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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복음 21장 1-14절)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4.18 00:17
▲ James J. Tissot, 「The Second Miraculous Draft of Fish」 (1884-96) ⓒBrooklyn Museum

며칠 전에 티비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를 봤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무언가에 미쳐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멋있게 미친 사람들도 있고 좋지 않게 미쳐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본 사람은 2002년 월드컵 이후 축구에 빠진 사람이었습니다. 일상생활도 팽개쳐 버리고 축구에만 빠져서 일 년 365일을 축구장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닌다고 합니다. 온 집안에도 축구선수 포스터와 축구용품으로 도배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난 2002년 월드컵의 기억은 강렬합니다. 누구나 즐거움을 만끽했고 일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삶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고 난 후에 해야 하는 일은 다시금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입니다. 축제의 들뜬 기분이 심신을 정화하고 새 힘을 주었지만, 언제까지 축제에 빠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잠시의 즐거움에 힘입어 일상에 복귀하고 일에 몰두하고 가정을 돌보고 학업에 열중해야 합니다.

축제는 일탈이요 벗어남이기 때문입니다. 일탈에서 얻은 힘은 일상을 잘 살아내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제는 우리 삶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서 티비에 등장한 사람처럼, 축제를 일상을 위한 이벤트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축제 자체를 자신의 일상으로 바꾸어버린 사람을 보면,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것입니다. 일탈이 일상을 점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축제야말로 우리 삶의 진리였다면 어떨까요? 실은 우리의 일상이 삶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었다면 어떨까요? 그 축제가 삶의 본질을 맛본 진짜 경험이라는 어떨까요?

오늘 함께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루살렘 유대지방에 엄청난 이벤트가 벌어진 후의 상황입니다. 갈릴리 예루살렘에 예수라 이름하는 이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외치며 큰 기적과 이적을 행하고 온 예루살렘을 술렁이게 합니다. 가는 곳마다 병자가 치유되고 구원을 얻고 죽은 이가 살아납니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제자가 되어 따라다닙니다. 그런 예수는 결국 붙잡혀 처형되고 맙니다.

예루살렘에 나타났던 예수는 월드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그야말로 엄청난 축제의 현실이었습니다. 월드컵이 일상 속의 일탈이었다면, 예수는 일탈 속의 진리였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한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꿈같은 말씀을 현실에 이루었습니다.

예수를 통해 그런 세상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분을 따라가면 새 세상이 올 것만 같습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가 불길처럼 일어납니다. 예수의 사역에 동참하여, 예수님의 말씀대로 생업도 버리고 가족도 뒤로하고 그를 따라다닙니다. 축제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축제가 갑자기 예수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축제가 끝나고 난 뒤에 어떻게 사느냐 입니다. 이제 축제가 끝났으니 일탈이 끝났으니 일상으로 복귀할 것인가? 축제를 나의 새로운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그 축제의 삶을 계속 살아낼 것인가? 우리는 결단의 순간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라고 말하며 축제의 끝을 알리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선포합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라고 말하며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그저 한순간 즐겁게 지나가 버리는 축제라도 되는 양,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태평하게 고기잡이에 복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귀한 일상에 더이상 즐거움이 없습니다. 행복이 없습니다. 월드컵 축제라면 해방감과 일탈의 경험으로 일상을 더 활기차게 살아낼 수 있었을 텐데, 예수와 함께 했던 축제의 경험은 오히려 일상을 무력하게 만듭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자리가 여기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깨달아 버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가야 할 진정한 삶의 자리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삶의 행복을 맛봤기 때문입니다.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할 참된 삶의 모범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삶의 온전한 이상, 완전한 모습을 꿈꾸었고 배웠고 경험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삶, 불완전한 삶, 불행한 삶으로의 복귀는 절망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날 밤 그들이 탄 배는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빈 배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물어보십니다. ‘여보시오들, 무얼 좀 잡았소?’ 주님의 그 물음에 제자들이 답합니다.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보시오. 그러면 잡을 것이오.’ 예수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지니 밤을 새워도 잡을 수 없었던 고기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걸려 올라옵니다. 배 오른편과 왼편은 고작해야 몇 미터 차이일 텐데, 물고기가 몇 미터를 사이에 두고 이편에는 없고 저편에는 많았던 것일까요? 배의 오른편과 왼편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을까요?

헬라어로 ‘회심’을 의미하는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꾸는 것, 방향전환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회심한다는 것, 회개한다는 것은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의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물을 던지는 방향, 왼편으로 던지는 그물과 오른편으로 던지는 그물은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느냐?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하는 상징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제자들의 삶은 자신을 위한 삶,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사는 삶이었습니다. 나를 먹여 살릴 고기를 잡는 것, 그들에게는 오로지 그것만이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그로부터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겠다는 소망을 품게 된 후, 삶의 소망이 바뀌게 됩니다. 나를 먹여 살릴 고기를 잡는 것이 아니라, 남을 먹여 살릴 고기를 잡는 것, 사람을 죽음의 바다에서 낚아 올려 예수의 생명수 샘물 안에 넣어주는 것 그것이 그들의 삶의 소망이 됩니다. 아니 적어도 그것이 올바른 삶의 소망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전에 살던 삶, 나의 욕망을 위해 살던 삶. 내 개인의 행복만 추구하던 삶이 참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 예수를 통해 참 행복을 깨달은 사람들, 그들이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와 예전의 삶의 방식대로 그물을 던져봐야 아무것도 건져낼 수 없습니다. 소망은 하나님 나라에 있는데 삶의 방식은 이전의 세속의 진흙탕에 빠져있으니 아무런 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얻어 봐야 건져내 봐야 그것이 열매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낱 가치 없는 지푸라기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 하늘나라의 축제를 경험한 제자들이 일상으로 돌아와 예전의 삶의 방식대로, 예전에 그물을 드리던 곳, 배의 왼편에 아무리 그물을 던져봐야 아무것도 건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열매가 이미 그곳에 없기 때문입니다.

