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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몇 가지 주제들과 전망1970년대 진보교회 사회참여 ⑶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2.04.12 17:10
▲ 80년대 중반 노동조합을 대신하여 노동자 대중조직의 역할을 감당했던,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광주지역연맹이 무등교회(이철우 목사)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기장 생명선교연대

민중은 누구인가?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개념을 규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까닭은 개념화가 실체의 생동적인 파악을 오히려 제약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중은 자신의 역동적 운동 가운데서 자신을 발전시키고 그러기 때문에 민중은 민중운동에 참여함으로써만 파악되는 것이지 객관적 관찰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민중을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으로 억압받고, 경제적으로 착취받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집단으로 이해하였다.

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이런 태도는 인식론에서 주객도식을 극복하고 신학하는 사람의 역사참여를 설득력 있게 유도할 수는 있었으나, 민중이해의 비과학성과 거기에서 파생하는 변혁대안 제시의 한계 때문에 이른바 2세대 민중신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이들은 1세대 민중신학자들의 민중이해가 소외론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으며, 80년대의 변혁운동에 상응하지 못한다는 현실인식 때문에 맑스주의적 세계관 위에서 민중을 파악했다.

그러나 과학적 민중이해도 차세대 민중신학자들 사이에서 계급적 조건에 대한 판단을 중심으로 다시 분화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민중이 사회 경제적 관계로 환원되지 않는 또 다른 민중현실, 예를 들면 ‘민중 가운데 민중’인 여성의 문제는 민중을 보다 탄력적으로 이해할 것을 요청한다. 개념의 엄밀한 규정과 실체의 정확한 파악이 변혁운동을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하지만, 민중신학 본래의 입장, 곧 민중의 투쟁과 희망에 참여함으로써 민중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는 이론과 실천의 일치를 지향하는 한 민중신학의 변할 수 없는 전제로 남아있을 것이다.

민중역사주체론

민중신학은 민중을 ‘역사의 하부구조에서 고난 받고 소외당한 생산의 주체로서 역사의 담지자’라고 규정함으로써 역사 주체로서의 민중의 계급적 해석의 가능성을 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세대 민중신학자들은 민중의 역사 주체성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파악하기를 거부한다. 까닭은 ‘지배와 피지배’,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틀에서 파악된 역사 주체성이 흔히 두 계급간의 위상변화와 동일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용복은 ‘고난’에 민중의 역사주체성이 있다고 말한다. 민중의 고난을 통한 자기 초월과 그것의 대속적 성격에서 민중신학은 민중사건과 예수 사건, 하느님의 역사참여 사이의 연속성을 발견한다. 여기에 민중신학의 민중주체론이 신학적인 이유가 있다. 예수 사건에서 드러난 민중역사 주체론은 ‘선포’되고 ‘약속된’ 주체론이다.

선포된 주체성은 민중으로 하여금 역사구원의 담지자로서의 자의식을 일깨운다. 약속된 주체성은 민중에게 희망 속에서 투쟁하게 한다. 그러므로 민중신학이 이해하는 민중의 역사주체성은 진보사관에 기초하지 않고, 종말론적 희망 위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 종말론적으로 이해된 역사 주체성은 민중의 자기초월의 전거가 된다. 민중은 이미 자기 자신의 역사의 주체이다. 그것은 지배자가 지배의 역사의 주체인 것과 마찬가지다.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민중은 역사의 주체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메시야 희망과 민중 메시야니즘

민중신학은 하느님의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예수의 메시야성을 강조함으로써 엘리트적, 영웅적 메시야니즘, 곧 ‘정치적 메시야니즘’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모든 형태의 폭력에 기초한 억압적 권력을 폭로하고 상대화시킨다. 그러나 문제는 ‘민중 메시야니즘’과 그리스도교적 메시야 희망과의 관계를 설정하는데 있다.

‘민중 메시야니즘’은 메시야 희망의 담지자가 민중 자신이라고 본다. 메시야 역시 초월적 존재라기보다 민중 가운데서 육화한다. 민중의 자의식의 진보적인 성숙이 운동 가운데서 기대된다. 민중해방은 민중 자신의 힘에 의해 성취되며, ‘민중 메시야니즘’의 역사 이해는 ‘역사 내재적 진보이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민중 메시야니즘’이 그리스도교적 메시야 희망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이다.

