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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부활 체험오늘 우리에게 부활사건의 의미(고린도전서 15:1~1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4.12 00: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 죽음을 딛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체에 해당합니다.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는 모순에 담긴 진실, 그러기에 역설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진실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그 의미가 얼마만큼 실감나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요?

초기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 의미는 자명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의 삶이 아니라 죽음을 강조한 것은 사실 부활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전제였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그 진실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직접 대면했던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보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다시 산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직접 경험한 바도 없고, 따라서 죽음의 의미도 헤아릴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부활은 더더욱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본문말씀을 시작으로 하는 고린도전서 15장은 긴 이야기로 바로 그 부활의 의미를 설파하는 데 할애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처럼 이야기하는 이유는 12절에 분명하게 밝혀져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당대 사람들도 부활의 진실을 이해하기 어려워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부활의 의미를 힘주어 설파하고 있습니다. 본문말씀의 첫머리는 사도 바울 자신이 전해 받은 복음의 진실을 고린도교회 공동체에 전한 사실을 확인합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 복음을 제대로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전해 받아 전해 준 복음의 요체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관련하여] 죽으셨다는 것과, 무덤에 묻히셨다는 것과, 성경대로 사흗날에 살아나셨다는 것”(3~4)입니다. 여기에서 ‘성경대로’라는 것은 특정한 구절보다는 구약성서에 전해진 예언의 취지를 뜻합니다. 고난 받으신 그 분이 우리를 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의 요체는, 고난 받고 죽음에 이르렀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 이상 죽임의 힘에 붙잡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계속해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게바에게 나타나시고,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오백 명이 넘는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시고, 주의 동생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시고, 마지막으로는 바울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게바, 곧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복음서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백 명의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신 사실부터는 다른 기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복음서에는 물론 다른 문헌 기록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본문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입니다. 부활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억, 전승을 담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전해 받은 것을 전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전하고 있는 부활에 관한 증언이 그 이전부터 전해져 온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바로 이 이야기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고 이해했던 부활사건, 그리고 사도 바울이 체험하고 이해했던 부활사건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본문말씀에서 부활사건이 단 한번 일어난 사건, 다시 말해 이른바 유일회적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시고,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익숙한 사실이므로 새삼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복음서가 전하는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가 빠진 것은 유감입니다. 아마도 가부장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교회의 전승이 여인들의 증언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탓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부활에 관한 첫 번째 기록으로서 본문말씀은 복음서가 전하지 않는 여러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부활의 의미를 새기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오백 명의 형제자매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는 이 대목에만 나오는 이야기라 달리 확인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집단적 체험 현상을 두고 말한 것이라면 사도행전 2장이 전하는 성령강림 사건과 동일한 사건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성령체험 사건과 부활체험 사건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야고보에게 나타나시고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역시 다른 곳에서는 전해진 바 없는 이야기입니다. 열두 제자와 구별되는 인물들에 대한 이 언급은 이들이 우선 열두 제자 밖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을 말하고, 다른 사도들은 열두 제자 밖의 많은 전도자들을 뜻합니다. 이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는 이 많은 사람들이 부활사건의 체험자요 증언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 그것은 부활의 사건이 단 한 번의 사건, 또는 특정한 시점에 특정한 사람에게만 경험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부활의 사건은 누구에게나 끊임없이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하기를,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께서 자신에게까지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맨 나중에 달이 차지 못하여 난 자와 같은 나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이 말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나타나는 일이 바울에게서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부활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바울의 자신의 입장에서 볼 때 맨 마지막으로 자기까지도 부활을 확실하게 체험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 Luca Signorelli, 「The Resurrection of the Flesh」 (1499) ⓒWikipedia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예수님과 생전에 삶을 나눈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그 현장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만난 갈릴리 현장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는 일련의 부활사건의 현장과는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스스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그 고백은 다마스쿠스에서의 회심을 말합니다. 스스로 고백하는 바와 같이, 그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 사건 이후로 그는 그 누구보다 열렬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이전의 삶에서 전향하여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고백은 스스로의 거듭남을 말합니다.

바울이 스스로 생각하기에 그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합류했다는 점에서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믿고 전하는 이들을 두고 허무맹랑한 소리를 한다고 박해까지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스스로를 두고 만삭이 되지 못한 채 태어난 자와 같다고 자칭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감히 사도를 자처할 수 없다고까지 고백합니다.

그러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부활을 체험하고 그 증언자가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그렇게 형편없는 자신도 부활을 체험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동시에 삶의 질적 변화로서의 부활을 강조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이어지는 말씀, 곧 12절 이하에서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무엇을 뜻하는지 집요하게 설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부활의 의미를 얼마나 곡해하고 있는지, 그래서 사도 바울이 부활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쓰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 해명 가운데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15:31) 무슨 의미일까요? 거꾸로 말하면 날마다 산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죽고 매일 부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매일 오락가락 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곧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성찰적 삶을 사는 사람의 진실한 고백입니다. 죽음의 현실에 붙잡혀 있으나 끊임없이 그 현실의 힘을 떨쳐내고 일어서려는 삶을 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현실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요컨대 본문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증언으로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부활은 한정된 시간, 한정된 공간, 한정된 사람들에게 죽은 시체가 소생하여 나타난 것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부활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진실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소용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역설하고 있습니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부활사건은 마치 화산맥이 폭발하는 것과 같이 역사에서 끊임없이 재현되는 것으로 봤습니다. “갈릴리 민중들에게 일어난 일대 전환의 사건”으로서의 “부활사건”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비겁에서 용기로, 소외된 자의 의식에서 역사의 주체라는 의식으로의 일대 전환”, “자기초월의 사건”을 뜻하는 것입니다(<민중신학 이야기>, 336이하). 안병무 선생은 1970년 전태일 사건에서, 그리고 1980년대 학생과 노동자들의 숱한 사건들 가운데서 부활사건을 목격하고 증언했습니다. 더불어 그렇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활사건을 외면한 설교나 선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단언하기도 하였습니다(346).

오늘 우리에게 부활사건은 어떻게 체험될 수 있을까요? 공정이 무너지고 정의가 파탄 난 현실, 민의가 존중받지 못하고 기득권세력의 전횡과 횡포가 날로 심화되어 가는 현실, 집권자들이 평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전쟁의 위험을 조장하고 있는 현실, 정치가 갈라진 마음을 통합하기보다는 파당을 갈라 득표수만 계산하는 현실, 파괴된 자연을 되살기는커녕 단기적 경제적 이해득실만 따지며 더욱 심각하게 훼손하는 현실, 사는 것 자체가 가혹한 경쟁이요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라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은 현실, 그래서 젊은이들마저 희망을 갖지 못하는 현실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부활은 그 죽음의 현실을 넘어서는 것을 뜻합니다. 그 현실에 매여 무기력했던 이들이 다시 떨쳐 일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현재 주어진 현실, 그 현실에 매여 있는 자신을 뛰어넘어 ‘초월’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은혜요, 우리가 경험하는 부활사건입니다. 죽음의 현실 가운데서도 참 삶의 소망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부활사건이요, 부활체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그 의미를 새기는 아침, 우리들 모두가 진정한 부활을 갈망할 수 있기를 바라며, 또한 우리들 모두가 진정한 부활을 체험함으로써 부활사건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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