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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 신학교 풍토에 회의감이 들었다”이삼열 박사와 “해외에서 함께 한 민주화운동” ⑵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1.12.12 15:26
▲ 이삼열 박사는 장로회신학대학에 입학하기도 했었지만 보수적인 풍토의 환경에서 교회가 사회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회의감이 들어 결국 포기하게 되었다고 했다. ⓒ홍인식

이삼열 박사는 지난 인터뷰 기사에서 해외 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민주화운동이 강력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해외 한인회가 많이 조직되어 있었지만 관변 단체의 성격이 진했고 민주화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소위 ‘빨갱이’로 몰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고 했다. 그야말로 한인회에서는 방외 인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역사였다.

하지만 해외에 있었던 교회는 달랐다는 것이다. 특히 국내에서 활발했던 민주화운동에 자극받아 교회를 중심으로 기독교민주화운동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 자신도 이들 한 가운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박사가 이런 해외에서의 민주화운동에 전념하게 되었던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이 박사의 인생사 아닌 인생사, 아니 한국 현대사의 한 단면을 들어보게 되었다.

▲ 이렇게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이 박사님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집니다. 박사님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요? 특히 학생 시절의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이 박사님은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시고 1968년도에 독일로 유학을 하셨잖아요.

이삼열(이하, 이): 네, 서울대 철학과를 63년에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하고 곧 바로 군대에 입대를 했어요. 공군 장교로요. 1963년도였습니다. 그때 제가 공군 장교로 입대해서 4년 4개월을 군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위까지 진급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당시 서울 공군본부에 제가 근무를 했기 때문에. 정훈감실에서 근무를 하면서 거기서 정훈잡지를 편집했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군인 같지 않은 군대 생활을 했어요. (웃음) 정훈장교로 근무하는 동안 대학원 논문을 써서 석사학위를 할 수가 있었죠. 그러니까 병역과 학업을 동시에 했지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겠지만요.

그때 재미있는 것은 제가 63년에 서울대를 졸업하면서 대학원도 입학하고 장로회신학대학도 동시에 입학을 했어요. 1963년 4월이었어요. 그때 학장이 누구였던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학장님과 인터뷰를 하는데 제가 철학과 나오고 그러니까 무조건 합격이라고 막 그래 가지고, (웃음) 그래서 신학원에 가게 되었어요.

제가 유경재 목사보다 한해가 후배예요. 유경재 목사하고 또 홍성현 목사가 우리 철학과 선배거든요. 그 분들이 철학을 공부하고 신학원에 들어갔으니까요. 저도 사실은 목사가 되기 위해서 철학을 했으니까. 또 아버지 하고 약속이 대학 마치고는 신학교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동신교회를 다녔는데 담임이셨던 김세진 목사님 추천을 받아가지고. 장로회 신학원에 입학하였습니다. 서류 합격을 하고 인터뷰를 해서 합격을 했는데 곧 바로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갔죠.

그런데 공군 장교 4년을 하는 동안 많은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63년에서 67년까지 4년 동안은 한일 회담이 있었고 그 다음에 박정희 독재가 시작이 되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이런 상황에서 저는 ‘정말 내가 이거 뭘 해야 되느냐?’ 하는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보니까 너무 보수적이고. 제대하고 신학교 들어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67년경에 장신대 외국인 신학 교수(이름을 잊어버렸는데)가 모세 오경의 저자는 모세가 아니다 하는 주장을 하고 그리고 요나가 고래 뱃속에 들어간 건 신화이며 사실이 아니라고 강의했다고 해서 신학교에서 쫓겨난 사건이 있었어요.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내가 들어가서 이런 데서 어떻게 목사가 될지 조금 더 생각해 봐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래서 보류를 하고 서울여자대학에 시간 강사 자리를 얻어가지고 철학 강의를 했습니다. 그때 마침 결혼을 하게 되었고 생활비도 벌어야 해서 취직자리를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인천의 모 학교에 교사로 취직이 돼서 가르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기독교사상」 잡지를 보니까 ‘크리스챤아카데미’에 대한 소개가 났어요. 강원용 목사라는 분이 독일에서 지원을 받아 크리스챤아카데미를 만들었는데 교회와 사회의 다리를 놓는 대화를 통해서 기독교적인 안목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운동단체라고. 그것을 보면서, ‘신학교 가는 것보다 여기에서 배워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민하다가 그냥 불쑥 그냥 무조건 수유리에 있는 아카데미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강원용 목사하고 만나려고 했지만 워낙 바쁜 분이어서 다섯 번째 만에 만났어요.

