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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 알제리에서 헤겔을 부활시키다헤겔의 인정투쟁: 알제리와 인도 그리고 너머에 (2)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 승인 2023.02.25 15:17
▲ 프란츠 파농

헤겔은 알제리에서 다시 발견된다

20세기 들어오면서 헤겔의 인정투쟁은 알제리의 반식민지 운동에서 주목되고 매우 핵심적인 정치이론으로 발견되었다. 알제리는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정착 식민지배 유형을 보여 준다. 첫 번째 기간 동안(1830-1860) 50만명에서 100만명 정도의 알제리인들이 전쟁과 질병 그리고 기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프랑스 제2 공화국은 북부 알제리 지역을 대부분 점령하고, 프랑스 로컬 행정구역을 콜론으로 불리는 식민정부 아래 조직했다. 식민지의 군인들은 검은 장화(pieds noirs)를 신고 등장했다. 초기 식민지배 기간 동안 알제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인들을 ‘피에르 느와르’로 부르기도 한다.

프랑스의 식민주의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지배에서 콜론은 지역정부를 지배하고 알제리의 경제를 장악했다. 알제리의 독립운동은 1차 세계대전에서 시작되었고, 1933년부터 36년 사이 알제리의 사회·경제적 위기가 고조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당시 콜론은 나치와 협력한 ‘비시 정권’에 동조적이었고, 알제리에서 비시 정권은 1942년 몰락했다.

1943년 3월 모슬렘 지도자 ‘페르하트 아바스’는 56명의 알제리 민족주의와 인터내셔날 지도자들의 서명을 받은 알제리 국민선언을 프랑스 정부에 제출했다. 이것은 알제리의 독자적인 헌법을 요구하고 모슬렘들의 정치적 참여와 법적 동등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4년 프랑스 정부는 6만명의 정도의 무슬림에게만 프랑스 시민권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개혁안을 시도했다.

알제리 전쟁

알제리 전쟁(1954-62)은 무슬림과 콜론 정부 간의 갈등에서 촉발되었고, 탈식민지 역사 에서 잔인한 폭력과 진압으로 점철된 전쟁이었다. 2만 5천명의 프랑스 군인들이 사망한 걸로 추정된다. 전쟁발발 당시 피에르 누와르로 알려진 100만명의 유럽 정착민들이 알제리에 거주했다. 10만 5천명의 알제리인들이 프랑스 편에서 싸우기도 했다.

1954년 11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은 알제리 전역에서 게릴라전으로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해방전선은 주로 산악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했지만, 실제 전투는 알제리 근교를 공격하면서 일어났다(1956-7). 프랑스는 40만명 이상의 군인들을 파견하고 제압을 했다. 그러나 프랑스 국내에서 반전운동이 나타나고 국제적인 압력으로 인해 알제리 독립운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1959년 드골 정부는 알제리인들이 독립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콜론을 해산하려고했다. 그러나 1961년 4월 알제리를 장악한 프랑스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 알제리를 통제하고 드골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알제리 인민민주공화국은 공식적으로 1962년 9월 선포되었다.

저명한 역사가 벤쟈민 스토라(Benjamin Stora)에 의하면, 프랑스에 거주하는 7백만명이 과거 알제리의 식민지배의 삶과 연관되어 있다. 프랑스 정부는 1830년부터 시작된 알제리 식민 점령의 역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회피하려고 한다. 프랑스 현대 정치는 여전히 과거 식민주의 문제와 더불어 도시 슬럼에 집중된 이민문제로 인해 알제리 유령에 시달린다.

알제리 전쟁기간 (1954-62) 동안 대략 100백만명의 피에르 느와르(알제리 유대인을 포함해서)가 프랑스로 이주했다. 이 공동체는 오늘날 프랑스 사회에서 여전히 역사와 문화의 부메랑으로 나타난다. 정치적으로 알제리 모슬렘들은 1945년까지 프랑스 의회에서 이들의 권리를 대변해줄 정당을 갖지 못했다.

프란츠 파농과 헤겔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1952)과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1961)은 포스트 콜로니얼 이론의 출발을 알린다. 파농은 1925년 프랑스 식민지 카르브 섬의 마르티니크에서 중산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위해 자원병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리용에서 의학과 정신분석을 공부하고 프랑스 여성과 결혼했다.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은 프랑스 백인사회에서 흑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그리고 심리학을 통해 식민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해명했다.

1953년 파농은 알제리에 소재한 블리다-주앙빌 병원의 정신과장으로 일을 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고문을 당한 환자들과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식민주의적인 사물의 질서에서 드러나는 사회적 적대감정으로 인해 파농은 더 이상 정신과 의사로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1956년 파농은 병원에서 사임하고 알제리 독립과 해방전쟁에 참가했다.

파농은 사임서에서 정신의학은 환자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의 상황에 낯선 자로 살아가지 않도록 돕는 의학적 치유인데, 식민지배의 문명선교는 이러한 윤리적인 정신의학과는 맞지 않는다고 썼다. 아랍인은 자신의 나라에서 비인격화된 존재로 영구히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다. 알제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아랍인들을 지워버리는 낙태와 같다(Toward the African Revolution, 53). 파농은 튜니지아로 갔고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에 합류했다.

파농에게 혁명은 변혁의 과정이며 사회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영혼과 인간성을 창출한다. 흑인은 악하고, 백인은 선하다는 마니교적인 이항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파농은 전적으로 새로운 세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것은 과거로부터의 단절과 파열을 의미하는 유토피아적인 열망이며, 총체적 혁명을 요구한다. 혁명의 과정에서 파농은 주인과 노예의 인정투쟁에 관한 헤겔의 변증법에 몰두했고, 생사를 건 투쟁의 측면이 식민지 상황에서 필수적인 것임을 인식했다.

이제 헤겔은 파농을 통해 알제리 해방운동에 접합된다. 파농에게서 식민지배가 마니교적인 세계이며 예속된 본토민을 비인간화시키고 정신장애를 일으킨다. 폭력은 총제적이고 전체 사회로 확산되며 영구화된다. 식민지 이데올로기는 백인의 우월성과 문명선교에 의해 지지되고, 흑인에게 백인이 되려는 모방욕구를 채워놓는다.

파농의 헤겔 독해에서 두드러진 것은 백인주인을 모방하려는 흑인의 욕구를 정신 분석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철학에 대한 파농의 기여에 속한다. 헤겔은 식민지 문제를 근대 유럽의 십자군으로 파악하고 프랑스 혁명을 보면서 피지배자의 투쟁에 주목했다. 그러나 인종차별의 문제는 그의 변증법에서 별 다른 자리를 갖지 못했다.

파농의 ‘헤겔’은 이후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의 토대가 된다. 흥미롭게도 마르크스가 아니라 생사를 건 헤겔의 노예와 인정투쟁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헤겔 철학이 탈식민 주의 운동의 상징인 ‘칼리반’으로 등장한다.

정승훈 교수(시카고 루터신학대학원)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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