ‘좌빨’, ‘사회주의’ 운운하고 있죠? 이들은 자신들을 친일파라고 부르지 말고, 근대화 세력이라고 불러 달라고 합니다. 자신들을 군사독재 세력이라고 부르지 말고, 근대화 세력이라고 불러 달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친일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됐지!”, “독재하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됐지!” “범죄자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됐지”, “사기꾼이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돼지”, “독재자의 딸이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돼지.” 이런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우리 사회에서 먹혔고, 또 먹히고 있습니다.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면 이렇게 생각 없이, 의식 없이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종교가 그러한 비상식과 몰상식에 일조했다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성장은 바로 그러한 비정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정말 제대로 된 신앙, 말씀에 기초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민족의 독립을 위해 고난의 길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들, 만세를 외쳤던 우리 선조들, 그러나 지금 이렇게 자유롭고 민주적인 조국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친일파들은 우리 사회의 경제, 재계, 법조계, 학계, 특히 언론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잡고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도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회개할 때까지, 우리의 사명은 끝이 없습니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 큰 기쁜 일이며 하나님의 사자들도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제대로 된 역사 인식으로, 제대로 된 복음으로, 제대로 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러한 사명의 길을 증거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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