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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관대하십니까요나의 기적, 그 낯선 경험(요나서 4:1~1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6.27 22:00

요나서는 성서 안에서 독특한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일종의 전기적 소설로서, 다른 예언서들이 예언자의 선포를 중심으로 하는 반면 예언자의 행적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주전 8세기 아시리아 제국 전성기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사실은 주전 5세기 전후 곧 포로기 이후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종교적 분리주의 또는 배외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에 그와 대립되는 보편주의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열왕기에 보면 아밋대의 아들 요나 예언자에 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열하 14:25). “하맛 어귀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국토를 회복하여 주실 것이라는 선포의 주인공으로 언급됩니다. 역사적으로 자국 영토의 회복을 예언한 주인공의 행적을 통해 거꾸로 악의 제국으로 여겨진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백성이 구원받는 이야기를 전하는 요나서의 설정이 흥미롭습니다. 이 설정 자체로 요나서는 사람들의 상식과 편견을 뒤집는 중대한 메시지를 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요나서는 예언자의 선포를 중심으로 하는 예언서들보다 오히려 예언의 성격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른 예언자들의 선포는 대개 그대로 실현되지만, 요나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오히려 요나의 예언은 성서 예언의 진정한 뜻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언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인데, 대개는 회개하지 않아 심판의 선언이 현실이 됩니다. 반면 요나서의 예언은 그 목적대로 회개를 불러 일으켰고, 따라서 심판의 선언이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예언의 근본 뜻이 이뤄진 것입니다.

1년 전에 우리는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여 재앙을 면하는 대목을 함께 나눴습니다. 본문말씀은 그에 이어지는 것으로, 악의 도성으로 여겨졌던 니느웨가 재앙을 면하는 것을 보고 불평을 쏟아내는 예언자 요나와 하나님의 대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요나서의 결론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는 대개 기억하고 있겠지만, 다시 한 번 그 줄거리를 환기해볼까요?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아시리아의 도성 니느웨로 가서 예언을 선포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배를 타고 정반대 방향인 스페인 다시스로 향합니다. 풍랑으로 바닷물에 빠진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을 지내면서 돌이킨 후 다시 세상으로 나옵니다.

돌이킨 요나를 보고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서 예언을 선포할 것을 다시 명하십니다. 그 명을 받은 요나는 니느웨로 향합니다. 요나는 그 사흘길이나 되는 도성에 당도하여 딱 하룻길을 걸으며 예언을 선포합니다. “사십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 그 한마디였습니다.

그 예언을 받은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참회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금식을 하고 베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아서 참회하였습니다. 아시리아의 왕은 선포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그들이 뉘우치는 것을 본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리기로 했던 재앙을 거두어들입니다.

본문말씀은 바로 이 대목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요나는 그 일이 못마땅하여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항변합니다. 여기서 그가 아시리아 니느웨가 아니라 스페인 다시스로 달아난 이유도 분명히 밝힙니다. 니느웨가 벌을 받지 않고 재앙을 면하는 게 마땅치 않아서입니다. 그렇게 불평하는 요나와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대비됩니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는 분이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실 것임을 내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4:2b~3).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한없는 사랑을 베푸셔서 내리시려던 재앙마저 거두신다는 고백은 진실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 요나의 입장에서는 그 하나님에 대한 불만이요 조롱과도 같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격한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함을 보고도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바로잡으려는 의지가 털끝만큼도 없는 요나의 태도입니다. 보편적 사랑이야말로 모든 인간들 가운데 실현되어야 할 마땅한 도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 이해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자기만의 편견과 아집을 극복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일깨워줍니다.

그렇게 불평하며 니느웨 성이 정말 어찌 되나 지켜보고 있는 요나의 초막 위로 박넝쿨이 자랍니다. 그 박넝쿨이 만들어준 그늘 때문이 요나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벌레 한 마리가 박넝쿨을 갉아 먹어버렸습니다. 박넝쿨이 시들자 그늘은 사라지고 찌는 듯한 더위로 요나는 기진맥진해졌습니다. 요나는 다시 불평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습니다.”

그렇게 불평하는 요나를 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4:11~12)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는 요나의 태도는 사람의 편견이 얼마나 완고한 것인지 되돌아보게 해줍니다. 더욱이 자기만의 세계관과 그에 따르는 독선적 편견이 신앙의 논리로 뒷받침되었을 때 그것을 쉽사리 떨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완고함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저버리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해 타인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사람의 태도를 꼬집어줍니다.

