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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앙의 방어선이 뚫렸다내가 주님을 믿기도 전에(요 8:54-58)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2.05.15 23:52
▲ 자신 스스로가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지키고 있던 신앙의 방어선이 뚫릴 때, 신앙은 시작된다. ⓒGetty Image

1.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유대 사람들이 논쟁을 벌입니다. 논쟁이 얼마나 치열해 졌는지, 유대 사람들이 약이 오르고 화가 나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얼른 도망치십니다. 예수님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신 걸까요?

지금까지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돌이켜 봅시다. 밤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몰래 예수님을 찾아왔던 이야기, 사마리아 수가 성 우물가에서 한 여인을 만났던 이야기,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이나 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이정도 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을 꿰뚫고 있는 한 가지의 주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과 진리입니다. 영생과 진리.

사람들은 영원히 사는 것을 원합니다. 하지만 영생이라는 것은 늙어 죽지 않고 천년만년 계속 살고 싶다고 하는 허황된 욕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대로 살아보고 싶다는 거죠. 세상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어쩔 수 없이 사는 그런 삶 말고, 내 뜻대로 내 소원대로 사는 삶, 한 발 더 나아가서 내 뜻과 내 의지 내 소원을 넘어서, 진짜 뜻 진짜 의지 진짜 소원을 배워서 진짜로 행복한 삶, 진실된 삶, 진리의 삶, 그 삶을 살아보고 싶은 겁니다.

그런 소원을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도 있고, ‘내 마음 속에 있는 소원이 그거였구나’ 하는 것도 모른채 그냥 무언가 답답한 채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영생을 얻어라. 영생을 누려라. 그런데 영생을 누리려면 진리를 알아야 한다. 진리를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대로 살아야 한다. 그 진리가 뭐냐? 하나님 말씀이다. 그 진리를 가르치고 그 진리를 살아내는 것이 바로 나다. 나를 보고 본받아라.”

한 마디로 하면 ‘진리가 나다’ 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영생을 원하느냐? 진리를 원하느냐? 하나님의 뜻이 진리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영생이다. 내가 그렇게 산다.’ 이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되면 그게 참 구원이지요.

영생과 진리를 원하는 사람들, 그리고 영생과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 이 얼마나 절묘한 조합입니까? 뭔가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가 일어나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이 대박날 것 같지요?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실패하고 오해받고 쫓겨 다닙니다. 사람들은 통 예수님 말씀을 들어먹지 않습니다.

2.

요한복음뿐만 아니라 모든 복음서를 통틀어 똑같습니다. 구원받는 사람, 그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순종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순종하십니까? 무엇에 순종합니까? 목사가 하는 말에 순종합니까? 아니요. 아무리 목사가 하는 말이라도 무턱대고 순종하면 안 됩니다. 아니다 싶으면, 의심이 들면, 다른 생각이 떠오르면, 진짜 그 말이 옳은지 아닌지, 이 계획이 좋은지 나쁜지 함께 고민하고 따지고 철저히 살펴야 합니다.

순종은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 주님께만 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하는 순종이란 아무 생각 없이 로보트처럼 따라하는 그런 복종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의지, 이성과 지성, 소망과 소원, 가치관과 윤리 판단, 기호와 취미… 이런 모든 것들을 버려 버리고, 멍하니 악셀 밟으면 가고 브레이크 밟으면 서는 그런 기계처럼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순종하는 자는 자기 의지를 철저하게 굳건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성과 지성을 날카롭게 벼려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제대로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 가치관을 올곧게 세워야 하고 윤리적으로도 한점 흠이 없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개인적인 기호와 취미마저도 주위를 살피고 이웃을 돌아보며 세심하게 선택하고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렇게 철저한 자기 주관과 자기 확신과 삶에의 실천이,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교리처럼 고착화 되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내 삶의 율법처럼 나를 옭아매는 틀이 되어 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사야 55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빌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너희의 길은 나의 길과 다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사55:8-9).”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철저한 주관과 확신, 생활의 실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을 이루어 놓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높이, 하나님의 깊이, 하나님의 넓이를 바라보는 토대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기준점이 제대로 세워져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차원이 인간 수준으로 평가절하 되고 맙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은혜가 누구라도 줄 수 있는 싸구려 은혜로 전락하고 맙니다. 내 맘에 안 들면 다른 교회 찾아가고, 교회에 갔더니 내 소원대로 안 된다, 그러면 절간 찾아가고 그래도 안 되면 미아리 점집도 찾아가고, 하는 그런 식의 은혜가 되고 맙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인간이 계획하고 실행하고 성취하고 하는 그런 똑같은 수준의 것으로 생각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길과 완전히 다른 길, 인간이 생각해 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길, 그 길을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차원에 대해서 놀라고 감탄하고 경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보여주는 새로운 차원을 기대하고 소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기꺼이 하나님의 은혜의 길로 들어서는 겁니다. 그게 순종입니다.

나의 최선의 것을 들고 와서, 하나님 앞에서 무참하게 깨지는, 그렇게 깨질 것을 알고서 또 최선의 것을 준비해 오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올바른 신앙의 과정입니다. 그 길을 통해서 우리의 최선이 하나님의 차원으로 조금씩 가까워져 갈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이라고 우리는 기대하고 확신할 수 있는 겁니다.

