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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서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하나님의 신실함을 따르는 믿음(로마서 1:13~17)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1.25 02:24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의 그리스도인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크게 보면 고대의 서간문 장르에 해당하지만, 로마서는 인사말과 더불어 서두에서부터 신학적 논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파격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공동체에 편지를 보내면서 신학적 논제를 제기한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로마서가 단순히 사도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거나 자신의 관심사를 알리려는 목적을 지닌 것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교지 내 교회 안팎의 여러 경쟁자들 및 적대자들과의 논쟁적 상황을 유념하는 가운데 자신의 논지를 펼치고 있습니다. 로마서가 일반적 서신의 격식을 벗어나 장황하면서도 격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앞의 인사말 가운데서 여러 신학적 논제들을 제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의 바울(1:1), 복음이신 그리스도(1:2~4), 그리스도의 사람과 그리스도의 평화(1:5~7), 복음의 전파에 대한 감사(1:8), 신앙의 연대성(1:9~13) 등, 또한 그 안에 함축된 여러 신학적 주제들을 서신 처음부터 묵직하게 제기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사도 바울이 로마를 꼭 방문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밝히며(1:13~15), 그 목적으로서 복음의 요체를 집약하고 있습니다(1:16~17).

이미 앞에서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제기하였지만, 이 대목에 이르러 바울은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분명히 합니다. 땅 끝, 곧 스페인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바울은 당시 지중해 세계의 중요한 거점으로서 로마를 방문하고자 하는 뜻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정 때문에 방문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방문하고자 하는 뜻을 밝힙니다. 이미 자신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의 열매를 거둔 것과 같이 로마에서도 그 뜻을 이루고 싶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특정한 대상에 한정되는 기쁜 소식이 아니라 세상사람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1:14~15)

사도 바울은 한편으로 격정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매우 신중하고 사려 깊습니다. 이 말씀은 단적으로 말하면 복음의 보편성, 곧 복음이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를 역설하는 데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 사람’이나 ‘미개한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의 대구는 당시 모든 사람을 통칭하는 일반적 어법입니다.

그 모든 사람에게 빚이 있다는 것은 법적 차원에서 갚아야 할 채무가 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진정한 삶의 연대성, 삶의 관계성을 함축합니다. 모든 사람이 유대하고 있는 관계라는 것을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지고 있다는 말로 강렬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믿음 안에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엄연한 진실이며 동시에 경이입니다. 이로써 복음의 보편성, 동시에 모든 사람들 가운데 구현되어야 할 복음의 구체성을 사도 바울은 역설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 진실을 전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방문 목적을 밝힌 후 본격적으로 복음의 뜻을 설파합니다(1:16~17). 16~17절은 본론의 서두로서 로마서 전체 주제를 집약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고 말을 꺼냅니다. 왜 하필 부정적인 수사로 시작하고 있을까요? 그냥 ‘내가 전하는 것은 복음입니다.’ 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이와 같은 표현을 쓰고 있는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크게는 그리스도인이 처한 상황, 구체적으로는 바울이 처한 상황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복음’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이 당시의 세계관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나 그리스인에게나 동시에 수치스러운 것이었고, 더욱이 제국의 수도 로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이 수치스럽게 여기지만 나는 그 사건을 당당하게 전한다는 뜻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는 당대의 세계관을 두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대 사람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에게나 그리스 사람에게나, 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고전 1:22~25)

오늘 본문말씀은 이 말씀을 그대로 환기합니다.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과 그리스인이 구하는 지혜, 이 두 가지는 모두 당시의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관이며, 동시에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는 대비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구하는 기적이 무엇일까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가 무엇일까요? 철저한 인간의 이성에 입각하여 진리를 규명하려는 태도입니다.

▲ 우리의 삶을 굴러가게 만드는 질서를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의 모범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Getty Image

오늘날에도 서구문명의 두 가지 기둥으로 여겨질 정도로 인간문명을 형성한 중요한 정신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으로만 해명되지 않는, 오히려 그 가치에 입각해 볼 때 도무지 얼토당토 않는 것으로 보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스럽게 전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명제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깊이 의식하고 있는 또 하나의 당대 가치관을 덧붙이면, 그것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하는 법적ㆍ제도적 질서, 곧 로마제국의 세계관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더욱 무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복음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역설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납니다.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1:17)

구약 하박국의 예언(2:4)을 인용하고 있는 이 말씀은 로마서의 핵심 주제이며 동시에 바울이 역설하는 복음의 진실을 집약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깊은 사색을 요구합니다. 이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이 말씀의 진실을 헤아리기 위한 분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헤아리기 위해 다시 새겨보면 이렇습니다. ‘복음, 곧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의가 온전히 드러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인간은 구원에 이른다.’ 이렇게 집약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의’가 말씀을 이해하는 관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 심판을 연상합니다. 예컨대 ‘구약의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며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라는 인식도 이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정의는 잘잘못을 가리는 것으로만 한정하고, 사랑은 그것과는 다른 포용적인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데서 비롯된 통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는 심판을 전제한 것도 아니며, 사랑과 구별되는 의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끝끝내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어떤 차별도 없이 인간을 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3:22~26 참조).

그 하나님의 신실함이 복음, 곧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났다는 것이 바울이 강조하는 핵심입니다. 그 신실함은 세상을 지배하는 가치관으로 재단이 되지 않는 진실을 함축합니다. 본문말씀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세상 사람들이 부끄러워 하지만 부끄럽지 않은 진실입니다. 유대인이 추구하는 기적, 그리스인이 추구하는 지혜에 비추어 볼 때 이해가 되지 않지만, 오히려 사람을 구하는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과 같이 하나님 능력을 초자연적인 기적에서 기대하고, 그렇게 나의 욕구가 실현되는 것이라 믿는 믿음으로는 알 수 없고, 또한 동시에 그리스인과 같이 자기만의 완결적인 세계 안에 갇혀서는 알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 하나님의 신실함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베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 의지에 따라 베풀어지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이를 받아들이는 믿음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온갖 편견을 떨쳐내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세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 인간 구원이 가능하다는 것을 바울은 로마서에서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남는 문제는, 어째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하나님의 신실함을 드러내는 사건이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더 이상 긴 이야기는 줄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셔서 단지 사랑을 이뤘을 뿐인 예수께서 가장 처참한 십자가형을 당하게 된 불가해한 사건에 그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세상을 떠받치고 있는 세계관과 그 질서의 파탄을 뜻하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말하지 않고 오로지 십자가를 강조하였지만, 그렇게 십자가를 강조하면 할수록 더욱 도드라지는 것은 그 십자가형에 이르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삶, 곧 완전하게 자기를 비워버리고 전적으로 타자를 위해 사신 그분의 삶입니다. 바울은 그 역설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드러난 진실을 전한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은 그 진실을 그저 교리에 대한 믿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삶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철저하게 자기를 비워버린 그리스도의 그 모습을 일상의 삶 가운데 구현하였습니다. 그로써 로마제국 안에서 보편적인 사랑의 복음을 실현하였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할 때 진실로 누구에게나 값없이 베푸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따르기를 바랍니다. 어떤 형태로든 차별을 정당화하는 세상의 헛된 편견을 넘어서야 하며, 인간을 운명의 족쇄 안에 가둬두는 가치관과 질서를 넘어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질서를 넘어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를 갈망하며 분투하는 이들이라는 것을 깊이 새기며, 진정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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