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Sermonday
새로운 세상의 창조, 여호와를 찾고 선을 행하며 굶주림이 없는 세상(스 6:19-22 요삼 1:5-12 마 14:13-21)창조절 열한째 주일(11월13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2.11.11 00:09

1. 세 가지 필리아(우정)

▲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성, 이어령 교수

올해 2월에 소천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성이 있습니다. 초대 문화부 장관이 故 이어령 교수입니다. 한 청년이 생전에 이어령 교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평생에 걸쳐 깨달은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이어령 교수는 사랑의 본질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뜻하는 ‘아가페’적 사랑이 아니라, ‘필리아’를 이야기합니다. 우리말로는 ‘우정’으로 번역됩니다. ‘철학’으로 번역되는 ‘지혜사랑(philosophy)’의 그 필로스(philos)입니다. 그런데 이어령 교수는 이 필리아를 세 가지로 확장합니다. 바이오필리아(Biophilia), 토포필리아(Topophilia), 네오필리아(Neophilia)가 그것입니다.

먼저 바이오필리아는 ‘생명 간 공생하고자 하는 의지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어령 교수에 의하면 우리는 코로나19 시대를 거치면서 바이오필리아를 상실했다고 합니다. 탐욕스러운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태환경과 모든 피조물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고, 인간의 이익을 위해 착취하며 정복하였습니다. 따라서 다시 바이오필리아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 <시민케인> 포스터와 어린 시절 게인과 눈썰매 로즈버드

두 번째로 토포필리아는 ‘특별한 장소(Topos)에 대한 사랑’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이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화사 최고의 영화인 오슨 웰스 감독의 <시민 케인(Citizen Kane, 1941>의 핵심 키워드인 로즈버드(rosebud)로도 잘 나타납니다. 이 영화의 처음 시작 부분에 침대에 누워있는 미국 최고의 갑부이자 언론사 사장인 케인이 죽으면서 “로즈버드”라고 말하고 죽습니다. 따라서 영화는 케인이 말한 로즈버드가 무엇인지 찾는 영화입니다. 결국 로즈버드는 케인이 어린 시절 고향에서 갖고 놀던 눈썰매 상표 이름이었습니다. 이것은 케인이 죽으면서 고향을 그리워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영화도 그렇지만, 성경의 핵심 메시지도 ‘고향 찾기’입니다. <출애굽기>가 그렇죠? 사실 모든 고전의 핵심도 ‘고향 찾기’입니다. 서양 최고의 서사시인 『오디세이』가 그렇습니다. 동양권에서는 ‘요순시대’로 돌아가기를 꿈꿉니다. 고향이라는 특별한 장소는 영원한 우리의 사랑의 대상인 것입니다.

세 번째로 네오필리아는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영역을 탐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역에는 메타버스나 인공지능 분야가 해당이 되겠죠? 이어령 교수는 이렇게 ‘아가페 사랑’에서 ‘필리아 사랑’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2. 네 번째 필리아, 사피엔스필리아!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a)?” 이때 우리 말 ‘사랑’은 헬라어로는 ‘아가페’입니다(ἀγαπᾷς με).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요 21:15b).” 곧 필리아의 사랑(φιλῶ σε)으로 답했습니다. 그것도 2번씩이나! 그러자 예수님께서 세 번째는 필리아의 사랑으로(φιλεῖς με)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침내 베드로에게 ‘순종’하신 걸까요? 아무튼 예수님은 인간에게 가능한 것은 필리아의 사랑이고, 이 필리아의 사랑이 기본이 되어야 아가페의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으셨던 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어령 교수의 세 가지 필리아에 저는 하나 더 추가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피엔스필리아(Sapiencephilia)’입니다. 우리 말로는 ‘인간애’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이것은 이성은 물론, 동성 간에도 필요한 우정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이러한 인간 사랑에서 모든 사랑이 나오게 됩니다.

따라서 ‘인종차별’, ‘성차별’을 넘어 ‘종차별’을 극복하고 바이오필리아, 토포필리아, 네오필리아로 가기 위한 가장 기본은 바로 사피엔스필리아입니다. 옆에 있는 친구를, 인간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사랑의 사도 요한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따라서 새로운 세상의 창조는 ‘사피엔스 필리아’에서 옵니다.

오는 세 본문 말씀은 새로운 세상의 창조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세상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 가능합니다. 그리고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는 세상입니다. 마지막으로 굶주림이 없는 세상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와 어린이, 그리고 많은 남자가 먹어도 열두 바구니나 남는 세상입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

▲ 성전재건과 유월절 지키기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스 6:19-22)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봉헌한 후, 유월절을 지킨 내용입니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의 방해 공작으로 약 16년간 성전재건 공사가 중단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은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학개와 스가랴를 등장시켜 성전을 다시 건설하도록 합니다(스 5:1).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일어나 성전재건을 주도합니다(스 5:2). 마침내 다리오 왕 6년 아달월(12번째 달로, 2월 중순에서 3월 중순까지)에 성전재건을 완공하고 봉헌하게 됩니다. 오늘 구약 말씀은 성전 봉헌 이후, 유다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킨 말씀입니다.

이때 유다 백성들은 몸을 정결하게 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즐거움으로 먹고 마셨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의 창조 첫 번째는 여호와를 찾고 먹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성전재건을 통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집이 바로 서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즐거움으로 먹고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새로운 세상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서신서 말씀을 볼까요?

