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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맑을, 우리의 오월을 위하여《5월 18일, 맑음: 청소년과 함께 읽는 518 민주화운동 이야기》(임광호 외 지음, 박만규 감수, 5.18 기념재단 기획, 창비, 2019)를 읽고
정리연 | 승인 2023.05.18 02:01
밤 12시, 시내 전화가 끊겼다. 무서운 침묵이 온 도시를 덮었다. 시민들은 대문을 걸어 잠그고 솜이불로 창문을 가린 채 공포에 떨었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렀다. 잠도 오지 않는 밤이 가고 있었다. 27일 새벽 3시 50분, 어둠과 침묵을 깨고 애절한 여성의 목소리가 도청 옥상의 스피커를 통해 광주 시내를 울렸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 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목소리는 처절했다. 방송을 들은 시민들은 가슴이 아팠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집 밖으로 나설 수 없었다. 밖에서는 군인들이 골목골목을 누비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새벽 4시가 되자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126쪽)

오월,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광주 5.18 민주화운동은 올해 43주년이 되었지만, 끝나지 않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빨갱이’들의 폭력 시위였다고 주장하며 518을 폄훼하는 집단들이 있고, 제대로 된 진상규명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사진과 영상, 증언들로 518의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지만. 뻔하게 보이는 가해자 집단은 조금의 가책이나 사죄 없이 대통령이나 고위 관직, 부자가 되어 그 자손들까지 부족함 없이 살아왔고 현재도 그렇다. 피해자와 유족들은 아직까지 트라우마와 고통, 상처의 깊고 어두운 바다에 잠겨 있는데도 말이다.

광주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아니지만, 부모님을 떠나 처음으로 독립생활을 했던, 20대 시절의 대부분을 지냈던 곳이여서 추억도 애틋함도 많은 곳이다. 광주는 전라남도에서 가장 큰 도시였기 때문에 우리 지역뿐 아니라 전남 대부분 사람들은 광주를 오가며 가깝게 지냈다. 그래서인지 자라면서 518에 관해 띄엄띄엄 곁소리를 듣기도 하고 관련 책을 읽기도 했지만, 누군가에게 설명할라치면 입이 잘 열리지 않는다. 그래서 올해는 아이들과 함께 읽어볼 만한, 이해하기 쉬운 책을 골랐다.

5.18 기념재단이 기획하고 중·고등학교에서 역사와 국어 교사들이 쓴 이 책은 1980년 5월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5.18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기획부터 출간까지 2년이 걸렸는데 ‘어떻게 하면, 5.18이 교과서보다 좀 더 친근하게, 재밌게 청소년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당시의 상황이 전혀 재밌는 사건은 아니었지만, (지루하지 않게) 재미와 의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청소년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이 왜 이 사건을 알아야 하는지, 역사적 사건을 어떻게 쉽고 친절하게 건넬 것인지에 대한 저자들의 고민이 녹아있다.

1부에서는 5월 18일부터 이어지는 열흘간의 항쟁을 집중적으로 설명한다. 전남대 앞에 모인 학생들에게 갑작스럽게 쏟아진 곤봉과 군홧발, 이에 맞선 시민들의 저항, 버스와 택시를 앞세운 차량 시위, 무장하는 시민군, 무너지는 국내 언론과 외신 기자의 활약, 계엄군이 잠시 물러간 틈에 형성된 공동체, 결국 다가온 최후의 날까지의 사건들이 기술되어 있다.

2부에서는 항쟁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과 기억하는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피해자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어떻게 힘써왔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독재 정권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시위를 하고 성명서를 내는 사람들, 6월 민주 항쟁에 이어진 광주 청문회, 전두환과 노태우의 재판 과정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의 역사가 전개된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이고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사건들을 쉽게 전하고자 노력했음이 느껴진다. 또한 5·18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역사적 배경(유신 시대, 6월 민주항쟁 등)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문학, 미술, 영화 등에 나타난 5·18의 모습을 소개해 사건에 대한 관심을 확대해 주고, 각 장이 끝나는 부분에는 아르헨티나, 프랑스 등 세계 각국의 사례들도 소개하여 5·18을 세계사적 흐름에서 조망할 수 있도록 한 것은 탁월한 아이디어였다.

