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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함의 절규가 이겼다예수님, 이방여인과 논쟁에서 지다(마가복음 7:24~30)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2.10.11 23:02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보여주는 본문말씀은 여러 가지 점에서 인상적인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15:21~28)에도 정황과 인물 묘사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거의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이 이야기는 믿음의 모범을 보여주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여인의 이름은 유스타로 알려졌고, 그 딸은 베르니케라고 전해집니다. 이 여인은 신뢰에 있어서 ‘신앙의 모범’이요, 끈기에 있어서는 ‘인내의 모범’이며, 예수님의 냉정한 말에 대한 그의 대답에 있어서는 ‘겸손의 모범’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울러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주님께 매달렸다는 점에서 또한 ‘기도의 모범’으로 받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받아들여도 충분히 감동적인 이야기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이야기의 파격적 성격과 그 의미를 제대로 새길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처한 비극적 현실 때문에 자신의 운명은 물론 기존의 통념과 질서를 완전히 바꾼 주인공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적 지평을 바꿔놓은 결정적 계기를 전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지역이었던 두로 지역에 가서 은밀히 한 집에 묵고 계셨습니다. 그 때 한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신일 수도 있고, 시로페니키아 사람으로서 그리스적 교양을 갖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나타낼 뿐 아니라 당대의 주류 문명 안에서 그것을 향유하고 있는 계층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는 아주 절박한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자기 딸에게 악한 귀신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질병일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질병이 악령으로부터 비롯된다는 당대의 통념에 비추어볼 때 다른 어떤 심각한 질병일 수도 있습니다. 여인은 딸의 그 병을 고쳐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이어지는 대화 장면은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렇게 간청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오늘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막말을 하십니다. ‘내 자식 먹이는 것이 급하지 개 밥 주는 일은 급하지 않다.’ 이 무슨 험한 말입니까? ‘자식’은 유대인을, ‘개’는 이방인을 뜻합니다.

이 말은 당대 유대인의 통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선민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안에 있고 이방인은 그렇지 않다는 통념입니다. 예수님의 이 반응은 당대의 유대인의 통념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문학적 수사일 수도 있고, 실제로 한 사람 유대인으로서 통념에 매인 예수님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 긴장감 넘치는 대화의 국면을 조금 더 확대하고 있습니다. 큰 소리로 도와달라고 절박하게 호소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을 찾는 것이 급하다’고 응수하고, 그래도 간청하는 여인에게 자식에게 먹일 빵을 개에게 주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논쟁적 공박이 그렇게 펼쳐집니다. 기대를 안고 자식의 질병 때문에 절박하게 호소해야 했던 이 여인은 벽에 부딪히며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아픔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막말로 수모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개도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법입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여인의 간절한 호소에 예수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여인과 논쟁하지 않습니다. 순순히 여인의 뜻에 공감을 표합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마태복음은 그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이는 마치 로마의 백인대장을 두고 예수님께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10)고 했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 말씀 후 여인이 집에 돌아와 보니 아이는 침대에 누워 있고 귀신은 나가고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자신이 처한 비극적 현실 때문에 자신의 운명은 물론 기존의 통념과 질서를 완전히 바꾼 사건이자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적 지평을 바꿔놓은 결정적 사건이 되는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교훈 그대로 신실하고 집요하고 인내심 있고 겸손합니다. 끝까지 좌절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태도 때문에 이제껏 굳게 닫혀 있던 구원의 문이 열리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건의 밑바탕에는 한 가지 결정적인 사태가 있습니다. 귀신들린 자식의 괴로움입니다.

▲ Jean Germain Drouais, 「The Woman of Canaan at the Feet of Christ」 (1784) ⓒWikimediaCommons

자식이 괴로워하는 것을 자신의 괴로움보다 더 깊게 느끼는 것이 모든 부모의 심정입니다. 자식이 괴로워하는 것보다 자신이 괴로운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자신이 대신 겪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 만큼 부모들에게는 자식의 괴로움보다 큰 일이 없습니다. 자식이 잘못되고, 괴로워하고, 목숨을 잃는 것만큼 큰 슬픔, 큰 고통이 없습니다.

