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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상황 적합 시험’(호 8:1-7; 롬 9:1-5; 마 4:1-4)주현절 둘째 주일/여신도회주일(1월1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01.14 03:04

1. 통과의례의 떡 덩이

주현절 둘째 주일입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본격적인 공생애 활동이 시작됩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공생애 활동 전에 마귀에게 시험을 받습니다. 따라서 넷째 주까지 이어지는 주현절 복음서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받으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현현, 그 시작에는 시험이 있습니다. 종교학에서는 이것을 통과의례라고 보는데, 이러한 통과의례의 첫 단계는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입니다. 두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고 마지막 세 번째 시험은 마귀에게 절하라는 시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마귀를 물리치시고 통과의례를 완성하십니다.

그러나 구약 호세아서 말씀은 예수님처럼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가증한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한 하나님의 진노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만큼 시험을 참고 견디고 이기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서신서인 로마서 말씀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 간구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형제, 골육의 친척을 위해 자기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울의 마음에서 참된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특별히 오늘은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가 지정한 여신도회주일(매년 1월 셋째 주일)인데, 한국교회는 이러한 바울과 같이 자기 자신 보다 이웃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희생했으며 자기 생명보다 가족과 민족을 더 사랑했던 여신도들의 믿음과 용기로 세워졌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부터 볼까요? 앞서 세 가지 시험을 말씀드렸는데, 이 세 가지 시험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면 각각 ‘상황부합의 시험(교인의 요구, 필요를 채우는 것)’, ‘이목 집중의 시험(이름 석 자 알리는 것)’, ‘권세 확장의 시험(풍요와 성장, 그리고 안정)’으로 적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오늘 본문 말씀인 첫 번째 시험을 살펴볼까요?

▲ 돌들로 떡 덩어리가 되게 하라는 시험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 덩이가 되게 하라.”(마 4:1-3)

▲ 통과의례 때 빠지지 않는 한국의 떡과 서양의 케이크

앞서 통과의례라고 말씀드렸는데, 여기 ‘성령으로 이끌리어’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사실 통과의례란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떠한 인생의 고비를 넘을 때마다 전통에 따라 의식이나 의례를 마련하여 새로운 대우를 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적인 통과의례의 의식이나 의례에는 그 사회의 대표적인 음식이 등장합니다. 서양에서 케이크가 주로 등장하고(생일 케이크), 한국에서는 떡이 그 통과의례의 대표적인 음식입니다. 성경도 오늘 말씀처럼 떡이 나옵니다. 이렇게 통과의례 때면 떡을 먹습니다. 생일, 돌, 회갑, 결혼식, 장례식 같은 날이면 백설기, 수수경단, 인절미 등의 다양한 떡을 먹죠? 또한 각 절기마다 있는 특별한 날에도 떡은 빠지지 않습니다. 설날에는 흰떡, 삼짇날에는 진달래화전, 한식날에는 쑥떡, 추석에는 송편 등을 먹었습니다.

아무튼 성령으로 이끌리어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데 40일을 금식하여 주렸습니다. 따라서 통과의례와 상관없이 굶주렸기에 먹을 것, 곧 떡 덩어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상황에 맞습니다. 그래서 상황부합의 시험입니다. 굶주리면 먹어야 합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서라도 먹어야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황의 요구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이것을 목회 현장에 적용하면 교인의 요구, 필요를 채우는 목회입니다.

그러나 다양한 교인들의 서로 다른 욕구를 다 채울 수 없습니다. 많은 목회자가 목회적 소신 없이 교인들의 요구대로 이랬다저랬다, 왔다 갔다 하다가 목회에 실패합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시험을 이기셨듯이, 먹을 것,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가지고 이러한 상황부합의 시험을 극복해야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마 4:4)”

2. 사마리아의 송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황에 부합하려고 합니다. 그 상황에서는 최선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황부합의 유혹은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호세아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사실 호세아서 8장은 북이스라엘의 부패한 타락상을 질책했던 호세아의 제4편의 설교(호 7:8-8:14)입니다. 교만하여 하나님 대신 우상을 숭배하고 영적 간음을 자행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멋대로 왕을 옹립하고 가증스러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였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기준 없이, 자기들 상황의 필요에 따라 우상도 만들고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상황에 부합하도록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따라서 호세아는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합니다.

