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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이 없다는 착각너울을 벗어버리고(고린도후서 3:12-18)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6.17 23:49
▲ 더불어 함께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가장 큰 걸림돌은 편견이 없다는 착각일지 모른다. ⓒGetty Images

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반복적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뜻대로 만드신 세상이 하나님 자신이 보기에도 참 아름다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았다’고 하시는 곳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자를 만드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여자를 만드신 것이 좋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보기에 안 좋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를 만드시고 사람이 함께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질서 안에서 사람들은 혼자 살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사는 사회를 이루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수도원입니다. 수도원은 세속을 떠나서 홀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서 신앙생활에 매진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생겼습니다. 그런 수사들을 영어로 몽크(monk)라고 부르는데, 그 몽크라는 말은 그리스어 모나코스(monachos)에서 왔습니다. 그 뜻이 ‘고독’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서 고독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이들과 어울려서 북적거리면서 살지 않고 하나님하고만 살겠다고 고독하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고독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역행할 수는 없어서, 고독한 사람들끼리 ‘홀로’ 있기 위해 ‘함께’ 모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하지만 그런 창조질서를 어기고 기어이 혼자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폐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 일본어로 히키코모리라고 하는 은둔형 외톨이들, 우울증이나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 등등. 그런 이들은 마음의 병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각종 범죄를 저지르거나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일을 저지른 사람들을 살펴보면,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고 혼자 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어떤 집사님이 전에 저에게 이런 말을 하셨어요. ‘목사님, 저는 친구들이 너무 많아서, 여기저기 오라는데도 많고 만날 일도 많아서 귀찮아 죽겠습니다. 이 친구들 등쌀에 못살겠습니다. 다 정리를 해야 되는데 그게 어렵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집사님, 행복하신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이 넘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분주하게 친구들 만나시고 이웃 사람들하고 교제하십시오. 창조의 질서를 잘 지켜가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울려서 분주하던 시간을 뒤로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고요하게 자기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실은 나만의 세상에서 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의 틀, 사고의 틀, 인식의 틀, 감각의 틀, 감정의 틀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틀을 구성하는 대표적인 것이 우리의 선입견입니다.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면, 나의 생각의 틀이 깨지는 것이 참 어려워집니다. 이런 선입견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대단하고 원대한 이념 이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에서 존재합니다.

사소하게는 음식에 대한 선입견이 있습니다. 제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인데요, 학교 앞에 분식점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파는데, 쫄면이 그렇게 맛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저희 아버지께서 ‘다른 건 몰라도 쫄면은 절대 사 먹으면 안 된다. 쫄면이 얼마나 위생적으로 안 좋고, 더럽고 나쁜 음식인지 모르냐?’ 그러시는 거예요. 저는 또 효자였던지라, 그 말씀에 순종해서 그 맛있는 쫄면을 한 번도 사먹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한 십 여 년 흐른 뒤에 우연히 아버지와 함께 식당에 갔습니다. 뭘 먹을까 생각하는데 옆 테이블에 앉은 사람이 쫄면을 먹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아버지께서 그 옆사람을 보시더니, ‘저건 뭐냐? 저거 맛있겠다. 나는 저거 먹을란다’ 그러시는 겁니다. 알고 봤더니, 저희 아버지는 분식집에서 파는 쫄면이 어떤 음식인지 모르셨던 겁니다. 쫄면이라는 이름만 듣고 왠지 ‘이상한 음식, 불량식품, 불결한 음식’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이런 선입견으로 똘똘 뭉쳐서 살아갑니다. 음식에 대한 선입견, 종교에 대한 선입견, 다른 문화에 대한 선입견, 사람에 대한 선입견 등등 수많은 선입견으로 뭉쳐 있는 것이 ‘나’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함께 살아라’ 하는 말씀의 본질은 ‘그런 선입견을 내려놓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상대방의 마음을 감싸고,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함께 어울려서 살아라’ 하는 것은 단순하게 물리적으로 공간적으로 심리적으로만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함께’라는 것은, 감정도 느낌도 이상도 이념도 욕망도 하나가 되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끌고 출애굽을 한 후에, 광야에서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백성들은 감히 두려워서 하나님을 마주 대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죽는다’라는 말로 그 두려움을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않도록, 대면하지 않도록, 그래서 내 죄가 드러나지 않도록, 내 죄에 진노한 하나님의 형벌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산 아래에 머물러 있고, 모세만 하나님을 만나러 산에 올라갑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에게 하나님의 영광의 자취가 남게 됩니다. 그의 얼굴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모세가 얼굴을 가린 너울은 원래는 하나님의 영광에 감히 다가갈 수 없음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 땅의 속된 것을 갈라놓는 상징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무렇게나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너울을 두고 새로운 해석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나서 얻게 된 영광이 차츰 사라져버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 수건을 덮어썼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백성들 사이에서 권위를 얻게 된 모세가 그 권위의 상징인 얼굴의 광채가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너울을 썼다는 것입니다. 나의 진실을 가리는 장치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가 실제로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모릅니다. 바울은 그가 직면하고 있던 시대의 상황을 모세의 너울을 끌어들여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안타깝게 생각한 것은 사람들끼리 마음을 닫아 놓고 있는 것, 하나님께도 마음을 닫고 만나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너울이 덮여 있다는 것입니다.

