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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권 목사, 겨울공화국을 지나 교회로 돌아가다정상시 목사, 34년만에 안민교회에서 은퇴하다 ⑴
홍인식 대표(에큐메니안) | 승인 2022.01.30 14:29
▲ 안민교회를 개척해 34년 동안 목회했던 정상시 목사가 지난 12월 조기은퇴했다. ⓒ홍인식

정상시 목사, 그는 누구인가?

최근 그가 발간한 『어느 운동권 목사의 평화 순례: 평화동산 가는 길』(하루의 산책, 2021)을 살펴보자. 그는 한국전쟁 휴전 다음 해 1954년, 지리산 산줄기, 황매산 기슭 작은 마을(두메산골) 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비기마을 980번지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인 황매산은 최후의 빨치산으로 유명한 ‘정순덕’의 활동 근거지이자 은신처였다, 그가 태어난 곳은 거창양민학살사건 등 억울한 희생들이 많이 발생했다. 슬프고 가슴 아픈 억울한 역사와 함께 태어났고 자라났다. 어쩌면 이러한 역사가 결국 정상시 목사를 한반도 역사의 한 복판으로 끌고 나온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던 해인 1961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그 시절을 기억할 때 떠오르는 것은 ‘5.16 혁명공약’이라고 말한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로 시작되는 군사 쿠데타 세력의 공약이었다. 그것을 어린아이들이 왜 외워야 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달달 외웠다. 외우지 못하면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초등학교 입학에서 시작된 반공주의, 국가주의 교육은 60~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교육 현장을 지배하는 교실 이데아 속에서 성장했다. 이처럼 보수적 지역 분위기에다가 지속적인 군사주의 반공 교육을 받고 자란 그가 어떻게 나중에 민주시민의식을 갖게 되고 심지어 민주화운동, 평화통일 운동, 나아가 민중 복음의 목회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신기하다. 최근 30년 이상을 목회한 교회에서 조기 은퇴하고 망중한(忙中閑), 그러나 제2 인생의 길을 힘차게 열고 있는 그를 만나보았다. 그의 삶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 목사님, 반갑습니다. 얼마 전에 목회에서 조기 은퇴를 하셨죠? 소감이 어떠신지요?

정상시(이하, 정): 네 반갑습니다. 네, 얼마 전 34년 목회했던 교회에서 공식으로 은퇴했습니다. 조금 일찍 은퇴를 했습니다. 은퇴 하니 참 좋습니다. 편하기도 하고 또 그동안 일에 집중하느라 돌아보지 못했던 나의 삶 자체를 돌아보게 되는 기쁨도 누리고 있습니다. 한결 여유로운 삶이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웃음)

▲ 교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평생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오셨잖아요. 안민 교회에서 34년 이상 목회를 하셨고 은퇴를 하셨지만 계속해서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시는데 교회에 대한 이야기들을 좀 나누고 싶습니다.

정: 네, 아주 좋습니다. 저의 삶을 돌아보면 한 마디로 말해서 교회 중심의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에 대한 이야기 하는 것 아주 좋아합니다.(웃음)

▲ 네, 그렇습니다. 사실은 저도 교회를 많이 비판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항상 교회를 사랑합니다. 교회, 어떻게 생각하면, 교회로 인해서 나라는 존재가 가능했잖습니까. 그래서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어떻게 교회를 잘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비판도 하곤 합니다.

정: 그렇습니다. 교회에 대하여 비판을 하지만 그러나 사랑을 가지고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결국 우리의 비판은 교회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듯이 세우려는 노력이 아니겠습니까.