4.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은 신실한 일이니, 그들이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언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으리로다.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일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라.”(요삼 1:5-8)

▲ 가이오와 디오드레베

사도 요한의 편지 가운데 요한일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관해 언급하고 있고, 요한이서는 거짓 교사들과의 교제를 금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삼서는 성도들 간의 교제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사역자인 사도 요한이 자신이 파송했던 순회전도자들의 보고를 받습니다. 그리고 가이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요한은 가이오에 대한 사랑을 표합니다. 그리고 가이오가 그의 교회를 방문한 전도자들을 따뜻하게 환대한 데 대하여 기쁨을 나타냅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피엔스 필리아입니다. 가이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전도자들을 도움으로 진리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사람이 가이오 같지는 않았습니다. 사피엔스포비아(Sapiencephobia), 곧 ‘사람 공포증’이 있어 사람을 혐오하는 이들이 있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9-11)

사실 순회전도자들은 이방인 선교사들인데, 그들은 이방인으로부터 생계 지원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순회전도자들에 의해 개척된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이들을 당연히 지원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가이오는 이들 파송된 순회전도자들을 잘 대접하였으나, 디오드레베는 가이오와 달리 이들을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 안에 거하지 않았고, 교만하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디오드레베는 요한이 자신의 교회에 보내온 편지를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권위가 사도의 권위로 인해 약화 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또한 디오드레베는 요한이 그릇된 말을 한다고 비난하고 전도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도 접대를 금하고 자기 명령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서 추방했습니다. 따라서 요한은 가이오가 디오드레베같지 않게 지속해서 사랑을 베풀라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데메드리오를 추천합니다.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언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언이 참된 줄을 아느니라(요삼 1:12).” 아마도 데메드리오는 이 편지를 전달한 인물일 것입니다. 요한이 파송한 선교사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이 데메드리오도 가이오가 잘 영접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세상의 창조는 사피엔스필리아, 곧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고 대접하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5.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세 번째로 새로운 세상의 창조는 굶주림이 없는 세상입니다. 구약 말씀과 서신서 말씀 모두 다 먹는 것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무교절과 유월절을 지키며 유다 백성들이 즐겁게 먹었습니다. 가이오가 순회전도자들을 잘 대접하였습니다. 그만큼 먹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 람베르트 롬바르드 <빵과 물고기의 기적>(1505~66)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따라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이곳은 빈 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이 이르되,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마 14:13-17)

사람들이 배고프니 뭔가를 먹어야 하는데, 제자들이 가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볼까요?

“이르시되,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 무리를 명하여 잔디 위에 앉히시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마 14:18-21)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후,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고, 제자들이 다시 무리에게 나눠주니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었습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새로운 세상의 창조는 굶주림이 없는 세상입니다. 비록 가지고 있는 것이 많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누어 먹으면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는다는 놀라운 기적 사건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세상이 창조됩니다.

5. 로마 황제의 급식과 예수의 오병이어

▲ 토마 쿠튀르 <타락한 로마인들>(1847)

오병이어 기적 사건을 조금 더 살펴볼까요?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을 로마 황제의 급식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로마 황제는 전쟁에서 이기거나, 무슨 축제가 있으면 시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줍니다. 가령 검투사 시합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검투사 시합이 개최되면 원형경기장을 찾은 로마 시민들에게 황제는 짜릿한 볼거리와 더불어 공짜로 빵을 나누어 줍니다. 토마 쿠튀르(1815~1879)의 작품 <타락한 로마인들>(1847)을 보면, ‘빵과 서커스’의 포퓰리즘 정책으로 쇠락해 가는 로마를 화폭에 담았는데, 이러한 로마의 유흥과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먹이신 것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결국 황제가 먹여주고 입혀주는 것은 결코 배부르지 않고 영혼을 좀 먹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먹여주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 로마 황제가 먹여주고 입혀주는 구세주, 곧 그리스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진정한 그리스도라는 선언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구세주일 뿐만 아니라, 육적인 급식에서도 그렇다는 놀라운 말씀입니다.

조금 더 살펴볼까요? 오병이어의 기적을 ‘성찬의 원형(Eucharistic motive)’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가령 ‘떡을 가지사’, ‘축하하시고’, ‘나누시매’ 등의 표현은 성찬 예식의 표현입니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 사건을 『요한복음 강해』(통나무, 2007)에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과 오병이어 야단 공동식사

“아마도 초대 교회 성찬 예식의 가장 원초적 형태의 현장을 그렸을 것이다. 그것은 야단법석이었고, 야단 공동식사였다. 빵과 포도주가 아닌, 떡과 물고기의 식사였다. 거기에는 남녀노소 일체의 계급의 구분이 없었고,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나누어 갖는 생명의 장만 있었을 뿐이다. 예수는 이어오병을 ‘들고, 감사하고, 나누어, 주었다’ 예수는 당대 가장 비천한 여인이 해야 할 일을 손수 직접 행한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이것을 ‘예수의 혁명’으로 이야기합니다. 곧 예수의 혁명은 나누어 먹는 혁명이며 예수의 혁명은 총칼을 들고 싸우는 ‘서서 하는 혁명’이 아니라, ‘앉아서 생각해보자!’, ‘앉아서 같이 먹자!’라는 ‘앉아서 하는 혁명’이라고 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새로운 세상은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사피엔스필리아를 통해 선을 행하며 마침내 굶주림이 없는 세상, 앉아서 같이 먹는 세상입니다. 그런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