그래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신학교 입학은 하였지만 크리스챤아카데미 얘기를 들으니까 관심이 생기고 특히 교회와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여기서 몇 달 만 배운 후에 신학교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몇 달 여기서 견학할 수 있는 그런 게 없겠습니까?” 하고 말했습니다. 당시 아카데미에 직원이 세 사람 밖에 없었어요. 근데 일거리는 많은데 사람은 필요한 상황이었지요. 저의 이야기를 다 듣고 강원용 목사가 “내가 당신 처음 보니까, 당신 얘기만 들어서는 잘 모르니까, 집에 가서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 하고 왜 이런 걸 하려고 하는지를 좀 편지를 써서 보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가 1967년 제대하기 석 달 전이에요.

그래서 집안 얘기부터 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에 가서 에큐메니칼 훈련 받은 이야기, 그리고 교회의 책임 중의 하나가 사회 개혁에 있는데 기성교회에서는 이걸 하지 못하는데 이런 기관에서 배우고 싶다는 얘기를 포함하여 약 20페이지를 써 가지고 보냈어요. 그 후 한 달이 지났는데 어느 날 강원용 목사가 불러서 갔습니다. 강 목사님이 “편지 잘 읽었다고 하시면서 그만하면 됐다. 내일부터라도 나와서 일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프타임으로 해서 사흘만 나가서 일했습니다. 마침 서울여대 이틀을 나가서 강의를 해야 되니까. 잘 된 것이었죠. 당시 제가 서울여대 강사와 서울대 철학과 조교를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크리스챤아카데미 일까지 세 가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제대하기 석 달 전이었습니다. 당시 군대에서는 제대하기 얼마 전에 자유롭게 놔줘요. 그때만 해도 참 대한민국 군대가 그랬습니다. (웃음) 그래서 조교하면서 서울여대 다니면서 크리스챤아카데미 다니면서 바쁘게 살았죠.

이렇게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한두 달 파트타임으로 일했는데 저를 전임으로 일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에게 연구부장을 맡기는 거예요. 그 후 교육정상화 위원회, 부정부패 연구위원회 또 교회갱신위원회 등 세 가지 위원회를 만들어서 연구 활동을 계속했죠. 당시 교회갱신위원회에는 한철하 박사, 유동식 박사, 홍현설 박사 등 10여 분이 참여해서 한 달에 한 번씩 세미나를 하고 그랬죠.

교육정상화 모임에는 이영덕 박사, 정원식 박사, 정희경 박사 등이 참여했지요. 서울대 사범대학의 교수들 10여 명도 참여하곤 했지요. 교육정상화위원회에서는 입시제도 바꿔야 된다는 건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 때문에 아이들 병들게 하는 것은 안 된다고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초등학교 3-4학년 학생이 입시 공부에 몰두하게 되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의견이 모아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중학교 입학시험은 폐지해야 된다고 여론화되고 결국 중학입시가 폐지되고 소위 일류중학교가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크리스챤아카데미가 한 일입니다.

▲ 만 26살에 크리스챤아카데미 연구부장을 하시고 교육갱신을 주도하시고... 그리고 68년에 독일로 유학을 가십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박사님의 아버님이 당시 풍기에서 목회를 하시는 목사님이셨는데. 그런데 보통 그 당시에 목사 집안들은 거의 근본주의적인 보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을 텐데. 어떤 배경에서 이 박사님은 그런 삶을 사시게 된 것일까요?

▲ 1966년 11월16일 강원용 목사가 설립한 크리스찬아카데미 수유동 아카데미하우스 준공식. 왼쪽부터 슈미트 박사, 길진경 한국교회협의회 총무, 뮐러 박사, 원용석 무임소장관, 오재경 건축위원장, 강원용 목사, 한경직 목사, 백낙준 고문. ⓒ여해 강원용 사이버아카이브

이: 그렇죠. (웃음) 제 아버지는 만주에서 봉천신학교를 다녔어요. 동북신학교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38년에 평양신학교가 문이 닫히잖아요. 신사 참배 거부로 인해서 신학교가 없어졌단 말이에요. 평양신학교가 문이 닫혔는데 그 때가 저의 아버지가 신학교를 가려고 하는 그 무렵(41년)인데 신학교 문이 닫혔으니까 만주로 건너가서 신학교에 입학하셨습니다. 또 그 당시에 평양신학교의 교수들이 만주로 가서 봉천에 동북신학교를 열었어요. 교장이 박형룡 박사였고 박영민 박사하고 박윤선 박사 등이 가르쳤지요. 안광공 목사도 가서 교회 행정 가르치고. 그러니까 평양신학교가 그대로 봉천으로 옮겨간 거예요.