봄, 민주화라는 꽃이 피다

대한민국의 권력은 전두환과 신군부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 1961년 5월 16일 육군 소장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부하였던 군인 전두환도 쿠데타로 군사 권력을 잡았다. 12.12 군사 반란은 단 하룻밤 사이에 벌어지다 보니 국민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해가 바뀌어 1980년 봄이 되었다. 꽃이 피어나고 휴교령이 내려졌던 대학들도 다시 문을 열었다. … 5월이 되자 대학생들은 본격적으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행동에 나섰다. … 5월 13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학생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다. 이튿날 정오에도 서울 시내 대학생 7만여 명이 거리에서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을 외쳤다.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열기는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져서 5월 15일에는 학생 10만여 명이 서울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28-29쪽)

조금이나마 5·18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다. 학교 선생님들은 대부분 광주에서 출퇴근하셨고 그들은 거의 전남대나 조선대 출신이었다. 1980년도에 광주에서 고등학생이거나 대학생이었으니, 몸소 518을 겪은 세대였다. 지루한 수업 시간 중간중간에 선생님들은 첫사랑이나 연애 이야기 등을 해주시곤 했는데, 그중엔 518 이야기도 있었다.

숨죽이고 총소리를 들었던 날들, 밖에 나가지 못하게 부모님이 밖에서 문을 잠그거나 붙잡혀 왔던 일, 같은 동네 누군가가 갑자기 싸늘한 주검이 되어 발견되거나 실종된 기억 등 직접 참여하신 분도, 그렇지 못한 분도 있었지만, 그 사건은 모두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것 같았다. 5월만 되면 온몸에 스멀스멀 공포감이 올라오고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죽은 자’에 대한 빚으로 남았다고 했다.

(8일-16일)
광주에서도 서울에서처럼 신군부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위가 열렸다. 5월 8일 전남대학교 교정에서 시작된 시위인 ‘민족 민주화 성회’는 14일에 이르러 거리 시위로 이어졌다. 많은 학생과 시민이 전남도청(당시 광주는 전라남도 소속으로 도청이 광주에 있었다) 앞에 모여 “비상계엄 해제”, “전두환 퇴진” 등을 소리 높여 외쳤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교수, 직장인, 심지어 고등학생까지 참가했다. … 도청 앞에서 집회를 마친 시위대는 횃불을 들고 광주 시내를 행진했다. 행진은 질서 정연하고 평화로웠다.(39쪽)

(18일)
어느 순간, “돌격!”이라는 명령과 함께 공수 부대가 무서운 기세로 학생들에게 달려들었다. 뜻밖의 상황에 놀란 학생들은 우왕좌왕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미처 도망치지 못한 학생들에게는 공수 부대의 곤봉이 사정없이 날아왔다. 머리, 팔, 다리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팼다. 많은 학생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거나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것은 광주 시민들이 앞으로 겪게 될 처참한 비극의 예고편이었다.(40, 44쪽)

의도된 폭력

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군인을 좋은 사람, 훌륭한 직업으로 생각했다. “나는 나는 자라서~ 우리나라 지키는 군인이 될 테야”라는 동요를 부르면서. 그런데 왜 군인들은 자기네 나라 사람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했을까? 그들이 원래 나쁜 사람이라서?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미 몇 달 전인 1980년 2월부터 주로 공수 부대를 대상으로 이른바 ‘충정 훈련’이라는, 강도 높은 폭동 진압 훈련을 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앞으로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면 신속하게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충정 훈련은 매우 가혹했다. 이 훈련을 받는 동안 군인들은 약 석 달 동안이나 외출이나 외박이 금지되었다. 개인적인 욕구가 철저하게 통제된 상황에서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훈련을 받았다.

