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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권세(왕하 25:1-7 롬 13:1-7 막 5:35-43)성령강림후 넷째 주일/6・25민족화해주일(6월25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6.23 00:53

1. 역사적 예수와 예수세미나

미국 서부 지역의 진보적인 신학자로 구성되어 ‘역사적 예수’를 연구하는 성서해석학 모임이 있습니다. 예수세미나(Jesus Seminar)라고 합니다. 1985년 30명의 신약성서 학자에 의해 시작되었고, 나중에는 200명이 넘는 이들이 참여했습니다. 이 연구의 성과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교회의 케리그마(교리)가 아니라, 예수의 언어와 행태에 뿌리를 두고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는 ‘예수의 비유’, ‘격언’, ‘지혜의 말씀’ 및 그의 ‘전복적 행위’에 있지 초대교회의 조직된 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서 해석학적으로 말하면, 복음서의 형태는 기록 당시의 교회가 처한 삶의 정황을 먼저 반영하지만, 그 속에는 교회의 정황과 상반되는 역사적 예수의 언어와 행동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세미나에 참여한 신학자들의 첫 작업은 신약성경을 현대 미국식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서의 문장들을, 현대의 독자들이 마치 1세기 사람들이 들었다면 받았을 것 같은 느낌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연구는 총 10년에 걸쳐 두 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처음 5년 동안인 1986년부터 1991년까지는 기원후 3세기까지의 그리스도교 문헌에서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알려진 약 1,500개의 자료를 분석하여 진정한 예수님의 말씀을 가려내는 작업이었습니다. 두 번째 5년 동안에는 예수님의 행적 중 후대에 편집되지 않은 원래의 것을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학자들은 기존에 알려진 4개 복음서와 함께 여러 문서를 함께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세미나에 참여한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으로 알려진 약 500개의 문장에 대해 구슬 투표를 통해 결과를 정리, 선정하였습니다. 구슬의 색깔은 빨강, 분홍, 회색, 검정으로 각각 점수를 부여하여 비밀투표로 진행하였습니다.

빨강 구슬을 받은 문장은 예수님께서 실제 한 말씀, 혹은 아주 비슷한 말일 경우이며, 분홍 구슬은 해당 문장이 아마도 예수님이 비슷한 말을 했을 것이라고 믿는 경우, 회색 구슬은 해당 문장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아니겠지만, 예수님의 생각을 담고 있다고 믿는 경우입니다. 검정 구슬은 해당 문장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며, 후대의 추종자나 다른 전승에서 온 경우입니다. 우리 성경 복음서에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빨강색으로 표시를 해놓았는데, 신학자들은 신학적인 작업을 통해 이렇게 세분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모든 세미나 참석자는 문장 한 개에 한 개씩의 구슬로 비밀투표를 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연구가 발표되었습니다.(미주 1) 특히 이 예수 세미나는 미국 ABC 방송사의 <예수를 찾아서(The Search for Jesus)> 등을 통해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2. 세 종류의 바울?

▲ 『첫 번째 바울의 복음』 책과 저자인 마커스 보그와 도미닉 크로산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세미나 회원 가운데 성공회 신부인 마커스 보그와 신부였지만 학문과 결혼의 자유를 얻기 위해 환속한 신부 도미닉 크로산은 바울에 관해서도 비슷하게 연구했습니다. 이들이 공동으로 저술한 『첫 번째 바울의 복음』(한국기독교연구소, 2010)은 바울 서신의 저자를 3종류로 구분합니다. ‘급진적인 바울’, ‘반동적인 바울’, 그리고 ‘보수적인 바울’이 그것입니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보그&크로산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 세 종류의 바울

“우리는 7개의 진정한 편지(롬, 고전, 고후, 살전, 갈, 빌, 몬)를 쓴 바울을 급진적인 바울(radical Paul)이라 부른다. 3개의 목회서신(딤전, 딤후, 딛)의 바울을 반동적인 바울(reactionary Paul)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 편지들의 저자가 바울의 메시지를 단순히 발전시킨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점들에서 바울의 메시지에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 (반동적인 바울은) 바울의 사상을 당시의 관습들에 강력하게 조화시키고 있다. 급진적인 바울과 비교해서, 논쟁적인 편지들(엡, 골, 살후)의 바울을 우리는 보수적인 바울(conservative Paul)이라 부른다.”

