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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신앙고백서들을 통해 본 개혁교회의 특징개혁교회, 무엇이 다른가? ⑵
최영 소장(기독교장로회 목회와신학연구소) | 승인 2021.03.06 15:03
▲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가 등장할 당시 사회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Wikipedia

개혁교회의 개혁자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성서를 통하여 들었다. 따라서 개혁교회의 모든 신학사상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Deus dixit)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해된 ‘성서원리’와 맺는 관계는 명확하다. 여기서 진술되는 개혁교회 신학의 주된 특징들은 저 ‘성서원리’를 토대로 확립된 것들이다. 각각의 주제들은 저 원리를 근간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 속에서 논의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종교개혁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에 고백된 대표적인 개혁교회의 신앙고백들에는 『츠빙글리의 67개 논제들』(1523), 『베른의 열 개의 논제들』(1528),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서』(1530), 『제1 바젤 신앙고백서』(1534), 『로잔 논제들』(1536)과 『제네바 신앙고백서』(1536) 등이 있다. 이 문서들은 츠빙글리와 칼빈의 저서들과 더불어 하나같이 중세 후기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반대에서 루터교회와 대조되는 개혁교회의 특징적인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 그 저자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을, 다시 말하여 인간의 역사와 전통, 인간의 지성과 가능성, 그리고 인간의 선한 의지와 은혜를 획득하는 능력을 갖다 놓으려는 사악한 편법으로써 기독교 설교의 주제를 왜곡하고 기독교 자체를 곡해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교회를 하나의 구원의 수단이 되게 하는 교회만능주의와 자연과 은혜를 타협시키는 그것의 거대한 체계에서, 다시 말하여 중세 교회의 마지막 국면을 특징짓는 이 모든 기획들에서 단지 하나님께 대한 반역만을 보았을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신앙적 관계에서 주체는 하나님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재확립하고자 하였다.(1)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한 개혁교회의 이 같은 이의제기가 루터교회의 주장과 전적으로 동일하지 않다는 것은 루터교회의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과 같은 해에 나온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서』를 비교하는 것만으로 분명해진다. 예컨대, ‘칭의’에 관한 교리에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로 은혜를 얻고,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선언한다. 무엇보다도 “신앙을 통하여”에, 곧 신자의 ‘신앙’에 그 강조점이 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죄된 인간의 의는 ‘신앙’의 의이다.(2) 이것은 루터가 로마서에서 발견했던 바로 그것이고, 또한 그의 이름 아래서 수행되었던 종교개혁의 기치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서』는 “칭의와 신앙”을 다루는 제3장에서(3) 인간은 행위가 아니라 신앙에 의해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는다는 관념에 강조점을 두기보다는 ‘칭의’를 성취하는 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정확히 이 우선적으로 고려할 문제에 강조점을 둔다.(4) 말하자면, 개혁교회의 강조점은 신자의 ‘신앙’이 아니라 그 신앙의 ‘대상’에게 있다. 신자가 신앙을 통하여 얻게 된 ‘의’는 신자의 ‘신앙’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 혹은 ‘그리스도’의 의이다. 그 ‘의’는 ‘신앙의 영원한 대상’이신 그리스도에게 있다.

확실히,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와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서』가 서로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서』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와 달리 로마 가톨릭 교리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롭고 특이한 공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이 부분을 로마서 3장과 4장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이 신앙을 의롭다고 간주하시고 인정하신다”는 말과 함께 마무리한다.

그에 반하여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서』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는 로마서 10장 13절의 말씀을 인용하며 끝마친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 관하여 질문하고,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서』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올바른 관계에서 결정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죄 용서에 대한 신앙 이외에 절망적인 인류의 상황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말하고,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신앙을 주신다는 점에서 하나님만이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실 수 있다고 말한다.(5)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칭의’의 조항에서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의 칭의를 다루는데 반하여, 『테트라폴리탄 신앙고백서』는 매우 같은 기본 주제처럼 보이지만 변증법적으로 매우 다른 빛을 발하는 인간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분명하게 진술한다: 우리는 신앙을 통하여 의롭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어떤 의로운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돌려졌기 때문이다.”(6)

이와 같이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반-로마 가톨릭 논쟁의 중심과 출발점이 되었던 이 ‘칭의’의 문제에서 개혁교회와 루터교회의 서로 다른 특징이 확연이 나타난다. 개혁교회의 개혁자들은 언제나 신앙적 관계의 이 ‘우선적인 측면’(하나님의 주격,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만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다.(7) 우선적인 측면에 대한 관심은 특히 칼빈의 신학사상에서 하나님의 독자성, 절대주권, 자유에 대한 특징적인 강조로 나타났다.