광주에 투입되기 며칠 전부터는 이상한 정신 교육까지 받았다. “광주에서 소수의 ‘빨갱이’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시위대는 모두 빨갱이니 때려잡아야 한다”라며 혹독한 훈련은 국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세뇌했다. 고된 훈련으로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워진 공수 부대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민들에 대해 적개심을 키워 갔던 것이다.

(18일 오후 3시 40분경)
금남로로 이어지는 유동삼거리에 공수 부대가 나타났다.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 전원 체포하라.” 놀랍게도 체포 대상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거리에 나와 있는 사람 전부였다. 그 명령과 동시에 공수 부대가 함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는 물론이고, 시위를 구경하고 있었거나 우연히 그 길을 지나던 시민들까지 군홧발로 걷어차고, 박달나무로 특수 제작된 곤봉으로 때렸다. 군인들은 지나가던 시내버스를 멈추고 승객들을 폭행하는가 하면, 시민들의 체육대회가 열리고 있던 인근 고등학교까지 들어가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피가 튀었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 공수 부대는 시위대를 해산시키는 것보다 폭력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45쪽)

순식간에 죽음과 공포가 에워싼 거리의 시민들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여러 매체의 사진과 영상을 통해 무자비하게 폭력을 당하고 있거나 속옷만 겨우 걸친 채 공수 부대에게 기합을 받고 군용 트럭에 실려 끌려가는 모습, 길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모습 등을 본 적이 있다.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만큼 끔찍했다. 그러나 전두환은, 믿기 힘들 정도로 잔인했던 공수 부대의 폭력에 대해 일부 시민들의 “과격 시위”를 막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의도치 않게 벌어진 “과잉” 진압이었을 뿐이라고 했다.

▲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에서 열린 ‘민족민주화대성회’.(왼쪽 사진) 전남대 학생들을 비롯해 수많은 광주 시민들, 고등학생들도 이 집회에 참여했다. 그렇게 5·18의 서막이 열렸다. 광주 시내로 진입하는 계엄군 장갑차.(오른쪽 사진) 5월 18일 오후 4시경 시위대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가 광주 도심에 투입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공수부대는 시민이 조금이라도 모이면 즉시 해산하라며 총칼을 휘둘러 숱한 희생자를 낳았다. ⓒ5·18기념재단 제공

나중에 이는 터무니없고 구차한 변명이었음이 밝혀졌지만, 그는 끝내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고되고 억압적인 훈련으로 말 그대로 ‘악에 받친’ 상태에서 광주 시민과 맞닥뜨린 공수 부대는 야수와 같은 폭력을 휘둘렀다. 공수 부대의 광주 진압 작전은 흔히 ‘화려한 휴가’라는 별칭으로 불리곤 한다. 잔혹한 폭력에 대비되는, 아이러니한 표현이다.

화려한 휴가, 비극의 광주

(19일)
충격과 공포가 진정되지 않은 시민들은 아침 일찍부터 금남로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전, 금남로에 모인 인파는 어느새 수천명이 되었다. 시민들은 “내 새끼 내놔라”, “공수 부대 물러가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사람들이 늘어나자 잠시 물러나 있던 공수 부대가 다시 나타났다. 역시나 가차 없이 곤봉과 대검을 휘둘렀다. 한층 더 잔혹하고 무차별적이었다. 많은 시민이 피투성이가 된 채 병원으로 실려가거나, 연행되거나, 어딘가에 버려졌다.

“옆에 총이 있었다면 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가톨릭 사제

“기자로서는 이 같은 행위를 적절히 표현할 단어를 찾을 수 없었다. 만행, 폭거, 무차별 공격 등의 단어는 너무 밋밋해 도저히 성에 차지 않았다.” - 동아일보 김충근 기자(56쪽)

시민들은 광주 곳곳에서 공수 부대와 충돌했다. 오후 4시 50분쯤 계림파출소 근처에 계엄군 장갑차 1대가 나타나자 시위대는 순식간에 맨몸으로 가로막고 포위해 버렸다. 이에 당황한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발포했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그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5·18 최초의 발포였다.