메시야니즘이 약속하는 구원이 물질적이냐, 영적인 것이냐, 역사적인 것이냐 초월적인 것이냐는 중요한 구별이 아니다. 또 그리스도교 메시야 희망이 민중을 수동적으로 만들며 혁명적 열정을 약화시킨다는 ‘민중 메시야니즘’의 비판이나, ‘민중 메시야니즘’은 민중을 절대화 시킴으로써 자기초월의 근거를 상실할 위험이 있다는 그리스도교 메시야 희망의 비판도 중요한 지적이 아니다. ‘민중 메시야니즘’의 비판은 그리스도교적 메시야 희망이 그리스도인을 변혁을 위한 행동에로 인도하지 못하는 한 정당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메시야 희망은 ‘민중 메시야니즘’이 역사적 성취를 절대화하여 자기비판력을 상실할 때, 정당한 것이 된다. 이런 갈등은 민중신학이 변혁운동과 대결하는 한 언제든지 새롭게 제기될 문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운동으로서의 신학

1세대 민중신학의 전개는 ‘민중은 신학에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이런 질문과의 대결에서부터 성서와 교회사에 나타난 민중전통이 재조명되었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파악하게 되었으며, 민중의 현실변혁을 위한 자기초월적 행동에 메시야적 성격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차세대 민중신학은 ‘신학이 민중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신학의 대안적 현실변혁 가능성이 모색되었고, 맑스주의 세계관이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신학운동이 아니라 운동으로서의 신학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래서 운동의 기초인 대중, 혹은 교회대중에 대한 이해가 과학적으로 접근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운동으로서의 신학은 신학하는 자의 학문과 삶의 일치를 지향할 뿐만 아니라 신학이 곧 운동일 수 있어야 한다는 자기의무화를 의미한다. 까닭은 변혁의 대안모색이 구조적 변화와 인간의 삶의 태도의 변화가 상응할 때 실현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운동으로서의 신학인 민중신학은 신앙공동체의 실험적 모색을 요청한다. 특히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체제의 유일지배가 현실이 되는 오늘의 상황에서 평등과 경제정의를 지향하는 새로운 신앙공동체 운동은 민중신학의 새로운 과제로 남아있다.

민중신학에 대한 평가와 전망

민중신학이 생겨난지 이제 50년이 되어간다. 민중신학에 대한 평가는 그동안 민중신학 진영 안과 밖에서 있었다. 나는 민중신학을 그 안에서부터 평가하려고 한다. 그것은 민중신학에 대한 고증학이나 주석학적 접근이 아니다. 이른바 민중신학 1세대들이 무엇을 이렇게 말했다느니, 혹은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밝히거나, 그들의 이런 주장은 무슨 뜻인가를 밝히는 것에 나는 관심이 없다. 이런 작업은 이미 많이 있었고, 앞으로도 관심 있는 사람들에 의해 연구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민중신학이 스스로 설정한 두 가지 목적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민중과의 동일화에서의 실패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해방에서의 실패이다. 민중신학은 예수와 민중과의 관계, 곧 예수와 민중의 동일화를 재발견함으로써, 대단히 급진적인 신학적 사고를 전개했다. 제도적 교회에 대한 비판과 탈교회주의(교회의 민중성 회복), 강단신학에 대한 비판과 ‘방외의 신학’, ‘이야기 신학’의 전개(신학의 민중성 회복) 등이 거기에서 남은 것들이다.

교회의 민중성 회복은 민중교회의 탄생과 활동으로 어느 정도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오늘의 민중교회가 교회의 민중성을 얼마나 회복했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와 미래의 전망이 중요한 판단기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민중교회 위기론’은 - 교역자의 생활은 물론 최소한의 선교활동을 뒷받침할 수도 없는 열악한 재정난에서부터, 대교회 의존성, 민중해방이냐 민중복지선교냐 하는 방향설정에 대한 논의 등에 이르기까지 - 민중교회의 민중지향성이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되어야 할지 여전히 모색 중인 것처럼 보인다.(1)

‘교회의 민중성’ 실현에 대한 질문과 함께 우리는 ‘신학의 민중성’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도 물어야 한다. 신학의 현장인 민중교회 안으로부터 신학적 작업이 없다는 것이 가장 확실한 예증일 것이다. 또한 민중신학이 교실 안에서 훈고적 작업에 매달려 본래의 방외적 성격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도 다른 하나의 예증일 것이다.

신학의 민중성과 관련하여, 민중신학이 ‘증언의 신학’에 머물렀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것은 민중신학자들이 말만하고 참여는 안 했다는 비판이 아니다. 또 증언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고난을 민중신학자들이 겪지 않았다는 비판도 아니다.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이냐 아니냐는 논쟁도 한 때 있었지만, 민중신학자들은 스스로 민중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이 비판을 비켜갈 수 있었다.