▲ 사마리아 산당의 송아지와 우골탑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이로다. 그들이 장차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하리라. 이스라엘이 이미 선을 버렸으니, 원수가 그를 따를 것이라.”(호 8:1-3)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황에 부합하게 왕과 지도자를 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해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선을 버렸다고 합니다. 따라서 원수가 그들을 따를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상황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들을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이며 그들이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결국은 파괴되고 말리라.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느니라. 내 진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호 8:4-5)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 상황에 맞게 우상을 세웁니다.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산산조각 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장인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산산조각이 나리라. 그들이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요, 혹시 맺을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호 8:6-7)

사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목축 대신 농사를 짓게 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올리브 농사, 포도 농사, 호밀 농사가 더 중요해졌습니다. 따라서 농사의 신인 바알과 그 상징인 송아지 숭배가 중요하고 상황에 적합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착한 가나안땅 사람들은 농사짓는 데 도움이 되는 소가 풍요와 재물과 부귀를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60~70년대 시골에서는 소 한 마리가 한 가족을 먹여 살렸죠? 소가 대들보였습니다. 게다가 자식 대학 공부도 시켰습니다.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들어보셨죠? 소의 뼈다귀를 쌓아 올려 만든 탑입니다. 한때 대학을 신성한 학문의 전당, 진리의 전당인 상아탑(象牙塔) 대신 우골탑으로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못 배운 부모의 한을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신은 못 먹고 못 입어도 좋으나 자식은 그리되면 안 된다는 부모의 마음으로 소 팔고, 집 팔고 해서 자식을 시골에서 도시로 유학 보낸 피눈물의 탑입니다. 어떻게 소가 우상이 되지 않을 수 있겠으며 그 배우지 못한 서러운 상황에 부합하지 않겠습니까!

3. 이대남과 여성혐오, 한국의 이대남이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러나 오늘날 그 자식들의 자녀들은 우골탑이 아니라, 여골탑(女骨塔)을 세우고 있습니다. 여성의 피눈물과 뼈를 쌓아 올려 우리 사회를 차별과 혐오의 탑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이대남’이라고 들어보셨죠? 20대 남자를 말합니다. 2030, MZ세대도 비슷한 말입니다. 특히 20대 남성들에게 여성혐오와 차별이 심한데 오늘 여신도회 주일을 맞아 우리 사회의 여성혐오 현상에 관해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 2016년 ‘강남역 화장실 여성 살인사건’과 메갈리아 페미니즘 운동

잘 아시다시피, 2016년 ‘강남역 화장실 여성 살인사건’ 이후, 우리 사회를 강타한 ‘페미니즘 리부트(여성 인권 재부흥)’ 운동이 있었습니다. 여성 인권에 대한 존중이죠? 사실 한 해 전인 2015년에 인터넷상에 페미니즘 커뮤니티 사이트인 메갈리아(Megalia)가 등장합니다. 페미니즘 운동이 더욱 치열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들은 여성혐오를 그대로 남성에게 반사하여 적용하는 이른바, ‘미러링(mirroring)’을 사회 운동의 전략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메갈리아는 2017년에 폐쇄되었죠? 그럼에도 이러한 페미니즘 운동에 반감을 품은 젊은 남성들의 백래시(반동)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이러한 백래시는 조금 더 ‘인문학적’입니다. 표피적이고 폭력적인 이전 백래시와 달리, 이번에는 정치와 고전을 끼고 돕니다. 인문학자로서 통탄할 일입니다만, 아무튼 이번 백래시에는 헤시오도스, 오비디우스, 세네카, 키케로 등 고전 인문학자와 그리스 신화와 스토아 철학 등이 인용됩니다. 현재는 ‘메타’로 이름을 바꾼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의 여동생이자 고전학자인 도나 저커버그가 그 현상을 잘 분석했습니다.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문예출판사, 2021)라는 책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 도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 도나 저커버그와 그녀의 책