▲ Matthäus Merian, 「Jona unter dem Kürbisbaum」 ⓒGetty Images

본문말씀은 그 완고함을 질타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요나가 다시 어떤 태도를 보여주었는지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후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그리고 이슬람의 전통에서 요나가 거듭남의 전형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을 통해 미루어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요나의 기적’(마태 12:38~42; 마가 8:11~12; 누가 11:29~32) 밖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이 함축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자기 세계에 갇혀 자기에게 유리하고 불리한 것에만 몰입해 있던 요나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보편적인 구원의 세계에 눈을 돌린 사건, 그것이 요나의 기적입니다.

그것은 요나의 세계관의 변화를 뜻할 뿐 아니라 세계 자체의 변화를 뜻합니다. 요나서가 역설하고 있는 것은 그 변화가 가능하다는 희망입니다. 요나서는 그렇게 변화가 이뤄지면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의 행적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자기만의 믿음이 옳다고 생각하며 타인을 정죄하는 태도에 경종을 울리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진정한 구원의 세계를 바라볼 것을 촉구합니다. 나에게 이롭고 불리함, 나에게 좋고 나쁨을 넘어 모든 사람에게 진정한 생명과 자유를 보장하는 길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대가 하고자 꾀하고 있는 것이 동시에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도록 행하라!” 칸트가 말했던 유명한 정언명령은 일찍이 성서의 세계 안에서 이렇게 싹트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만 행동하면 세계는 갈등과 불화, 고통 속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습니다. 끊임없는 욕망의 각축과 갈등, 고통만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내가 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통할 수 있도록 한다면, 그렇게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서로 행한다면 세상은 정의롭고 평화로워집니다.

오늘 우리는 자기주장만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대의와 명분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버렸고 적나라한 이해관계의 논리가 국가의 공공정책으로까지 내세워지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벌거벗은 권력의지가 아무런 제동장치 없이 관철되고 있고 그 가운데서 사람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일말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감각이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공공정책과 공직자를 통해 표출되고 있으니, 갈등은 심화되고 사회적 불안은 높아만 갑니다.

강대강의 논리로 상대를 압박하는 논리는 남북관계를 파탄냈습니다. 오늘 한국전쟁 73주년을 맞고 있지만, 아직도 정전협정은 평화협정으로 대체되지 않았습니다. 평화를 위한 그간의 노력은 허사가 되었고,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고 있습니다.

같은 논리로 국제관계마저 긴장상태에 처했습니다. 국익만을 앞세우는 것도 낯부끄러운 일이지만, 국익을 앞세우면서도 오히려 국익의 손상을 가져올 것이 뻔한 외교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을 어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합니다. 상대를 생각하지 않는 자기만의 독단이 빚어내는 불행한 사태입니다.

우리나라는 외국인에게도 일부 참정권을 인정하는 선진적인 제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를 허물고 뒷걸음치려는 시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3년 이상 영주권을 갖고 있는 외국인에게 지방선거 참정권을 부여하고 있는 제도입니다. 이는 국적에 상관없이 사회 구성원의 동등한 자격을 인정하는 바람직한 제도이며, 그 밑바탕은 세계시민의 정신입니다.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마태 7:12). 그 뜻과 같이, 재일동포의 참정권을 보장하도록 촉구하는 의미에서 선제적으로 채택한 제도입니다. 이제 와서 특정 국가를 겨냥하며 상호주의에 어긋난다고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사회가 선취한 보편적 가치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1% 소수자의 권익 때문에 99% 다수자가 피해를 입어야 하느냐는 공직자의 발언은 정의와 인권에 대한 감각의 결여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소수자의 권익과 다수자의 권익은 대등한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회적 강자와 다수자의 권익만을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질서 안에서 소수자가 차별과 피해를 겪기 때문에 불가불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소수자의 인권이 요구된 것입니다.

인권의 요구는 그렇게 항상 사회적 약자 및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에서부터 보편적 권리로 확장되어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난한 사람과 약자에 먼저 관심을 기울인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사회의 불완전성, 인간 삶의 불완전성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의 카르텔은 ‘정상’으로 여기면서, 약자들의 연대는 ‘담합’이요 ‘협박’으로 ‘민폐’인 듯 몰아치는 사회는 결코 정의롭고 평화로운 사회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교회가 해야 할 몫이 무엇이겠습니까?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바로 그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교리의 정당성, 자기 신앙의 정당성을 내세워 차별과 혐오의 논리를 펼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지켜온 신념을 뒤흔드는 사태를 목격하고 경험할 때 당황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실현되는 것을 보고 오히려 조롱하며, 자기 신념을 포기하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은 요나뿐만 아닙니다. 진실을 투명하게 인식할 수 없고 불공평한 세계 가운데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갖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상식과 편견을 벗어버릴 때 비로소 진정한 구원의 세계에 이른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그 답을 찾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과연 모든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가, 하나님께서 그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 헤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답의 실마리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진실을 깨달아 알고 우리 삶 가운데 실현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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