배의 왼편에서 그토록 많이 잡히던 고기가 이제 주님을 경험한 후의 눈으로 보니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그물은 비어있습니다. 마음은 하늘의 것을 바라고 있는데 몸은 세속의 현장에 머물러 있으니 아무것도 보람이 없습니다. 배의 왼편에서는 여전히 많은 고기가 잡혔을 것이나, 제자들의 눈에는 쓸데없는 빈 그물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십시오.’ 그렇습니다. 하늘의 것을 소망하게 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참 영생을 맛본 사람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방향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신나는 축제를 통해 하늘의 것을 소망하게 된 사람은 더 이상 배의 왼편에 그물을 던져서는 안 됩니다. 던져봐야 제자들처럼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얻어봐야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일 뿐입니다.

새로운 방향, 삶의 새 목표, 배의 오른편을 향해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열매, 새로운 고기, 그물이 찢어지도록 충만한 큰 고기를 얻게 됩니다. 머릿속으로 마음속으로 알고만 있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배의 왼편에서 몸을 돌려서 배의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똑같은 바다, 똑같은 배 안이지만, 내가 몸을 돌려않을 때 아무것도 없던 척박한 바다가, 충만한 고기가 뛰노는 풍요로운 바다로 바뀌게 됩니다.

이렇게 건져낸 고기는 아마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전해져 왔습니다. 물고기를 뜻하는 헬라어 ‘익투스’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말의 앞 글자를 붙여 만든 말이라고 풀이되어 왔습니다. 제자들이 그물 가득 건져낸 큰 고기는 바로 부활한 예수, 부활한 예수를 통해 얻게 된 영원한 삶, 그 영원한 삶을 영위시켜주시는 성령, 성령을 통해 누려가는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선물은 내 그물이 가득 넘치도록 주어집니다. 내 삶의 깜냥에 충만하도록 찢어지도록 채워집니다. 너무 많아서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다 누리기도 벅찰 정도로 넘치도록 베풀어집니다. 이 많은 물고기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이 많은 은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자들은 어리둥절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잡은 고기를 가져오너라. 와서 같이 아침을 먹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빵과 생선을 나누어 주십니다. 예수님의 초청은 식탁으로의 초청입니다. 음식을 나누는 자리, 함께 밥을 먹는 자리로의 초대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나누어주시는 은혜입니다. 넘쳐나는 음식과 그 음식을 나누는 식사 시간. 익숙한 장면 아닙니까?

네. 오병이어의 기적현장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새로운 소망을 품게 된 사람들이 그 소망의 방향으로 마음을 돌리고 몸을 돌리려고 결단했을 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가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풍성해집니다. 그 풍성한 식탁의 잔치에서 배불리 먹고 함께 사랑을 나누면서 친교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렇듯 지나가 버린 축제에 대한 결단으로의 초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사건은 생명의 축제를 일상에서의 일탈로 지나쳐 버릴 것인가, 아니면 그 생명의 축제를 내가 새롭게 살아가야 할 나의 일상으로 만들것인가 하는 결단의 현장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설교할 때입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삶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은 갑자기 닥쳐온 낯선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태초부터 함께 하셨던 하나님, 이스라엘의 온 역사를 통해 계시하셨던 하나님,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쉼 없이 말씀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항상 보여주셨던 생명의 축제를 외면해 왔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금 그 생명의 축제에 초대하니 이번에는 허무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말고, 그 축제에 몸을 던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계절을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년 닥쳐오는 부활절이 일상에서의 잠깐의 일탈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내왔던 일상을 훌훌 털고 일어나 부활의 축제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이어야 할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하고 다시 고깃배의 왼편에 무의미한 그물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인도대로 삶의 방향을 바꾸어 몸을 돌려 고깃배의 오른편에 참된 그물질을 해야 할 것입니다. 새로운 방향으로 내 삶을 돌리고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 속에 주님께서는 풍성한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 은혜는 내 그물이 내 그릇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칠 것입니다. 이 은혜를 나누는 식탁에 주님이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고기로 넘쳐나는 그물이 뿌듯하지 않니? 와서 아침을 먹자.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함께 나누자.’ 

우리는 그 식탁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먹거리를 수확하여 풍성한 식탁을 차려내는 자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이 먼저 가신 길을 따라, 그 풍성한 식탁에 모든 이를 초청하여 주님의 은혜를 나누어주는 제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로 인해 세상에 풍성한 하늘의 양식이 넘치기 바랍니다. 우리로 인해 세상 모든 이들이 하늘의 양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부활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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