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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너희더러 죄인이라 하더냐잃은자가 찾으신다(누가복음 15:1-32)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3.07 01:41
▲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Getty Image

< 1 >

사순절은 전통적으로 우울한 절기, 슬픔의 절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고난을 묵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끝이 그리스도의 찬란한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울하게 슬픔 속에서 보내는 것이 정말 올바른 신앙일까? 또한 그 부활이야말로 우리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축제인데, 축제를 준비하는 마음이 슬픔과 우울이라면 이게 맞는 일인가? 하는 의심이 듭니다.

회개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화해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버렸던 것을, 회개를 통해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회개가 ‘내가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서 조아리는 슬픔과 아픔의 시간으로만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회개를 가능하게 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기쁨과 즐거움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겉으로 보기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눈물을 흘리면서 웃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농담으로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고들 합니다만, 실은 울다가 웃는 것, 그 경험이 우리 마음을 정화시키는 가장 아름다운 경험입니다.

성서를 살펴보면 울면서 웃는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돌아온 탕자입니다. 성경에는 그가 울었다거나 그가 웃었다거나 하는 표현이 없습니다만, 그가 아버지 품에 안겼을 때, 그는 분명히 목 놓아 울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훔치고 아버지와 눈을 맞추며 환하게 웃었을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바로 이런 장면입니다. 회개의 핵심은 아버지 앞에서 운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나 혼자서 눈물 흘리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한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서 눈물 흘리고, 하나님이 그 눈물 닦아주실 때, 하나님 앞에서 웃는 것, 그렇게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 그것이 진짜 회개입니다.

< 2 >

오늘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아서 읽은 말씀 속에는 모두 잃은 양과 목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흩으셨지만, 하나님께서 다시 모으시고 지켜주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거역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 당합니다. 그러나 멸망 당하고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모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모두가 다시 돌아와서 시온산에서 노래를 부르며 잔치를 열게 됩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때문에 우리가 노래 부르고 춤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양들은 자기 자신의 온갖 비참한 죄와 잘못으로 인해서 스스로 구렁텅이에 빠져버립니다. 그렇지만, 선하신 하나님은 결국 이런 양들을 품 안에 모으시고 그 슬픔과 비참함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바로 이런 좋으신 하나님에 대한 예레미야의 선포를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오늘 그 선포를 비유의 이야기로 잘 풀어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곳에 있는 잃어버린 생명들을 하나하나 다 찾아내시는 하나님, 그런 좋으신 하나님과 함께 기쁜 생명의 잔치를 누리게 되는 우리들, 그 감격스러운 화해의 장이 오늘 말씀 속에서 펼쳐집니다.

예수님께서 세리들 죄인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리면서 말합니다. “이 사람은 죄인들을 맞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구나.” 성경이니까 이렇게 점잖게 쓰여 있지요. 실제로는 어떻게 말했을까요? ‘예수 이 사람, 제정신이야? 미친 거 아니야? 부정 타게 어떻게 저런 놈들이랑 말을 섞어? 어떻게 저런 놈들이랑 밥을 먹어? 에이 더러워. 에이 재수 없어.’ 저도 예배시간이고 설교시간이니까 이 정도로 표현합니다만,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면서 얼마나 상스러운 말들을 했겠습니까?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신 말씀이 오늘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의 뜻은 누가 들어도 분명합니다. ‘잃은 양’이나 ‘잃은 동전’이라는 것은 세리나 죄인들처럼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 떨어져 나온 사람들입니다. 사람 취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은 완전히 사회에서 배제시켜 버려야 하느냐? 아니죠. 오히려 이런 사람들이 사실 찾아야만 하는 존재들이고, 찾으면 너무 기뻐서 잔치를 열어줄 존재라는 것입니다.