“소셜미디어는 정보의 전례 없는 민주화를 이끌어냈지만, 한편으로는 반페미니스트적 관념을 가진 남성들이 그들의 관점을 그 어느 때보다 널리 퍼뜨릴 수 있게도 해주었다. 그들이 음모론, 거짓말, 잘못된 정보 들을 함께 유포한 것은 물론이다. 소셜미디어는 여성혐오를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폭력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오빠 마크 저커버그의 기술이 이대남과 MZ세대들의 잘못된 가치관 확산에 영향을 주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도나 저커버그는 이 책에서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인 ‘레드필(the Redpill)’을 분석합니다. 이 커뮤니티는 2012년에 개설되어 현재 회원 수가 23만 명입니다.

▲ <매트릭스>의 레드필, 영화 <더 레드필>, 레드필 홈페이지

레드필은 2016년 <더 레드필>이라는 다큐멘터리로도 나왔는데, 감독인 캐시 제이는 페미니스트로, 남성 인권 단체를 비판할 목적으로 그들과 인터뷰를 했으나, 감독의 생각과 달리, 남성 인권 단체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되어 아예 남성 인권 다큐멘터리로 제작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감독이 페미니스트를 관두기로 선언한다는 내용입니다.

아무튼 레드필 이름의 유래는 영화 <매트릭스>(1999)의 ‘빨간약(레드 필)’에서 따온 것으로, 주인공 네오가 파란 약을 먹으면 계속 가상현실에 머문 채로 있지만, 빨간약을 먹으면 가상현실에서 깨어나 진실을 보게 된다는 선택지에서, 빨간약을 먹음으로써 현실로 깨어나게 된다는 것에서 착안합니다. 이것은 줄곧 자신이 현실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사실은 가상현실에 불과했다는 진실을 직면하게 된 것이죠?

이렇게 영화 <매트릭스> 이후로, 빨간약이라는 것은 일종의 ‘자기가 줄곧 믿어왔던 편안하고 안락한 기존의 생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고 불편한 진실을 깨우친다’, ‘진실과 자기 지식을 나타내는’ 등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레드필은 현재 ‘페미니즘이라는 가상을 깨우치고 남성 존중의 진실로 가자’라는 그런 의미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레드필 커뮤니티에는 남성에게 불평등한 법과 규범을 철폐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남권운동가, 비자발적 독신(involuntary celibate)을 뜻하는 ‘인셀’, 여성을 꾀어 관계를 갖는 기술을 알려주는 ‘픽업 아티스트’, 결혼도 거부하며 여성과 완전히 분리된 채 살아가는 ‘자기 갈 길을 가는 사람들’, 극우 성향의 백인 우월주의 집단으로 트럼프의 지지로 급부상한 ‘알트라이트(alt-right, 대안 우파)’ 등이 모여 있습니다.

도나는 레드필 커뮤니티에서 가장 조회 수가 많은 게시물과 가장 영향력이 있는 필자들의 글을 살피면서 이들이 공유하는 반페미니즘의 근거와 논리를 살펴봅니다. 여기서 도나가 찾은 것이 바로 인문학 고전입니다. 도나의 말입니다.

“레드필 남성들은 특히나 고전에 매료되는데, 고전에서 자신들의 반동적인 젠더 정치학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건져 올린 문헌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에 쉽게 적용이 가능하다. 이들은 그 문헌에 담긴 고대의 여성혐오라는 깊은 우물물도 함께 길어낸다.”

그렇다면 이들이 끌어 올린 고대 문헌의 문장을 살펴볼까요?

“남성이 여성보다 감정 절제를 더 잘한다(무소니우스)”, “여성은 자기 통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이 낮다(세네카)”, “여자 같은 남자보다 더 나쁘고 수치스러운 것은 없다(키케로)”, “여자라는 파괴적인 종족은 인간 남성에게 고통을 안긴다(헤시오도스).”