피에타 상, 곧 처참하게 죽은 아들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은 그 극한의 슬픔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위대한 어머니로 영원히 추앙받는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구세주를 낳은 몸이어서 위대하다기보다는 그 절대적인 고통과 슬픔을 안았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과 슬픔을 안은 어머니이기에 사람들의 아픈 마음, 슬픈 마음을 다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이야기의 주인공이 지닌 믿음의 밑바탕입니다. 그 아픈 절규가 믿음의 기적, 곧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 여인의 신실함, 인내심과 집요함, 겸손함과 불굴의 정신은 자신이 안고 있는 슬픔 곧 자식의 괴로움에서 비롯됩니다. 그 슬픔을 얼버무리지 않고 정곡으로 체험하고 있었기에 그 어떤 장애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극적 현실을 이겨낼 길을 찾은 것입니다. 자신의 사회적 신분이나 문화적 교양에 매이지 않고 자신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절박하게 호소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놀랍게도 자신이 절박하게 바랐던 소망을 이루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딸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이방인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개 같은 이방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 안에 있는 동등한 주체로서 거듭나 식탁의 한 자리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린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던 경계의 장벽이 무너진 것을 뜻합니다. 배제되는 소수자를 만드는 모든 장벽이 무너진 것을 뜻합니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사건은 보편적인 구원의 사건, 해방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일찍이 민중신학자 서남동은 바로 이러한 사건 가운데서 ‘고난 받는 민중의 메시아성’ 또는 ‘한의 속량적 성격’을 주목하였습니다. 고난 받는 민중의 한 맺힌 절규가 스스로를 구원할 뿐 아니라 세상을 구원으로 이끈다는 통찰입니다. 절망적인 현실 가운데서 좌절하고 체념하거나 아니면 개인적 원망과 원한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 불행의 악순환을 극복할 길은 묘연해집니다.

반면에 고통의 절규를 외치는 것은 삶의 의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절박하게 호소하고 외칠 때 한은 놀랍게 승화됩니다. 예술적으로 승화되기도 하며, 사회변혁의 힘으로 승화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아픔에 공감하고 호응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공감하면 함께 살아가는 지혜와 해법이 찾아집니다. 거기에서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을 두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주목하여야 합니다. 특히 마태복음의 표현을 환기합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당신 믿음이 참으로 큽니다. 그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만 등장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숱한 기적 이야기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했다.’ 내가 너를 구했다는 말보다는 너의 믿음이 스스로를 구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선포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태도를 다시 환기해야 할 것입니다. 이방여인과의 팽팽한 논쟁은 예수님께서 여인의 호소에 공감하는 것으로 종결됩니다. 좀처럼 논쟁에서 지는 법이 없는 예수님이 이 여인과의 논쟁에서는 깨끗하게 당신의 처음 주장을 철회하고 승복합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님께서 논쟁에서 패하여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을까요?

율법주의적 정통성을 잃었지만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의 삶을 얻었습니다. 사랑을 이뤘고 구원을 이뤘습니다. 무엇보다 우선하는 삶 그 자체, 생명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으로 이뤄낸 놀라운 사건입니다. 고통을 겪는 딸을 둔 어머니의 절박한 호소와 그 호소에 공감한 예수님께서 함께 이룬 놀라운 사건입니다. 예수님께는 논쟁에서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간절한 삶에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쏟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 밑바탕은 한결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의 요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느냐, 죽느냐? 아니, 살리느냐, 죽이느냐?’ 그 갈림길에서 살리는 길을 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요체입니다.

도대체 어쩌자고 그 누군가를 정죄하고 혐오하여 고통을 가중시키는 논리가 복음으로 정당화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습니까? 도대체 어쩌자고 차별과 혐오의 장벽을 넘어서고자 하는 세상 많은 사람들의 상식에도 못 미치고 오히려 그것을 거스르는 몰상식이 신앙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서 버젓이 선포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없는 까닭입니다. 자기의 욕망과 아집, 그리고 그것을 보호해주는 체제에 내맡겨 사는 삶에 안주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그 껍데기를 벗겨내고 진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신실하게 따르는 교회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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