▲ 그렇죠, 그런 뜻에서 안민교회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안민교회가 개척됐고 어떤 정신으로 안민교회 목회를 진행하셨는지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안민교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 또 배경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정: 제가 최근에 발간한 책에도 썼지만, 나는 목사가 되기 싫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님이 늘 새벽마다 하루도 안 빠지고 기도하셨습니다. 어머니의 기도, “우리 둘째 아들 목사 되게 해 주세요”라는 소리를 늘 듣고 자라났지요. 기도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라고 속으로 외쳤습니다.(웃음) 그런데 알지 못하는 힘에 끌려서 결국 목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저는 신학대학이 아닌 다른 대학에 응시를 했습니다. 내가 재학 중이었던 거창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좋았던 나는 부푼 꿈을 안고 서울대(인문계열)에 응시했는데 그만 실패했어요. 낙방의 충격이 커서 한 동안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당시 한국 사회는 유신 겨울 공화국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매우 슬픈 시절이었지요. 그러는 동안 민청학련사건이 터졌고 김재준 목사, 박형규 목사 등 종교인의 예언자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를 읽었고 더불어서 강원용 목사의 『5분간의 사색』이란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한 독서를 통하여 눈이 떠지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나의 반응은 “이런 목사님도 계시구나!”였습니다. 나는 그 분들의 지성과 사회적 영성에 감명을 받았고 또한 그분들이 한국신학대학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5년 한국신학대학(현 한신대)로 나의 발길을 돌렸고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기 위해 입학했던 것은 아니지요. 결국 목사가 되기는 했지만.(웃음)

▲ 목사님의 한신대 시절은 어떠했습니까? 열심히 공부하는 착실한 목회자 후보생은 아니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요.(웃음)

▲ 7-80년대 겨울공화국 지나 교회로 돌아간 정상시 목사. 그 이후 그는 교회를 사랑하는 목사가 되었다. ⓒ홍인식

정: 그렇게 어찌 보면 얼떨결에 신학생이 되었지요. 그런데 저는 그리 성실한 신학도가 아니었습니다. 학교생활과 신학 공부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쉽기도 하지요. 공부를 좀 열심히 더 했었다면 훌륭한 학자도 되었을 텐데. 제가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으니까요, 적어도 거창고등학교 시절까지는 말입니다.(웃음)

당시 신학 공부에 전념할 수 없었던 상황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유신 군사독재의 강포가 날로 더해 갔고 민중의 생존권 투쟁, 언론, 집회, 결사 자유 등 민주화를 향한 요구가 온 사회에서 들끓던 시절이었습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 김정준 목사, 문익환 목사, 안병무, 문동환 교수 등 예언자적 지성의 한시대가 유신 저항의 중심에 있었다. 권력은 한신대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내가 입학하던 그해 1975년, 문교부 휴업령이 내려졌고 교수와 학생들이 무더기로 해직과 제적을 당했습니다. 단순하게 그리고 조용하게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강의실에서 공부할 상황이 못 되었지요. 나는 우리 사회와 민족현실의 모순의 본질을 알고 싶은 열망이 컸고, 강의실 안에서의 신학이 아니라 강의실 밖의 신학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신학의 컨텍스트로서의 역사와 정치 경제, 사회도 알고 싶었습니다. 강의실 안에서의 공부를 뛰어넘어 역사의 현장에서 몸으로 신학 공부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 그러한 목사님의 시도가 결국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투옥 생활로 연결되기도 한 것이지요? 어떤 경위로 소위 잡혀가게 되었습니까?

정: 1977년 한신대 고난선언 사건에 연루되어서 투옥됩니다.(“한신대 고난 선언”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은 1977년 4월 7일에 한신대 채플 실에서 시작된 유신반대 시위 사건이다. 그 때 성명서 제목이 고난선언이다. 유신철폐와 긴급초지 9호 해제, 사회안전법과 국가보위를 위한 특별조치법의 철회를 요구했던 선언이다.) 그런데 당시 투옥 되면서 제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어떻게 감옥 생활을 할 수 있을까가 아니었습니다. 제일 걱정되는 것은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감방에 간 현실을 도무지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지요. 어머니의 평생 소원과 기도대로 아들이 목사 되기 위해서 신학대학을 갔는데 목사는 고사하고 감옥 가게 된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심지어 어머니는 교수들을 찾아가 따지기도 했습니다.(웃음)

그 일 이후에 어머님께서는 후일 조직 된 ‘구속자 가족협의회’에 자주 참여하시면서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사정을 잘 아시게 되면서 나중에는 보수적인 신앙의 어머님에서 종로 5가 기독교회관의 목요기도회 등에도 참여하는 데모꾼이 되셨지요.(웃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어머니의 구호는 늘 한결 같았습니다. “이놈들아 우리 아들 내놔라”였지요(웃음)

▲ 질문이 이상하게 들리지만 감옥생활은 괜찮았습니까?(웃음) 그리고 얼마 동안의 감옥생활을 하셨습니까?