그 결과 개혁교회에서는 신앙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과 성령의 역사를 더 강조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개혁교회 신앙은 항상 인간의 경험을 하나님보다 높이려고 하거나, 인간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으려고 하는 시도 혹은 인간의 신격화, 그리고 인간의 공적(그것이 신앙이든 기도이든 그 어떤 행위이든 간에)에 의해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경계해 왔다. 인간, 인간의 전통, 경험, 역사, 그리고 인간의 이성과 능력보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 즉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우선적인 강조를 두어 왔던 이러한 하나님의 주격성에 대한 강조 배후에는 인간은 전적으로 죄 아래 있고,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완전히 상실한 존재라는 인간관이 그 밑에 있다.(8)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개혁교회 전통의 가장 기본적이며 포괄적인 특징은, 앞서 언급한대로, 철저한 하나님 중심적 사상과 삶이다.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잘 알려진 개혁교회의 표어는 이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를 적절하게 드러내준다. 우리는 이 전형적인 표현을 칼빈이 1545년에 작성한 『제네바 신앙문답서』에서 찾을 수 있다. 문답 2에서 칼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문7은 “올바르게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에 대하여 질문하는데, 1545년판 신앙문답서의 체계인 유명한 4중의 진술과 함께 대답된다. 하나님은 첫째,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사도신조!), 둘째, 우리가 거룩한 뜻에 복종하면서 하나님을 섬길 때(십계명), 셋째, 우리가 우리의 일체의 궁핍 가운데서 구원과 모든 선한 것을 하나님 안에서 찾고 구하고 기도할 때(주의기도), 넷째, 우리가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분께 찬양과 감사를 드릴 때(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 “올바르게” 영화롭게 된다. 여기서 믿고, 순종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 단지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9)

그러나 이 표어는 흔히 “하나님은 전부이고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아왔다. 물론, 칼빈이 “인간의 최상의 행복”조차 하나님을 찬양하고 살아가는 삶에서 찾을 수 있다(10)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오해가 사실인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칼빈은 그 무엇을 논하든 간에, 언제나 하나님과 인간을 함께 고려하고자 했다. 그가 「기독교강요」제1권 첫 문장에서 말하는 것은 그의 신학과 삶 전체를 규정하는 하나의 규범과 같은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온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Inst.,Ⅰ.i.1).

이것은, 확실히, 칼빈의 신학의 ‘변증법적 성격’을 말해준다. 칼빈에게서 ‘인간의 삶’(humana vita) 혹은 인류의 문제는 선험적으로 하나님의 문제와 함께 고려된다.(11) 물론, ‘앞선 것’, ‘우선적인 고려’가 여기에 있다.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응시하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단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Inst.,Ⅰ.i.2). 이 변증법적 관계에서 주도권을 갖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다.

그러나 칼빈에게서 하나님은 결코 이기적이지 않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광받기를 원하시면서, 인간과 인간의 삶에 가장 적절한 목표를 정해 주시고, 이렇게 그것을 목적과 의미 있는 삶으로 만드신다. 하나님은 인간 없이 홀로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되고자 하지 않으신다. 창세기에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인간이 그의 인간적인 실존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하셨다. 이런 방식으로 칼빈의 사상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자기 영화 속에 참여하고 존재한다. 바르트는 정확히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인간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조차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CD.Ⅲ/2, 183).

더 나아가 바르트는 칼빈의 『제네바 신앙문답서』를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해설하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광은, 비록 다른 것이기는 하지만,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실존 내에서 일어나는 그것과 다른 어떠한 하나님의 영광이란 없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또 찬양할 수 있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떠한 인간의 영광도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지복(至福)은 인간의 행복과 일치한다. 인간의 행복은 그의 생애 동안에 하나님의 지복을 나타내는데 있고, 하나님의 지복은 인간의 행복의 형식 아래서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데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영광, 하나님의 지복과 인간의 행복 사이의 이런 관계 속에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앞선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에 근거되어 있고,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지복에 근거되어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독자적인 주님이며 군주이고, 인간은 단지 종일뿐이다. 하나님은 주고, 인간은 받는다... 이것은 그리스도론의 기본적인 주장들에 대한 설명이다.(12)