(20일)
오후 5시경이 되자 무등경기장에는 택시뿐만 아니라 시내버스를 비롯한 대형 버스와 화물차까지 모여들었다. 이들 운전기사에게 차량은 생계 수단, 즉 ‘밥줄’이다. 이들이 차량을 앞세워 시위에 나서는 것은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거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차량 행렬은 무등경기장을 출발해 금남로를 거쳐 도청 광장으로 진격했고. … 오후 7시경, 도청 광장에서 100미터가량 떨어진 동구청 앞에 도착했다. 공수 부대는 … 곧바로 최루탄과 최루가스를 쏘아댔다. 매운 연기 때문에 방향 감각을 잃은 차량들이 가로등에 부딪히며 연이어 멈추어 섰다. 그 틈을 타 돌격한 공수 부대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켁켁거리며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있던 운전자들과 시위대를 끌어내어 마구잡이로 때렸다. …
또한 광주역 근처에서는 시위대와 공수 부대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펼쳐졌다. 광주역을 지키던 공수 부대는 시위대가 끝없이 몰려오자 기어이 총을 쏘았다. 밤 10시 30분경,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울린 총소리는 항쟁 기간 중 일어난 최초의 집단 발포였다.(64쪽)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옥상 스피커에서 갑자기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도청 앞에 있던 계엄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도청 주변의 전일빌딩, 수협 전남도지부 등 높은 건물 옥상마다 배치되어 있던 공수 부대 저격병들도 총을 쏘았다. 경악스럽게도 공수 부대의 사격은 정조준된 것이었다. 시민들을 표적 삼아 정확하게 조준해서 쏘았다. 지난밤 광주역 근처에서 벌어진 집단 발포에 이어 이날 도청 앞 발포는 대낮에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진 집단 학살이었다.
계엄군의 사격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다. 도청 부근에 사람이 얼씬거리기라도 하면 가차 없이 쏘았다. 총에 맞은 쓰러진 시민들을 보고 격분하여 태극기를 흔들던 청년도, 부상자들을 구하려고 몸을 숙이고 도로로 뛰어들던 사람도 총에 맞아 검붉은 피를 토하며 죽어 갔다.  금남로는 순식간에 시민들이 흘린 피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로 생지옥이 되었다. 흐드러지게 핀 아카시아 꽃 내음이 향기로운, 날씨도 맑은 날이었다.(64, 66쪽)

외로운 싸움, 고립된 광주

“나는 가톨릭센터 뒤쪽 사거리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사망자가 발생할 때마다 땅바닥에다 ‘바를 정’ 자로 표시했다. 약 30여 분 사이에 12명이 사망했다. … 그날 나와 함께 가톨릭센터 뒤쪽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 수를 땅바닥에 표시하던 동네 선배는 37명까지 표시하다 지워버렸다고 한다.” - 현장 목격자 임춘식

알다시피 80년대는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SNS가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신문과 방송뿐이었다. 하지만 5·18 당시 신군부가 철저하게 언론을 통제해서 광주 소식이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5월 19일 하루에만 525건의 기사 중 100여 건이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은 21일까지 단 한 줄도 보도되지 못했다.

광주 시민들이 겪고 있는 잔혹한 일상이 보도되기는커녕, 불순 세력과 북한에서 내려온 간첩들의 선동에 의해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계엄사령관의 담화문이 발표되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들을 ‘폭도’ ‘난동 분자’ ‘무장 폭도’ 등으로 보도하라는 지시를 각 언론사에 내렸고 언론사들은 그대로 따랐다. 다른 지역에서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에 광주 시민들은 외롭게 싸워야 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 1980. 5. 20 <전남매일신문> 기자 일동

그런데 이들이 그토록 알리고 싶어 했던 진실은 마침내 어느 외신 기자의 카메라에 담겨 철통같았던 광주를 빠져나가 전 세계에 알려졌다. 바로, 위르겐 힌츠페터이다.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앞에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 위르겐 힌츠페터, 독일 기자

힌츠페터는 계엄군이 쓸고 간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처참한 학살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가슴이 막히고 눈물이 자꾸 흘러서 촬영을 가끔씩 중단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무사히 광주를 빠져나온 그는 필름을 빼앗길세라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혹시라도 있을 검문에 대비해 필름 절반은 허리춤에, 나머지 절반은 깡통으로 된 과자 상자에 숨겼다고 한다. 다행히 무사히 일본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지인을 통해 필름을 독일로 보냈다. 5월 22일, 힌츠페터가 필사적으로 알리려 했던 광주의 진실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에 방송되었고 세계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졌다.