민중이 아니라고 민중신학을 할 수 없나? 민중은 누구인가? 하는 해묵은 질문을 다시 제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론 유감스럽게도 민중은 신학자가 아니고, 신학자는 민중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신학이든, 누구의 신학이든 신학의 위기는 언제나 ‘정체성의 위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든가! 민중신학을 민중신학답게 하는 것은 신학의 민중성, 신학하는 사람의 민중성, 아니 최소한 민중지향성이 아닐까! 신학과 신학하는 사람의 민중성을 담보하는 것은 ‘실천’일 것이다. 민중신학의 위기는 우리 시대의 ‘민중신학적 실천’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중신학의 두 번째 실패는 첫 번째 실패와 무관하지 않은데, ‘민중이 신학에게 가지는 의미의 재발견’에서 비롯된 ‘민중신학이 민중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또 있는지’를 지금까지 민중신학이 진지하게 검토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민중신학이 민중해방과 관련하여 무엇을 남겼나 하는 문제의 제기가 그것이다. 신학이 역사 변혁에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민중이 민중신학으로부터 민중해방을 위해 무엇을 배웠는지, 민중 자신의 증언이 무엇인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1970년대 민중신학이 추구한 인권회복, 민주화 등은 상대적으로 실현되었다. 이런 역사의 상대적 성취를 근거로 민중신학 용도폐기론을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거기에 대해 민중을 폭넓게 규정함으로써 민중은 언제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민중신학은 여전히 필요하다는 용도유지론을 주장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민중신학의 미래와 관련하여 중요하게 보이는 것은 오늘의 민중신학이 지향하는 민중해방의 방향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오늘 민중신학이 지향해야 할 민중해방은 권력(정치적, 경제적, 교권적, 가부장적 권력 등 일체의 상하적 인간관계를 뒷받침하는 권력)과의 관계에서 철저히 ‘탈권위주의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특정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구체적인 정치적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민중의 힘이 정치적 성취를 가져온 역사적 경험도 중요하다. 또 정치권력이 현실변혁을 위한 최선의 길은 아닐지 몰라도 효과적인 길이라고 생각해서 많은 운동권 인사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정치에 참여했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신학의 해방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서도 ‘권력에 대한 거리와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민중신학이 민중해방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해방된 민중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해방된 민중적 삶, - 민중신학은 민중의 자기초월이라고 말한다 - 그것은 곧 자유의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민중의 자기초월은 이웃, 혹은 역사를 위한 자기희생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 뒤에 숨어있을 수 있는 위선과 소영웅주의마저 극복되어야 한다. 민중신학은 권력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민중 자신으로부터도 거리와 긴장을 유지해야 한다. 긴장의 유지는 신학자를 깨어있게 하고, 신학의 자유를 확보한다. 민중신학의 미래는 민중신학자들이 얼마만큼 권력과 지배, 자신의 욕망으로부터 자유한가에 달려 있으며, 역사적 성취에 대한 신학의 비판적 자유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의 민주화와 시민계급의 등장을 이유로 민중신학 폐기론이 주장된 적이 있었다. 오늘의 한국 사회를 보는 시각의 문제에 대한 논란(정말 우리 사회가 시민사회로 진입했는지, 중산층이 두터워지면서 자동적으로 민주화되고 민중운동은 소멸하는지 등)과 배타적 민중운동론에 대한 시비(민중연대가 시민연대를 배타적으로 거부하는지 등)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민중신학은 여전히 고난 받는 민중에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중신학이 처음부터 자신의 과제로 설정한 분단현실의 평화적 극복과 참여민주주의의 실현, 인권의 신장은 아직도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다. 특히 민중 가운데 민중인 여성의 신학적 성찰과 해방운동과의 대화는 더 진전되어야 한다. 종교신학, 생명의 신학과의 대화 역시 민중신학을 더 풍성하게 할 것으로 전망한다. 지금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시대적 도전은 경제정의의 문제이다.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함께 현실이 된 경제세계화는 부와 빈곤의 문제를 다시 신학적 성찰의 중심에 세운다. 빈곤은 이제 한국 민중만의 문제가 아니다. 민중신학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세계의 민중과 함께 정의로운 경제질서를 모색하는 투쟁과 연대에 참여해야 한다. 특히 대규모로 이동하는 외국인 노동자들, 환경재난에 노출된 가난한 사람들, 세계화와 정보화 시대에 소외된 사람들의 고난을 증언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신학적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미주

(미주 1) 한국기독교장로회 민중교회운동연합(편), 『바닥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민중선교의 현장』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2) 참고.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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