이런 이해가 없고, 이런 경험이 없으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무슨 디즈니 동화 속에 나오는 환상적인 세상 같은 것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현실감이 없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떠나서 존재하는, 그래서 한편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은, 완전히 딴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할 일도 없고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고 그저 놀이공원 놀러 온 것처럼 우와 하면서 눈요기나 하는 그런 대상이 될 뿐이죠.

3.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들, 유대 사람들,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생을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들여다보니까 정반대의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철저한 주관과 확신, 생활의 실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선의 모습, 그것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인간의 최선에도 불구하고 감히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높이, 하나님의 깊이, 하나님의 넓이를 절감하고 그 앞에 순종하는, 그 순종이 새로운 삶으로 인도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철저한 자기 주관과 자기 확신과 삶에의 실천이, 오히려 하나님마저 넘어서서 하나님의 계시와 은총까지도 옭아매는 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답답한 나머지 예수님은 극약처방을 내리는 겁니다. “당신네들이 끔찍이도 존경하는 아브라함, 바로 그 아브라함이 열심히 한 일, 그것이 바로 내 말대로 산 일이야. 내 말을 지킨 거야. 아브라함이 진리를 그렇게도 간절히 소망했는데, 나를 보고서 ‘우와, 이제야 진짜 진리를 보았다’ 하고는 기뻐한 거야.”

나이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사실은 아브라함 시대에도 있었다’ 하는 말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상징적인 틀,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권위, 유대인들의 종교와 영성의 핵심을 공격하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 누구 앞에서도 꿀릴 것 없이 대단하고 그럴듯한 모습으로 완벽하게 무장하고 살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무참히 깨지는 것, 하나님 앞에서 무력하게 되는 것, 하나님 앞에서 내 권리, 내 정당함, 내 의로움 이런 것들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영생으로 가는 길이요, 진리를 깨닫는 길인데, 하나님 앞에서도 오히려 깨지지 않으려 하고, 주먹을 꽉 쥔 채로 이기려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래 좋다. 그렇게 강하고 완전해지는 것 바람직하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강함이 깨져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하나님 앞에서도 하나님까지도 이기려고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신성모독이다.”

이런 대비와 긴장은 계속 이어집니다. 다음 주에는 나면서부터 눈 먼 사람을 고치는 기적 이야기를 나눌 텐데요, 그 이야기에서도 중심 되는 것은 눈 멀었다는 사실을 비유로 확장시켜서 ‘당신들은 눈은 떴지만 진짜 진리를 못 본다’ 하는 겁니다.

“당신들은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다고 스스로 확신하고 있는데, 바로 그 확신이 문제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알지만, 그 지식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면, 사실은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는 그런 고백이 있어야 하는데, 주님 앞에서도 ‘나는 다 안다’ 하고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있다. 당신들의 문제가 그것이다. 그 문제가 구원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유대인들, 금과옥조처럼 받들던 자기들의 진리를 무참하게 깨뜨려버리려는 예수 앞에서, 부끄러움으로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4.

바로 여기에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이 있습니다. 진짜 신앙은 나를 뚫고 들어오는 진리의 공격 앞에서 눈물 흘리며 무너집니다. 그러나 가짜 신앙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 진리를 막아서고 오히려 더 강하게 진리를 공격합니다.

진리 앞에서 무너지는 것은, 내가 나약하고 내가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복종하고 순종하기 때문에 무너지는 겁니다. 기꺼이 무너지는 겁니다.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항복하는 겁니다. 

기꺼이 항복하게 하는 힘이 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 항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를 향한 은혜의 손길이, 나의 능력을 온전히 넘어선 거대한 능력이 나를 감싸고 있음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거대한 능력이 나와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내 편이 되고, 나를 감싸주고, 나를 품어주고, 나를 편안케 하고, 나를 보호하고,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나를 왜 사랑하십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요? 아니요. 그럴리가요. 하나님을 향한 내 사랑을 솔직하게 평가해 보세요. 얼마나 보잘 것 없습니까? 주님을 만났던 날들을 떠올려 보세요. 주님께 매달렸던 기도들을 떠올려 보세요. 주님께서 내게 베푸셨던 온갖 은혜들을 떠올려 보세요. 그 은혜를 받아 누리고서도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번 보세요. 주님의 사랑이 주님을 향한 내 사랑 때문이라면, 나를 사랑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정죄하시고 혼내시고 벌주셔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압니다. 느낍니다. 내가 주님을 믿기도 전에, 내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확정지어 놓으신 사랑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무슨 신학에서 말하는 예정론 어쩌구 하는 어려운 교리가 아닙니다.

이런 나를 사랑하시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런 나를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보통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믿기도 전에, 내가 주님을 알기도 전에, 나라는 존재가 생겨나기도 전에, 주님은 이미 나를 향한 사랑을 확정하시고, 내가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를 사랑하실 마음에 준비를 하시고 각오를 하시고 마침내 그렇게 나를 사랑하고 계신 겁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네가 나를 알기도 전에,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존재하기도 전에, 나는 너를 위한 진리가 되어 이렇게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를 사랑하기 위해, 너를 구원하기 위해, 너와 함께 행복하기 위해.” 이 음성 듣고서 엎드려져 항복하고 그저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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