사실 위의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대다수 고대 철학자는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의 한계이지, 오늘도 유용한 가치관이 아니죠? 맥락을 빼고 문장만 골라서 읽어내는 잘못된 고전 독해입니다. 도나는 이렇게 쏘아붙입니다. “고전에 대한 이들의 해석은 자신이 살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열망을 담은 재현에 가깝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고대 문헌에 대한 레드필의 분석은 환원주의적이고 많은 오류가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은 고대 문헌을 분석하지 않는다. 고전에 대한 이들의 해석은 고대 세계에 대한 독해라기보다는 자신이 살고자 하는 세계에 대한 열망을 담은 재현에 가깝다. 이들은 젠더화 된 행동 모델을 이상화하며, 이를 위해 지난 2,000년간 인류가 일궈온 사회적 진보는 지워버린다. 이들은 고대 문헌으로 그 작업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렇게 극우집단이 그리스와 라틴 고전의 권위에 힘입어 온라인에 퍼뜨린 트롤링(Trolling, 관심 끌기, 관심 유발, 화나게 하기)이 여성혐오, 인종주의, 왜곡된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곧, 죽은 백인 남자들을 인용하는, 살아 있는 백인 남자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고전과 여성혐오를 접목하고 퍼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엠엘비파크’, ‘보배드림’ 등 남초 커뮤니티에는 ‘남성이 고비용을 부담하는 데이트 문화’, ‘남성이 집 마련을 도맡는 결혼 문화’ 등 가부장제의 부정적 잔재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돌리는 왜곡된 ‘피해자 서사’가 여전히 넘쳐납니다. 따라서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난 여성혐오 사건들은, 도나 저커버그의 말처럼 ‘새로운 단계의 폭력’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도나는 이렇게 묻습니다.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의 이대남이 다 그런 건 아닙니다!”

4. 나의 형제 골육의 친척인 이대남을 위하여

오늘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여성혐오에 앞장선 일부 몰지각한 이대남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바꿔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2)

▲ 최상층 이대남 일수록 이타성이 부족하다는 조사와 남녀 갈등

사실 이대남의 분노를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여성을 향한 사회적 차별보다는 그 격차나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일방적 혜택에 더 크게 분노합니다. “왜 20대 남자들만 이렇게 불공정하게 대접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들은 사회적 ‘정의’를 위한 것이라도 ‘공정’하지 않다고 여기면 반대합니다. 각자도생, 능력주의를 살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가치 판단입니다. 공감과 이타성은 그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죽게 생겼는데, 지금 빵이 필요하고, 집이 필요하고, 알바 자리가 필요하며, 취직이 필요한데, 다른 사람의 고통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사상 최고의 스펙을 가진 이대남들은 우리 사회의 불공정한 시스템으로 말미암아 지금 최고의 피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여성 우대가 있기에 여성을 혐오하며 차별하는 것입니다. 정치권에서는 다가오는 두 차례의 선거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이들 세대를 모른 체할 수도 없는 실정입니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제도적 차별을 해결해야 하는데, 이대남의 요구로 개인의 복리나 이익에 정치의 방향이 좌우될까 안타깝습니다.

세월의 무게와 역사의 경험치가 이들을 성숙시키기 전까지 우리는 이들의 구원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서두에 한국교회를 세우고 살린 것은 여신도들의 봉사와 희생, 믿음과 용기라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절망에 빠진 한국의 이대남을 살리는 것도 한국교회 여성들의 기도와 사랑입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렇게 바라봅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롬 9:3-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말씀 사모와 사랑의 논리로, 또한 상황부합의 논리로 우상숭배의 길이 아니라, 생명의 길로 나아가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죽어가는 우리의 동생과 아들, 손자가 되는 많은 이대남을 구원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특별히 이들이 20대의 이 통과의례를 잘 극복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길 잃은 수많은 영원을 구원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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