정: 당시 저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잡혀갔습니다. 이 구속으로 소위 일반 대학에서는 제적되고 소위 법무부 대학에 입학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런대 흥미로운 것은 실제로 나는 일반 대학에서 보다 법무부 대학인 감옥에서 평소 못 읽었던 책도 읽고 밀린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빈대의 습격을 받으면서도 성경도 읽고 신학 관련 책은 물론 다양한 인문, 사회적 도서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독서와 공부는 후일 나의 목회와 사회적 실천을 위한 지적 기반을 쌓아준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감옥에서 지낸 기간은 첫 번째, 1977년 한신대 고난선언 사건으로 16개월, 그리고 다시 1980년 5월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계엄군의 학살 만행에 대한 고발과 항의 시위 일명 ‘한신대 피의 선언’ 사건으로 인한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22개월 옥살이를 했습니다. 피의 선언 사건은 류동운 학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신대 학생 중 ‘류동운’이 5·18 광중항쟁에서 마지막으로 도청 사수하다가 학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지금도 한신대에 가면 ‘류동운 열사비’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한테는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지만 군부 독재로 인해 몇 달 동안은 완전히 온 나라가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아무도 꼼짝 못하고 광주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나날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침묵의 세월이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신대 학생들이 그해 가을 10월 8일 한신대 운동장에 모여서 ‘고 류동운 추모 기도회’를 개최합니다. 우리는 그 사건을 ‘10+8=18사건’으로 부릅니다.(웃음) 10월8일 토요일에 한신대 학생  200여명이 거의 다 참여해서 기도회를 하면서 ‘류동운을 살려내라’고 외칩니다.

이 기도회는 당시 신군부에 대한 거의 학원가의 최초의 시위였습니다. 당시 선언문을 제가 썼는데 제목이 “피의 선언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한신대 피의 선언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고 ‘18 사건’으로 불리기도 합니다.(웃음) 그 선언문을 제가 작성하기는 했는데 사실 생각해 보면 선언문은 내가 썼지만 내가 쓴 글이 아니에요. 한 시간 두 시간도 채 안 되는데 그냥 쫙 쓴 거예요. 지금 봐도 명문입니다.(웃음)

재미있는 것은 나중에 잡혀서 취조를 당하는데 선언문이 너무 명문이라고 해서 취조관이 내가 쓴 글이 아니고 배후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명문이었습니다.(웃음) 그 선언문 때문에 정말 많이 맞았지요.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그 선언문은 성령의 영감으로 쓴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거의 4년 정도를 감옥에서 지내셨는데 출소 후에는 어떤 생활을 하셨습니까? 

정: 출소 후에 한신대 복학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신학대학을 10년 만에 늦깎이 졸업을 하였습니다. 목사 안수도 1988년에 받았지요. 학생운동과 투옥, 사회운동 등으로 동기생에 비해 조금은 늦어졌습니다. 출옥한 이후부터 고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출옥 이후에 한 동안 여러 가지 운동을 했습니다. YMCA, 농촌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대전Y’에서도 활동을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렇게 해서 농촌을 살리는 일에 대한 것도 모색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주제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교회로 돌아가자’라는 주제로 논쟁도 많이 했습니다. 제가 볼 때에는 이제 사회 운동도 굉장히 달라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교회로 가야 된다’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 목사는 그의 책에서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한신대 복학 이후 출소한 감옥 동문인 신학생들 중심으로 민중교회 운동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그 비전과 담론을 활발하게 나누었다. 그러던 중 나는 1985년, 동아리 같은 형태의 교회를 공동으로 개척했는데 ‘목마름교회’였다. 목마름이라는 주점을 빌려 주점을 운영하지 않는 주일 낮 시간만 빌려서 예배를 드렸다. 구성원은 주로 신촌 지역 대학생이었고 젊은 교수, 목사 등도 함께 했다. 짧지만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는 또 다시 어떤 기운에 이끌려 서서히 목회자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목마름교회’ 시절은 내가 사회운동에서 목회자의 길로 넘어가는 중간 기착지 같았다.(『평화동산 가는 길』, 19)

 

▲ 정상시 목사가 은퇴를 앞두고 회고록 성격의 『어느 운동권 목사의 평화 순례: 평화동산 가는 길』을 출간했다. ⓒ홍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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