내 선입견으로 내 완고함으로 내 고집대로 하나님을 해석하려만 합니다. 내가 아는 하나님만 하나님이라고 고집합니다. 참 하나님을 만나려 하는 마음의 열린 자세가 없습니다. 내 지식으로 하나님을 판단합니다.

나의 본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의 진실을 보여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이해받기를 요구합니다. 남의 진실은 들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자기 진실이 외면당한다고 억울해 합니다. 나와 너를 가로막고 있는 그런 너울이 우리 사이를 겹겹이 둘러싸고 있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자유의 세상을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4.

바울은 너울을 벗어버려야 한다고 강변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그 율법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데에 골치 아파하지 말고, 그 안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영을 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만나라고 합니다.

그 만남 안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구속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내 고집과 내 오만함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화해와 참된 평화의 자유가 있습니다. 나와 너를 가로막은 너울이 벗겨질 때, 참된 너를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참된 나를 내어놓을 수 있게 됩니다. 이해하게 됩니다. 공감하게 됩니다.

내 존재를 감추어놓고 내 주장만을 일방적으로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를 열어놓고 상대방을 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선입견 뒤로하고, 너의 선입견 뒤로하고, 나의 판단 뒤로하고, 너의 판단 뒤로하고, 있는 그대로를 내어놓고 서로 만나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만남 속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그런 만남 속에 하나님의 영이 있습니다. 그런 만남 속에 참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잘잘못을 따지고,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은 뒤로 미루고, 조용히 상대의 입장이 되고 상대의 마음에 공감해 줍니다. 자연의 소리를 들어줍니다. 무엇을 아파하고 있는지, 왜 힘들어하고 있는지 들어줍니다. 사람의 소리를 들어줍니다. 왜 힘들어하는지, 무엇이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 그 어려움을 이겨내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세상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그 하소연들을 들어줍니다.

좋아요. 들어준다고 합시다. 일단 판단을 뒤로 미루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합시다. 그러면 뭐가 달라집니까? 어차피 판단해야 하는 것이고 어차피 결정해야 하는 것이고 어차피 처음의 상황으로 회귀하는 것 아닙니까?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들, 그래서 참 자유를 경험한 사람들의 판단은 선입견과 자기 주장과 자기 오만에 빠진 사람들의 판단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일의 판단에서처럼 수학공식처럼 누가 계산기를 두드리던지 똑같은 대답이 나오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판단에 이끌리면 온갖 선입견과 독단과 독선으로 가득한, 서로를 파괴하고 자기 자신의 욕심만을 채워가는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을 가진 자유한 자들의 판단에 이끌리면 참 자유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런 자유한 세상을 바울은 영광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같아지는 영광, 하나님처럼 사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세상을 내가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가 누릴 가장 큰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용기를 냅시다. 내 마음을 꽁꽁 덮어두고 있던 너울을 벗어버립시다. 힘든 일이겠지만 하나님이 내 손을 잡고 응원하시며 힘주시고 계십니다. 그 너울을 벗어버린 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자유를 맛봅시다. 내 곁에 있던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물들과 진정으로 화해하고 하나되는 경험을 합시다. 참된 사랑을 나누어주고 참된 사랑을 받는 가슴 벅찬 경험을 해봅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충만한 은혜를 체험합시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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