그러므로 개혁자들이 “하나님께만 영광”을 말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과 인간의 책임, 하나님의 선택과 인간의 결단 양쪽 모두를 말하는 성서의 증거에서 단지 앞부분, 곧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절대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 인간은 단 하나의 선행도 자기에게 돌릴 수 없다(Inst.,Ⅱ.iii.12). 개혁자들의 이러한 자세는 칼빈이 “우리 시대의 펠라기우스주의자들, 곧 소르본느의 궤변가들”(Inst.,Ⅱ.iii.13)이라고 부른 로마 가톨릭교회의 신학자들과는 전적으로 구별된다. 저들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협력할 고유한 힘”(Inst.,Ⅱ.iii.11)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 주장의 성서적 근거를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는 바울의 진술에서 찾는다.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바울의 진술을 왜곡한다. 바울은 자신이 다른 모든 사도보다 낫다고 말한 것이 너무 거만하게 보일까봐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면서 자신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일컬었다는 것이다(Inst.,Ⅱ.iii.12). 그러나 칼빈은 저들이 사용하는 라틴어 번역판 ‘불가타역 성서’가 아니라 바울의 헬라어 본문에로 돌아가(ad fontes) 사도가 진정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자기와 협력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하는 은혜가 모든 것의 원인이다”는 것이었다고 저들을 논박한다(Inst.,Ⅱ.iii.12).(13)

물론, 하나님의 독자성, 주권, 자유에 대한 개혁교회의 강조는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과 섭리에 대한 개혁교회의 신앙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것은 개혁자들이 성서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 값없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와 생명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는데, 그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을 까닭이 어디 있겠으며, 그의 예정과 섭리를 신뢰하지 못할 이유가 또 어디 있겠는가!

이와 같이 개혁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에서 도덕적, 윤리적 당위성이나 율법적 강제 때문이 아니라, 기꺼이 그리고 자발적으로 기쁜 마음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에 대한 이 신앙은, 앞서 지적하였듯이, 우선 인간의 행동과 운명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기 보다는 인간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의지와 길에 대한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이 신앙이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는 그 적극적인 내용의 견지에서 이해된 “성서원리”와 맺는 관계는 명확하다. 개혁자들은 저 하나님의 음성을 성서에서 들었다. 구약성서적인 의미에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곧 그의 영광을 다른 이에게 허락하지 않고, 제약이 없는 자유 가운데서 지배하시지만, 그러나 주권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저 유일하게 독특하고 전능하며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 안에 배타적으로 포함되어 있는 진리, 권위, 그리고 구원에 대한 그들의 열정적인 호소(개혁교회의 교리들)는 단지 살아 계신 저 하나님께 대한 하나의 신앙고백일 뿐이었다.(14)

미주

(미주 1) K. Barth, "The Doctrinal Task of the Reformed Churches",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eter Smith Publisher, 1978), 250-251(이하 DTRC로 표기). 종교개혁 초기의 개혁교회 신앙문서들의 논쟁적인 주장들과 그 해설은, 최영, “개혁교회 신학의 정수”, 『개혁교회 신학의 주제』 (지성과 실천사, 2005), 75-83을 보라.
(미주 2) 이장식 편역, 『기독교신조사』 제1집 (컨콜디아사, 1993), 43-44.
(미주 3) A. Cochrane(ed.), Reformed Confessions of the 16th Century, 57-58.
(미주 4) DTRC, 251.
(미주 5) K. Barth, Die Theologie der reformierten Bekenntnisschriften, 1923, tr. by D. Guder and J. J. Guder, The Theology of the Reformed Confessions (Westminster/John Knox Press, 2002), 71-72(이하 TRB로 표기).
(미주 6) J. Calvin, Instruction in Faith(1537), 이형기 옮김, 『칼빈의 신앙교육서』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1), 40.
(미주 7) DTRC, 251. 루터교회와 개혁교회 사이에 있는 이러한 차이는 근본적인 신학의 차이, 달리 말하면, 우선순위에 대한 강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루터교회와 개혁교회의 강조점의 차이들에 대하여, 최영, 『개혁교회 신학의 주제』, 75-83을 참고.
(미주 8) 박봉랑, 『신학의 해방』 (대한기독교서회, 1991), 339 이하; Loraine Boettner, The Reformed Faith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83), 5-11 참고.
(미주 9) TRB, 96.
(미주 10) K. Barth, La Confessin de Foi de l' Eglise(1946), 최영 옮김, 『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기도/사도신조』(다산, 2000), 93.
(미주 11) TRB, 97. 루터에게서 이 인간의 문제는 중도에서 포기되고 말았다.
(미주 12) K. Barth, 『칼 바르트가 읽은 주의기도/사도신조』, 97.
(미주 13) 여기서 인문주의자로서의 칼빈의 자질이 돋보인다. 칼빈은 저들이 바울의 표현을 왜곡한 이유 가운데 하나를  라틴어 성서의 번역의 오류 때문으로 본다. 칼빈은 바울의 헬라어 본문에 대한 면밀한 주석을 통해서 원전의 의미, 곧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을 강조하려는 바울의 의도를 바르게 살려낸 것이다.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관계에 대하여, A. E. McGrath, Reformation Thought: An Introduction (Basil Blackwell, 1989), 박종숙 옮김, 『종교개혁 사상입문』(성광문화사, 2002), 164-187를 참조.
(미주 14) DTRC,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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