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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인종차별, 성차별을 넘어 종 차별을 지양하며(사 63:1-6; 롬 8:18-27; 요 16:25-33)사순절 넷째주일(2021.3.14.) 총회선교기념주일, 청년주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1.03.12 15:54

1. 아버지께로 가노라.

지난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 바쳐짐으로 말미암아, 곧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해주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 죄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함이라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이 바로 오늘 사순절 넷째주 말씀의 주제라고 말씀드렸었죠?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모든 ‘피조물의 해방’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청년주일이자 총회순교자기념주일인데, 피조물의 해방뿐만 아니라, 이 시대 청년들의 회복과 부흥과 해방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물론, 앞서가신 기독교 순교자들의 정신을 따르는 기성세대의 배려와 관심에서 시작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오늘 본문 말씀 요한복음은 그러한 사명의 길에, 지치고 힘들어하는 우리에게 평안과 위로를 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요한복음 16장은 지난주에 소개한 대언자(Παράκλητος), 곧 파라클레토스인 성령의 사역이 가장 많이 언급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 약속하셨고, 성령의 사역에 관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죽음 이후에 있을 부활의 기쁨을 간직하도록 위로합니다. 또한 환난이 닥쳐도 담대한 신앙을 갖도록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요 16:25-27)

여기서 ‘그날’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날이죠? 그때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죠?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지금은 밝히 말씀하시고 아무 비유로도 하지 아니하시니, 우리가 지금에야 주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사람의 물음을 기다리시지 않는 줄 아나이다. 이로써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심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요 16:28-30)

지금껏 비유로만 말씀하셨던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과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이유를 바로 이야기하시자, 제자들이 그제야 예수님의 참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본질에서 아버지의 품을 잠시 떠나 이 세상에 왔다가 다시 아버지께서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제대로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순교자 적인 사명을 감당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는 책망이 따릅니다.

2. 노함으로 만민을 밟았으며

구약 이사야서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사야 선지자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이스라엘, 곧 세상 모든 나라(피조물까지)를 구원해야 할 제사장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대화체로 너무나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이사야는 에돔의 1,000년의 수도인 보스라에서 온 붉게 물든 옷을 걸치고 온 이가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환난날의 피난처인 보스라의 모습과 위치, 보스라에서 남쪽으로 50여 km에 위치한 나바티아인들의 수도 페트라, 한때 환난 날의 도피처로 여겨진 적이 있으며, 현재 보스라에 남아 있는 가장 완벽한 로마식 원형극장

“에돔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붉게 물든 옷을 걸치고 보스라에서 온 이분은 누구신가? 위엄찬 옷을 입고 위세를 떨치며 저벅저벅 걸어온 이분은 누구신가?”(사 63:1a)

“나는 구원을 약속하는 자, 도울 힘이 많은 자이다.”(사 63:1b)

“어쩌다가 당신 옷에 붉은 물이 들었습니까? 당신 옷은 마치 포도주 틀을 밟다가 물든 것 같군요.”(사 63:3)

“나는 혼자서 술 틀을 밟아야 했다. 나의 백성 가운데 나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도 노여워, 나는 그것들을 마구 밟았다. 그들의 피가 내 옷에 튀어 나의 옷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것이다. 원수갚을 날을 정하고 벼르고 있다가 마침내 복수할 해가 왔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를 돕는 자가 없었다. 놀랍게도 내 편을 드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 팔밖에 믿을 것이 없었고 나의 분노만이 나를 밀어주었다. 너무나도 노여워 백성들을 짓밟고 너무나도 화가 나서 그것들을 짓 바수어 그 피를 땅에 흘린 것이다.”(사 63:4-6)

다니엘서 11장에 보면 열방에 대한 예언이 나옵니다. 바사(페르시아) 제국의 멸망과 알렉산더의 헬라 제국의 분열, 그리고 애굽(프톨레미)과 수리아(셀류쿠스) 간의 전쟁, 마지막으로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기원전 215년경~기원전 164년)가 나타나 유대 나라를 침공하고 핍박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다니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남방 왕(애굽의 톨레미 6세)이 그와 힘을 겨룰 것이나, 북방 왕(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이 병거와 마병과 많은 배로 회오리바람처럼 그에게로 마주 와서 그 여러 나라에 침공하여 물이 넘침 같이 지나갈 것이요. 그가 또 영화로운 땅(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이요. 많은 나라를 패망하게 할 것이나, 오직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지도자들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단 11:40-41)