‘잃어버렸으니까 끝이다? 더 이상 필요 없다?’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잃어버릴 만하다. 잃어버린 게 아니라, 일부러 버린 것이다? 그러니 돌아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마라?’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소중한 것이고, 소중한 것이니까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바로 이런 이들을 찾는 데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흔히 잃은 양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잃은 동전의 비유라고 부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입니다. 그런데 제목을 그렇게 붙이면 초점이 양을 향하고 탕자를 향하게 됩니다. 동전을 향하게 됩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사순절을 보내는 오늘은 제목을 조금 다르게 불러보겠습니다. 양을 되찾은 목자 이야기, 동전을 되찾은 여인 이야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 이야기라고 불러 봅시다. 그렇게 제목을 붙이고 목자와 여인에게 집중해 봅시다. 그러면 사순절을 통해서 우리가 찾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습, 완전히 좋으신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 좋은 엄마 같은 한없이 좋은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백 마리 양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백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또 어떤 여자가 있습니다. 이 여자는 동전 열 닢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동전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동전이 스스로 도망간 것이 아니에요. 동전이 자기 주인 싫다고 도망간 게 아닙니다. 주인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은 누구 탓일까요? 저도 종종 물건을 잃어버리는 때가 있는데요. 우산도 잃어버리고, 지갑도 잃어버립니다. 그것은 지갑이나 우산 탓이 아닙니다. 내 탓이지요. 양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목자이고, 동전을 잃어버린 것은 바로 여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 탓을 하지 않으셔요. 오히려 자기 탓을 하십니다. ‘너희들이 나를 떠난 것 같지만, 그건 너희들 탓이 아니다. 너희들 잘못이 아니다. 너희들을 잃어버린 내 잘못이다. 자책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이야기의 초점을 항상 우리에게 맞춰서 ‘돌아와라’ 합니다. 우리는 잃은 양이니까 돌아와야 하고, 탕자니까 어서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전적으로 우리 탓이랍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꼼꼼히 읽어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잃은 양한테 ‘너 빨리 길 찾아서 돌아와!’ 그러지 않습니다. 양은 그냥 길을 잃은 채로 있습니다. 목자가 온 힘을 다해 찾지요. 동전한테 ‘빨리 주인의 지갑 속으로 돌아와!’ 하지 않습니다. 동전을 잃은 여인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지지요.

그리고는 모두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기뻐하신다.” 이 마지막 결론 구절이 오늘 비유의 핵심입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까? 아니요. 주인이 찾으셨어요. 그러면 회개란 무엇이냐? 주인은 엄중하게 기다리고 있고, 죄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고백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주인이 안타까워서 찾아다니며 결국 찾아내고 기뻐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회개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주시는 일이 회개입니다. 그러면 회개는 슬픈 일인가요? 아니죠. 최고로 기쁜 일이죠.

< 3 >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이고, 또 하나는 세리나 창녀 같은 죄인들입니다. 주님은 한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한 편의 사람들에게는 준엄한 질책과 심판을 이야기하시고, 다른 한 편의 사람들에게는 다정하고 따스한 위로의 말씀을 동시에 건네고 계십니다.

먼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도자입니다. 스스로 목자라고 생각합니다. 양들을 인도한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이 묻고 계신 것입니다. “왜 너희가 목자로 있는데 양들을 자꾸 잃어버리느냐? 왜 죄인들이 많아지느냐? 왜 죄인들이 생겨나느냐? 양들이 스스로 도망가는 것이냐? 그들이 스스로 죄인이 되는 것이냐? 혹시 너희들이 잃어버리고는 양 핑계 대는 것 아니냐?”

창녀가 되는 것은, 본래 태어난 본성이 음란하고 부도덕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백에 하나 그런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아버지도 잃고 남편도 아들도 없는 여인은 사회구조적으로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런 여자가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길입니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놓고 정죄해도 되느냐? 너희들이 그를 죄인으로 만든 것 아니냐?

태어나면서부터 장애를 가진 사람, 이 사람은 율법에 따라서 부정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예 성전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성전에 들어오지 못하니까 부정함을 씻어내는 제사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악순환이죠. 결코 깨끗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너희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으니 죄인이다’ 하고 정죄합니다. 이 사람이 죄인인 것도 자기 책임입니까?

안식일에 일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안식일에 일하는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합니다. 그런데, 하루라도 이삭을 줍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이삭을 주워야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정말 죄인입니까?