이 새벽을 넘기면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광주 사태를 조기에 수습하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특전사령관을 통해 전남북계엄분소장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계엄군은 광주를 진압하는 ‘상무 충정 작전’ 개시 시각을 ‘5월 27일 0시 1분 이후’로 확정했다. … 광주는 공수 부대를 포함한 4,000여 명의 계엄군에 둘러싸였다.(119쪽)

21일 계엄군이 철수한 줄만 알았는데, 26일 오후 5시, 계엄군은 도청을 진압하겠다고 통보했다. 저항의 중심지였던 이곳을 진압함으로써 시민들의 저항을 완전히 짓밟겠다는 의도였다.

“여러분,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기꺼이 죽어도 좋다는 사람만 남고 나머지는 돌아가십시오. 오늘 밤 계엄군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원망스럽다. 이런 것들은 별로 없었어요. 기왕에 나는 죽겠다고 생각을 했고 … 당신들은 살아서 제대로 이야기해 주겠지. … 10년이 갈지, 100년이 갈지 그거야 모르지만 언젠가는 이 얘기가 나오것지. 그렇게 생각을 했죠. - 양인화, 당시 시민군

그다음 새벽이 이 글의 처음을 열었던, “우리를 잊지 말아 달라”는 처절한 외침 그리고 이어진 계엄군과 공수 부대의 무자비한 총격이다. 계엄군은 숨진 시민군들의 시체를 끌어내 확인 사살까지 했고 부상을 입거나 잡힌 시민들은 엎드리게 했다. 군인들은 땅바닥에 엎드린 시민들의 등을 군홧발로 쿵쿵거리며 밟았다. 등 뒤로 손이 묶인 사람들이 고개를 들려고 하면 곡괭이 자루로 내려쳤고 사람들은 굴비처럼 엮여 군부대로 끌려갔다. 열흘간의 항쟁이 끝났다.

새벽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책을 읽는 내내 시민들이 투쟁하며 걸었던, 그러다가 죽음을 맞이했던 거리 곳곳이 눈에 그려졌다. 광주의 중심가이고 대학가여서 자주 오갔던 익숙한 장소와 이름, 해마다 518 전야제를 하며 추모하고 애도하던 시민들의 모습, 망월동 묘역 등.

그날 새벽 도청 안에 남은 사람들 중에 공수 부대와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이 있었을까? 컴컴한 어둠이 걷히고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죽을 각오’로 끝까지 남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들이 없었다면 광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죽음으로 증명했다. 518은 폭동이 아니라 민중항쟁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꺼져 가던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이제는 ‘살아있는’ 우리의 손에 건네어졌다. 슬픔과 애도를 뛰어넘는 무언가를 위해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518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서사가 아니라, 역사를 기억하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순화하며 계승해 이어 나가게 하는 현재진행형 서사인 것 같다. 눈이 부시도록 맑고 푸르렀던 그날을 끝내 맞이하지 못하고 희생한 시민들과 여전히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모두에게 위로와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이제 우리가 함께 새벽을 넘어 찬란한 아침을, 우리의 오월을 맞이하자고.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해 끝까지 뭉쳐 싸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불의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를 남깁시다. 이 새벽을 넘기면 기필코 아침이 옵니다.” - 윤상원, 당시 시민군이자 대변인

“1980년 5월 그날, 광주의 날씨는 참 맑았습니다. 하지만 그날부터 시작된 계엄군의 폭력은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날을 몸소 겪은 사람들은 하늘이 맑아서 더욱 슬펐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 5·18기념재단 이사장 이철우, <책을 펴내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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