알렉산더 헬라 제국의 후예인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가 애굽과 싸워 이기고, 여러 나라를 침공한다는 말입니다. 에돔과 모압과 암몬은 쳐들어가지 못하지만, 여호와의 영화로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땅에는 쳐들어갑니다. 그 상황을 다니엘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더럽혀진 유대인 성전>(1465)과 그의 모습 주화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하게 하는 가증한 것을 세울 것이며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단 11:31-32)

성소를 더럽힌다고 하죠? 성전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합니다. 그리고 제우스 신상을 예루살렘 성전에 세웁니다. 그런데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는 타락시키지만,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떨치리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이때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영화로운 땅, 이스라엘에 들어갈 것이나,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의 존귀한 자들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환난의 날에 에돔의 수도 보스라가 이스라엘이 피할 도피처가 될 것이고, 그리고 그곳에서 붉게 물든 옷을 걸치고 온 이가 심판을 거행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피난처인 보스라에서 나온 구원을 약속하는 자, 도울 힘이 많은 자인 심판주께서 혼자서 ‘포도주 틀을 밟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는다’라는 말이죠? 역사적으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무너뜨린다’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심판주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도 심판주의 편을 드는 자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심판주는 너무나도 노여워, 그들을 마구 밟았다고 합니다. 믿을 것은 오직 심판주의 팔밖에 없었고, 분노만이 심판주를 밀어주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이스라엘, 곧 제사장의 나라인 이스라엘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심판하실 때, 선민 이스라엘 백성도 함께 짓밟아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오늘날로 적용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며 불의를 행하면 심판주께서 우리도 짓밟아 버리시겠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말씀이 아닌가요?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과 동시에 공의의 능력으로 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다시 복음서 말씀으로 돌아가 볼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1-32)

다니엘서와 마찬가지로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예수님만 홀로 남겨 둡니다. 그러나 심판주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죠?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공의로운 심판에서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능력, 곧 구원하시는 능력을 통해 아버지의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렇습니다. 세상의 환란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예수 제대로 믿어 고통받고, 환란을 당할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승리하셨습니다.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공의의 심판과 구원의 능력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땅에서 주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에는 피조물의 해방과 구원에 대한 것도 있습니다. 따라서 드디어 오늘 주제가 나옵니다. 서신서인 로마서 말씀을 볼까요?

3. 피조물의 해방

▲ 신음하는 지구와 모든 피조물들의 온전한 해방을 위하여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롬 8:18-21)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υἱῶν τοῦ Θεοῦ)’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τέκνων τοῦ Θεοῦ)’은? ‘아들들(휘온-복수)’과 ‘자녀들(테크논)’이라고 나누고 있지만, 공동번역에는 둘 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번역합니다. 만약 단수인 하나님의 ‘아들(휘오스)’라고 했다면, 예수님을 뜻하겠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하니, 이것은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곧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피조물들이 고대(苦待)하는 바가 된다는 것이죠? 몹시 기다리는 바가 되며, 그 고대하는 바는 피조물이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우리와 같은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창조 질서 보전의 사명이죠? 바울 사도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볼까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물론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것은 비단 피조물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물론, 우리 인간들도 양자(養子)될 것,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바라며 우리 몸의 속량(구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먼저, 그것이 이뤄질 것이라 믿는 소망에서 시작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바라고 믿고, 참고 기다리면 그 소망이 이뤄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죠? 인간은 누구나 보이는 것을 믿지,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위로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또한 피조물의 해방을 위해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구원과 해방을 위해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4. 동물 해방

성도 여러분 가운데, 반려동물을 키우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주변에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도 보았을 것입니다. 최근 윤리학계와 신학계에 인공지능이나 로봇 윤리에 관해 연구하는 흐름이 있는데, 이에 더해 동물권(動物權) 논의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인권(人權)의 개념과 같이 동물의 권리를 이야기해보자는 것입니다. 먼저 질문을 던져 봅니다. “동물을 사랑하거나, 학대하는 것은 인간 개인의 취향인가요? 아니면 동물에 대한 이해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인가요?”

피터 싱어(P. Singer)라는 윤리학자는 『동물 해방』(1975)이라는 책에서 ‘이익평등고려’의 원칙에 따라 이렇게 주장합니다. “인종이나 성에 근거해 차별을 정당화하는 인종차별주의나 성차별주의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면, 단지 종(種)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간이 다른 동물을 차별하는 종 차별주의 또한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인종차별, 성차별에 대한 저항이 있었다면 이제 종 차별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싱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농장과 동물원, 그리고 실험실의 문을 열고 갇혀 있는 모든 동물을 풀어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동물에게도 생태계는 물론 인간에게도 재난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동물에 대해 가진 잘못된 편견과 부도덕성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하려는 것이다.”