따라서 로마서는 급진적인 바울에 해당하는 바울의 진정한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어떻게 급진적인 바울이 권세들에 복종하라는 말을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기억하시겠지만, 고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관철하려고 했을 때, 당시 총리였던 김종필 씨가 오늘 본문을 언급하면서 국가 권력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기 때문에 교회가 협조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2017년 촛불집회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순실 게이트와 박근혜 대통령 탄핵, 그리고 여기에 큰 역할을 한 ‘촛불집회’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로마서 13장’이 논쟁거리가 됐습니다. 특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라는 1절을 놓고 한동안 갑론을박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였지만, 로마 제국으로부터 핍박받는 처지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매우 중요한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물론, 그리스도교인들의 삶에 관해 성경은 하나의 관점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권세에 관한 말씀인데, 로마서 말씀을 통해서는 제대로 된 권세는 복종하고, 구약 말씀을 통해서는 잘못된 권세는 저항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정한 권세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바로 사망을 이기시고, 생명을 살리시는 예수님의 권세야말로 우리가 복종하고 순종해야 할 권세라는 것입니다. 먼저 로마서 말씀부터 볼까요? 제대로 된 권세에 관한 말씀입니다.

3. 제대로 된 권세,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름이니 거스르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 13:1-2)

성서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구절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예수세미나 신학자들처럼 생각한다면 이것은 바울의 말이 아니라, 보수적인 바울, 혹은 반동적인 바울의 보충 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상황과 바울의 선교 처세술로 보아 저는 이 본문도 바울의 원래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출신으로 20세기 현대 복음주의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학자로, 20세기 최고의 설교가로 손꼽히는 존 스토트 목사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이 본문을 주석하면서 먼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관해 네 가지 정도로 정리합니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기독교가 생겨난 이래 수십 세기에 걸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유명하고, 매우 단순하게 말한다면 국가가 교회를 통제한다는 ‘국가 만능론’, 교회가 국가를 통제한다는 ‘신정’, 국가가 교회에 호의를 베풀고 교회는 그 호의를 계속 받기 위해 국가의 편의를 도모하는 타협안인 ‘콘스탄틴주의’, 그리고 교회와 국가가 건설적 협력 정신으로 하나님 주신 각자의 독특한 책임을 인정하고 격려하는 ‘동반자 관계’ 등 네 가지 주요 모델이 시도되어왔다.”

▲ 20세기 최고의 설교가로 손꼽히는 존 스토트 목사

특히 존 스토트 목사는 해당 구절의 설명에 앞서 배경을 설명하고 있는데, 가령 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닐 네 가지 기본적인 관계, 즉 하나님과의 관계(1-2절), 우리 자신과의 관계(3-8절), 서로와의 관계(9-16절), 원수와의 관계(17-21절)를 전개했고, 13장에서는 이에 더해 국가와의 관계(성실한 시민이 됨, 1-7절), 율법과의 관계(8-10절), 주의 재림의 날과의 관계(‘이미’와 ‘아직’ 사이의 삶, 11-14절) 등 세 가지 관계를 소개하고 있다고 해설합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교회와 국가의 관계 가운데 네 번째 관계가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바울의 가르침과 가장 일치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존 스토트 목사의 말처럼 성실한 시민으로 교회가 국가와 건설적인 협력 정신으로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제대로 된 행위를 요청합니다. 이어지는 본문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3-4)

그리스도인이 혹은 교회가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면 국가가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심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롬 13:5).”라고 합니다. 특히 양심에 따라 국가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롬 13:5-7)

조세와 관세를 받치고 국가 권력을 두려워하고 권력자를 존경하라고 합니다. 물론 존경할 자일 경우를 말합니다. 사실 바울이 로마서를 쓸 당시에는 그리스도교 국가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한 소종파였고, 이제 막 생긴 신흥 종교였습니다. 특히 바울은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는 지역에 복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로마의 권세에 저항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특히 로마에 있는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쓴 편지인 로마서에서는 교회와 국가가 서로 다른 역할을 지니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국가 양자에 대해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도 이렇게 말합니다,

“당시의 국가는 로마나 유대 당국이었고 대체로 교회에 대해 비호의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이었지만,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이 설립하셨다고 간주했고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에게 순종하고 그들과 협력하도록 요구하셨다고 봤다.”

더욱이 존 스토트 목사는 국가는 신적 권위를 가진 신적 기관이고, 그리스도인들은 무정부주의자나 파괴 분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순종과 협력이 히틀러나 스탈린, 후세인 같은 지도자, 혹은 권력에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고도 말합니다.