저의 아버지가 거기서 공부를 했고 박형룡 박사 등의 영향을 받았으니까 성서 근본주의에다가 말할 것 없죠. 굉장히 경건주의고 보수적인 신학을 갖게 되셨죠. 나도 또 거기서 쭉 자랐고 그렇게 자랐습니다. 중학교까지는 매우 보수적인 상황에서. 그렇게 해서 나도 이제 아버지 따라서 목사가 된다고 그랬지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를 서울로 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서울 친척 집에 있으면서 서울사대부고를 다녔습니다. 그 때 동신교회(당시 담임 김세진 목사)를 다녔지만, 처음에는 아버지가 나를 영락교회로 데리고 간 거예요.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영락교회 가서 설교를 들으니까, 아, 이건 뭐 너무나 달라요. 그래서 한경직 목사님을 따르게 되었죠. 김세진 목사 설교도 좋지만 한경직 목사처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와 고등부는 9시에 동신교회에서 예배드리고 11시 반 예배를 영락교회로 갔습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계속해서 필기를 하고. 제가 고등학교 2-3년 동안은 완전히 한경직 목사 팬이었어요. 주일 저녁예배 수요 3일 저녁예배까지 가고. 필기를 하면서 들었습니다. 당시 한경직 목사는 저의 모델이었지요.

▲ 그런데 이 박사님이 에큐메니칼 혹은 진보적인 신앙을 가지시게 된 데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는가요?

이: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한국 학생 대표로 에큐메니칼 캐라반이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미국을 갔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내가 영어를 꽤 했습니다. 영어하면서 선교사들도 만나고 그랬어요. 당시 헤랄드 트리뷴에서 하는 고등학생 전 세계 영어 웅변대회가 있었어요. 그 대회에 나가려고 영어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1년에 한 사람밖에 못 나가니까. 나는 2학년 때는 한 번 해보겠다 하고 1학년 때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2학년 초가 됐는데 우리 아버지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기독교 공보에 공고가 나왔는데 미국에서 장로교 학생대회를 하는데 한국 대표를 초청을 하니까 거기에 응모해 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종로에 있는 총회본부에 원서를 내고 응모를 했죠. 그런데 전국 14노회에서 한 사람씩 추천이 되어서 결국 시험을 보게 되었어요. 성경 시험 보고 그 다음에 영어 선교사가 인터뷰를 하고. 그 때 응모한 학생들 중에는 강신명 목사 아들도 있었고 당시 내노라 하는 목사의 아들들이 많이 왔어요. 경쟁이 심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합격이 된 거예요. 한명 뽑는 데 내가 합격했죠. 신문에도 나고 그랬어요.(웃음)

당시 외국 여행이 불가능했습니다. 법무부 장관 허가받아야지 또 국방부 장관 허가도 있어야지… 미국 여행이 도저히 불가능할 때였습니다. 어려운 과정을 다 거쳐서 드디어 고등학교 2학년 6월부터 8월까지 석 달 동안 미국 북장로교를 방문하게 된 것이죠. 그때는 남북 장로교가 연합이 아직 안 됐을 때예요. 57년이니까.

당시 북장로교회 본부(내가 지금도 그 주소를 기억하고 있습니다)가 156 5th Avenue, N.Y., 5가의 156번지에 있었어요. 뉴욕 맨하탄이에요. 그리고 거기에 미국 북장로교의 뉴스 센터가 있는데 청년국 대표가 교지 부마 목사예요. 일본 목사예요. 예일 나오고 그 사람 이름으로 초청장이 온 거예요. 당시 미국에 오기 전에 제가 우리 학교에서 또 특별 허가를 받은 것이 있어요. 당시 한국학생들은 모두 짧은 머리(일명 빡빡머리)가 규칙이었잖아요.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런 머리는 죄수 취급을 하니까 그래서는 안 되니까 학교에서 제가 머리를 기를 수 있는 스포츠머리를 할 수 있도록 했죠. 유일하게 학교에서 나만 머리를 길렀어요.(웃음)

그러고 미국을 가야 하니까 양복을 해서 입고 그렇게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1957년 만 16살 때였어요. 내가 생일이 6월 20일 생일인데 미국 도착해서 만 열여섯 살 생일 케익을 받았어요.

그래서 이제 노스웨스트 비행기를 타고. 그때만 해도 내가 졸업한 풍기 중학교에 가서 이제 미국 가게 됐다고 그러니까 거기서 난리 났죠. 기차 타고 내가 서울로 올라오는데 태극기들을 들고 그냥 한 50명이 학생들이 플랭카드 써 가지고 와서 환송하고 사대부고에서도 돈 모아가지고 축하금이라고 해서 당시 50만원 정도 주고 비행장까지 와서 환송하고 그랬습니다.(웃음)

저의 어머니 아버지 좋아하셨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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