피터 싱어가 영향을 받은 질적 공리주의자인 존 스튜어트 밀(J. S Mill)은 『공리주의』(1861)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덕은 인간만이 아니라 쾌락과 고통을 감각 할(느낄) 수 있는 존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인간 행위에 관한 규율이다.” 이러한 밀의 입장을 수용하여 피터 싱어는 앞서 소개한 책 『동물 해방』에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첫째, 어떤 존재에 대한 도덕적 배려(고려)의 기준이 이성이나 합리성이 아니라, 고통과 괘락을 느낄 수 있느냐 하는 것에 있다(쾌락 감수 능력,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능력).
둘째, 어떤 존재가 고통과 쾌락에 대한 감각 능력을 지닌 존재라면 그 존재의 이익 관심(이해관계)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동등하게 배려받아야 할 자격이 있다(이익에 대한 동등한 고려의 원칙).”

▲ 디엑트 액션 에브리웨어(DxE, 직접행동 어디서나) 활동가들이 2021년 2월 14일 오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서 착유당하는 동물을 위한 ‘피로 물든 가슴’ 상의 탈의 액션을 펼치고 있다. DxE 코리아는 이날 행동이 발렌타인데이를 타겟으로 초콜렛을 포함한 각종 제품에 쓰이는 유제품의 포장지 속에 감추어진 착유 당하는 동물들의 끔찍한 현실을 직접 가시화 했다고 밝혔다.

이것은 고통과 불행의 최소화라는 공리주의의 원리에 동물의 권리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피조물의 해방을 말하는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미국의 생태학자인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는 『모래군의 열두 달』(따님, 2000)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윤리의 대상도 시간에 따라 달라지며 점점 확장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성은 인격체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여성과 어린이, 노인 모두 보호하고 존중해야 하는 도덕적 대상입니다. 여성에게도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줘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 시대에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입니다. 호메로스의 시대와 비교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윤리적 대상이 점점 확대되어 온 셈입니다. 이것이 바로 윤리학이 진화하는 방향입니다. 이 방향에 따르면 모든 동식물과 토지까지(자연 전체) 윤리의 대상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윤리의 대상도 확장되었듯이, 구원받을 대상도 확대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 인류가 차별해온 인종차별, 성차별(특히 변의수 하사의 예에서 보듯이, 성 소수자 혐오와 차별은 극심하죠?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개신교의 논리는 비록 ‘동성애 반대’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그 근거에는 나와 다른 타자를 혐오하는 미성숙이 놓여 있습니다. 성서 신학적으로 동성애 관련 부분은 많은 논의가 진행될 문제인데, 한국 신학계의 미성숙으로 이를 정치 이데올로기화시켜 개인적으로는 안타깝습니다.)을 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중이듯이, 이제는 종 차별까지 극복하여 생명 있는 모든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를 이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알도 레오폴드의 『모래군의 열두 달』과 알버트 슈바이처의 『나의 생애와 사상』와 사진

5. 생명이란 무엇인가?

알버트 슈바이처는 『나의 생애와 사상』(문예출판사, 199)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하는 존재인 인간은 그가 그 자신에게 부여하고 있는 생명에 대한 경외를 똑같이 모든 살려고 애쓰는 존재들에 대해서도 부여하려고 하는 충동을 강하게 깨닫는다. 그는 다른 생명을 자기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성장 가능성이 있는 생명을 자기 안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그는 성장 가능성이 있는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을 촉진하며, 생명을 가장 고귀한 가치로 고양하는 것을 선으로 받아들인다. 반면 성장 가능성이 있는 생명을 파괴하는 것, 생명에 해로움을 주는 것, 생명을 억압하는 것을 악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이것이 도덕에 관한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원리이다.”

그렇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루터교 목사가 된 슈바이처가 자신이 배운 신학을 실천하기 위해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므로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켰던 것처럼, 우리는 인류의 형제애만이 아니라, 모든 지구상의 친구들과의 형제애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은 슈바이처의 말처럼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한때 슈바이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매일 나의 책임 아래에서 하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야 하는 일은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놀라운 사명의 길에 우리를, 또한 청년들을 순교자의 길로 부르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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