“바울의 말은 (예수님과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신약 시대의 칼리쿨라, 헤롯, 네로, 도미티아누스와 같은 모든 사람 그리고 우리 시대 독일의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 우간다의 독재자 아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같은 모든 사람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그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지셔야 하거나 혹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들의 권위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여길 수는 없다.”

특히 존 스토트 목사는 앞서 언급했던 김종필 씨의 예처럼, “성경이 관원들에게 전제 정치를 개발하도록 그리고 무조건적 순종을 요구하도록 백지 위임장을 준 것처럼 끊임없이 잘못 적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도 덧붙이며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는 국가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을 유발하기 전까지만 복종해야 한다. 국가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명하거나 하나님이 명하시는 것을 금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명백한 의무는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는 것! 곧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국가에 불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국가의 권위에 굴복해야 하지만, 그 권위는 특별한 목적 그리고 전체주의적이지 않은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 복음은 폭군과 무정부주의자 모두에게 똑같이 적대적이다.”

그렇다면 저항해야 할 권력과 권세는 무엇인가요? 오늘 구약 말씀이 바로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바로 시드기야 같은 왕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4. 저항해야 할 권세, 두 눈 뽑혀 결박당해 바벨론으로 끌려가다!

“시드기야 제구 년 열째 달 십 일에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그의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그 성에 대하여 진을 치고 주위에 토성을 쌓으매, 그 성이 시드기야 왕 제십일 년까지 포위되었더라. 그 해 넷째 달 구 일에 성 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떨어졌더라. 그 성벽이 파괴되매,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만 길로 도망하여 갈대아인들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그가 아라바 길로 가더니, 갈대아 군대가 그 왕을 뒤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서 그를 따라잡으매, 왕의 모든 군대가 그를 떠나 흩어진지라.”(왕하 25:1-5)

고대 근동의 패권자인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2차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서 포로들을 잡아갑니다. 1차 때는 다니엘과 세 친구가 잡혀갔고, 2차 때는 에스겔과 모르드개가 잡혀갑니다. 이때 그 당시 유다 19대 왕이던 여호야긴도 잡혀갑니다. 느부갓네살은 여호야긴을 잡아가면서 꼭두각시 왕을 세우는데, 그가 바로 여호야긴의 숙부이며 요시야 왕의 또 다른 아들인 맛다니야입니다(왕하 24:17). ‘여호와는 의이시다’라는 시드기야라는 이름으로 바꿉니다. 유다의 20대 왕이자, 마지막 왕입니다. 요시야의 셋째 아들로서 18대 여호야김의 이복형제이기도 한 시드기야는 11년간 유다를 통치합니다(왕하 24:18).

▲ 요사야 왕의 족보와 끌려가는 시드시야

아무튼 이러한 민족의 위기 상황 속에서 왕이 된 시드기야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전 왕들처럼 계속 악을 행했습니다. 또한 잘못된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여호야김이 그랬던 것처럼, 시드기야도 애굽을 믿고 바벨론에 대적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때 활동한 유명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바로 예레미야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대적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오히려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두어버립니다(렘 32:2-5). 결국 느부갓네살이 세 번째 침공하여 유다를 멸망시켜버립니다. 말씀을 볼까요?

“그들이 왕을 사로잡아 그를 립나에 있는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그들이 그를 심문하니라. 그들이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그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그를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갔더라.”(왕하 25:6-7)

이렇게 어리석고 잘못된 권세는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물론 나라만 망할 뿐만 아니라, 권력자 자신도 두 눈이 뽑히고 놋 사슬로 결박되어 포로가 될 것입니다. 최근 ‘중국 혐오’ 분위기가 장난이 아닙니다. 우리 외교가 ‘친미 반중’으로 노선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2023년 5월21일 일본 히로시마 G7 정상회의 종료 직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이런 말을 합니다. “미국·중국 관계가 ‘아주 조만간 해빙(thaw very shortly)’되기 시작할 것으로 믿는다.” 최근 미-중 반도체 전쟁 등 지난 수개월 동안 양국 갈등의 심화 과정을 보면, 이 발언은 생뚱맞기 짝이 없습니다.