도대체가 당신들이 죄인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정죄하고 사회에서 소외시키고 온갖 부정적인 것들을 다 덮어씌워서 고통의 구렁텅이에 빠뜨려버린 이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느냐는 겁니다. 죄인은 양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목자가 죄인입니다. 양들을 돌보기는커녕 양들을 우리 밖으로 몰아내 버린 당신들, 못된 목자들이 죄인입니다. 마땅히 돌봐야 할 양들을 돌보지는 않고, 자기들끼리 ‘우리는 거룩한 의인이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우리는 너희들과 다르다.’ 하고 있으니 참 한심하다는 것이죠.

이 말씀은 거꾸로 지금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따스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너희 탓이 아니다. 너희 잘못이 아니다. 너는 잘못한 것 없다. 자책하지 말아라. 슬퍼하지 말아라. 아무 잘못도 없으면서 억지로 회개하지 말하라. 다만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바라며 그 은혜 앞에 엎드려라. 그 은혜로 구원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해라. 너희들이 죄인된 것은 다 내 책임이다. 내가 잃어버렸다.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 내가 다시 찾겠다.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서 반드시 찾아낼 것이다. 그렇게 너희를 찾아서 어깨에 떠메고 돌아올 것이다. 기뻐하고 잔치를 열 것이다.

물론 개인 개인의 잘못도 분명히 있습니다. 티끌만 한 잘못 하나도 없이 완전히 억울하기만 한 죄인은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하듯이 이스라엘은 스스로 범죄 했고, 스스로 타락했고, 스스로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어리석은 양들의 죄악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부모가 아무리 사랑으로 양육해도 사고치고 빗나가는 자녀가 있습니다. 때로는 많은 경우에 목자 때문이 아니라 양이 스스로 길을 잃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어떤 경우든 양을 잃은 책임이 목자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성서의 위대한 점입니다. 이것이 모세의 율법과 예수님의 복음이 달라지는 결정적인 분기점입니다. 이스라엘을 책망하시고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던 하나님이, 오히려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 자신에게 돌리고 하나님이 직접 십자가를 지시는 하나님으로 스스로 거듭나시는 것입니다. 

< 4 >

오늘 이야기는 끝내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갈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묻게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 땅의 목자들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심판관이 아니십니다. 혹시 우리가 길을 잃어도 그 이유를 묻지 않으십니다. ‘너 왜 길을 잃었어? 왜 나를 제대로 따라오지 않았어!’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 때문에, 죄인 된 사람 때문에, 스스로 아파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에게, 실수한 이에게 죄를 묻고 따지고 그에 합당한 벌칙을 내리는 것이 정의입니다.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공적인 정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의는 그런 정의를 초월한 차원에 존재합니다. 아무리 큰 죄가 있어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말끔히 용서하고 기쁨으로 받아주는 사랑의 차원이 있습니다. 이 차원이 없거나 이 차원을 모르는 사회정치는 언제나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실책을 반복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길을 잃고 어둠과 고통 속에 있을 때 가시나무에 찔리며 돌밭에 넘어지며 온 숲과 들과 골짝을 다니며 애타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알라는 것입니다. 배우라는 것입니다. 살라는 것입니다. 함께 봉독한 베드로서 말씀이 바로 그런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서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사랑하는 잃은 양을 찾으시는 우리 하나님의 크고 뜨거운 사랑을 맛보게 합니다. 그것이 질병이든, 탐욕이든, 가난이든, 마음의 질병이든, 거친 인간성이든, 죄로 길을 잃은 우리지만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찾느라 온갖 고초를 겪으십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받을 형벌, 고초, 비난을 대신 받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리적인 세계에서가 아니라, 이념의 세계에서가 아니라, 상징의 세계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 현실 세계의 한복판에서 길 잃은 우리를 찾느라 목숨까지 바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사랑과 자비로 충만하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이렇게 사랑과 자비로 행동하시는 예수님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사순절의 우리 회개는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고 슬퍼하고 통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고 살려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는 회개의 시간이 되어야 됩니다. 주님의 사랑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순절을 보내야 합니다.

참 회개를 통해, 참 화해를 통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부모가 되고, 이런 마음을 가진 자녀가 되고, 이런 마음을 가진 목사가 되고, 이런 마음을 가진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이런 마음을 가진 이웃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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