▲ 2022년 11월 14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 참석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양국은 다투면서 대화도 한다. ⓒ연합뉴스

최근에 자주 등장하는, 미·중 관계에서 유행하는 말이 ‘디커플링(탈동조화)’과 ‘디리스킹(위험관리)’입니다. 디커플링은 트럼프 시대에 유행했던 용어입니다. 중국의 공급망을 미국 및 세계에서 분리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디리스킹’은, 미국 경제가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리스크)을 방지하겠다는 뜻입니다. 가령 미국이 향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반도체나 재생에너지 장치 등의 비중이 지나치게 커지면, 중국이 정치적 목적으로 해당 제품의 공급을 끊어 미국 경제를 마비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디커플링’이 중국 경제를 고립시켜 주저앉히겠다는 공격적 의도를 표현하는 반면, ‘디리스킹’은 ‘발생할 수 있는 피해를 차단한다’라는 방어적인 의미입니다.

현재 미국은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디리스킹에서 디커플링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주 어리석은 외교 정책입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고, 이전 ‘동북아 균형자 역할’에서 이제 ‘신냉전의 문을 연 이상한 세례 요한’이 된 것입니다. 결국 한 민족과 나라의 운명이 어리석은 권세, 무지한 권력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성경은 이러한 잘못된 권세와 권력에는 저항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권세는 무엇인가요? 오늘 복음서 말씀이 그 진정한 권세를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5. 진정한 권세,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 외에 아무도 따라옴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회당장의 집에 함께 가사, 떠드는 것과 사람들이 울며 심히 통곡함을 보시고,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막 5:35-40a)

지난주 말씀에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이 죽어가자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집으로 가는데, 예수님을 둘러싼 무리로 인해 좀처럼 속도를 내기가 어려웠고, 또 도중에 혈루증 여인이 끼어드는 바람에 예수님은 아예 발걸음을 멈추시고 말았습니다. 이때 야이로의 딸이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전갈이 옵니다. 실망하고 낙담한 야이로, 이제 예수님을 모시고 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이요, 흑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조문하러 가신 것이 아니고,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가셨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통곡 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보시고,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비웃습니다. 진정한 권세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 소녀를 찾아오신 예수님

“예수께서 그들을 다 내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가 열두 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막 5:40b-43)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는 자들을 향하여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소녀가 다시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잠을 자고 있다면 더 이상 슬퍼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을 잠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사망(死亡)’이라고 합니다. 죽을 사, 망할 망자입니다. 죽어서 망했다는 뜻인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죽으면 사망이라고 하지 않고 세상을 달리했다는 ‘별세(別世)’, 혹은 하늘로 부름을 받았다는 ‘소천(召天)’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권세이신 예수님은 사망 권세를 이기십니다. 열두 살 어린아이(12라는 완전수로 보아 전체 어린아이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요?)를 죽이는 어둠의 권세,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여성을 고생하게 만드는 사회 시스템(역시 12라는 숫자로 보아, 전체 여성들을 뜻하는 것은 아닐까요?)의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생명을 살리십니다.

입시 전쟁으로 인해 절망과 낙심에 빠진 아이들에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라고 위로하십니다. 고통받는 여성, 소외된 여성, 차별받는 여성, 병든 여성을 일으켜 세우십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불의한 권세와 시스템에 의해 핍박과 고통을 받는 이들은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살아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결코 죽은 것이 아니고, 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이 없는 이들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것입니다. 그들은 진정한 권세를 따르지 못하고 잘못된 권세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우리 남부산용호교회 75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이곳 용호동에서 가장 오래된 어머니 교회인 우리 교회의 지금 모습은 어떤가요? 교회의 성장이 끝나고 종교의 위기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시대입니다. 예레미야 때와 같이 우리 민족과 조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잔입니다. 이념적으로 갈라지고, 세대와 세대가 소통하지 못하고, 양극화 현상은 더욱더 심각해져 갑니다. 낡은 가치관에 매달려 새로운 세대들을 포용하지 못해 소멸하여 가고 있습니다. 이제 앞으로 써가야 할 우리 교회의 역사는 잘못된 권세에 저항하고, 제대로 된 권세, 진정한 권세에는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1) John Dominic Crossan, The Historical Jesus: The Life of a Mediterranean Jewish Peasant; 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 N.T. Wright, The Challenge of Jesus: Rediscovering Who Jesus Was and Is; Jesus and the Victory of God; Bart D. Ehrman, Jesus: Apocalyptic Prophet of the New Millennium; Marcus J. Borg, Jesus: A New Vision; James K. Beilby (ed), The Historical Jesus: Five Views; Richard Bauckham, Jesus and the Eyewitnesses: The Gospels as Eyewitness Testimony.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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