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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후미에(踏み絵)’는 있다”엔도 슈사쿠의 《침묵》 안에서 목소리를 듣다
정리연 | 승인 2023.07.15 01:11
▲ 엔도 슈사쿠의 《침묵》과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수년 전, 나가사키에서 처음 후미에를 봤을 때부터 이 소설은 조금씩 모양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랜 병상에서 나는 마멸된 ‘후미에’에 새겨진 그리스도의 얼굴과 그 옆에 거무스름하게 찍힌 발자국을 몇 번이고 마음속에 떠올렸다. 배교자이기 때문에 교회도 말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역사에서도 말살된 인간을 그러한 침묵 속에서 되살아나게 하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의 마음을 거기에 투영하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동기다.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중에서

​일본의 대표적 소설가 엔도 슈사쿠. 여러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 적이 있다. <침묵>은 종교소설과 세속소설의 차이를 무너뜨린 20세기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작가의 대표작이다. 작가는 자신의 많은 작품 중에서 <침묵>과 <깊은 강> 두 권을 관에 넣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만큼 특별했나 보다.

<침묵>은 그에게 다나자키 상을 안겨 준 것으로 오랫동안 신학적 주제가 되어 온 “하나님은 고통의 순간에 어디 계시는가?”라는 문제를 17세기 일본의 기독교 박해 상황을 토대로 진지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신앙을 부인해야만 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고민하는 인물들에 대한 심리 묘사가 치밀하고 박진감 있어서 몰입도가 높다.

얼마 전에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포이에마, 2018)를 읽었는데, 작가가 1966년에 대중을 대상으로 강의했던 내용을 엮은 책이다. 거의 60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고리타분하지도 않았고 새롭고 신선했다. 강의 중에 <침묵>에 관련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어서 오래전 읽고 잊어먹었던 책을 다시 꺼내어 보았다.

소설은 ‘기리시탄’(포루투갈어로 ‘그리스도교’를 뜻하는 ‘크리스탕cristao’에서 유래한 말) 시대-일본에 신자가 약 40만에서 60만 명이나 생겼었다-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가톨릭 박해가 진행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일본에서 강제 퇴거를 당했는데, 농민으로 변장한 채 포교를 계속하거나, 산속에 숨어지내면서 신자들과 연락을 지속하기도 했다.

이 잠복 시대에 포루투갈 리스본 출신인 ‘페레이라’라는 사제가 있었다. 당시에는 비행기나 제대로 된 배가 없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고아에 도착해서 다시 마카오로 가야 했다. 거기에서 중국의 정크 같은 범선을 타고 일본으로 갈 수 있었다. 페레이라도 이런 험난한 길을 뚫고 일본으로 선교를 간 신부 중 한 명이었다.

페레이라 신부는 지금 일본 어딘가에 살아 있다. 맑고 푸른 눈과 온화하고 부드러운 빛을 얼굴에 가득 담고 있던 페레이라 신부의 인자한 모습이 일본인들의 잔인한 고문으로 지금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토록 인자한 신부의 얼굴 위에 굴욕으로 일그러진 도 다른 표정을 상상한다는 것은 그들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페레이라 신부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 인자함을 버렸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로드리고와 그의 동료는 어떻게든 일본에 잠복하여 페레이라 신부의 존재와 운명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마 교황청에 페레이라 신부가 나가사키에서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배교를 맹세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페레이라에게 신학 교육을 받고 그를 존경하던 젊은 사제들은 그의 배교를 믿을 수 없었다.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었다. 일본인의 교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전제가 있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세바스티앙 로드리고’가 이 중의 한 명이다. 우여곡절 끝에 동료 ‘가르페’와 함께 일본의 한 항구 마을에 밀입국할 수 있었다. 이때, 마카오에서 이들을 신자들이 사는 마을까지 인도해 줄 일본인 ‘기치지로’를 만나게 된다. 술에 취해 있는 데다가 매우 교활한 눈빛을 가진 남자였다. 이를 믿어도 될까?

기치지로가 상황을 알아볼 때까지 모래사장의 움푹 팬 구덩이에 가만히 숨어 있었습니다. … 누군가가 횃불을 내밀자 몸집이 작은 한 노인의 추한 얼굴이 그 불빛 속에 검붉게 떠오르고 … “파드레, 파드레” 노인이 십자를 긋고 중얼거렸는데, 그 음성에는 저희를 위로하는 다정함이 있었습니다. 파드레(신부님)라는 이 그리운 포르투갈어를 여기서 듣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 그들은 일본인 신도였습니다.

로드리고와 가르페는 지도자 없이, 죽음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몰래 신앙을 지키고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산속 움막집에 숨어서 그들의 고해성사를 해주고 함께 기도하면서 신앙을 지도했다. 그러다가 관리들이 쳐들어와 마을 사람 몇을 잡아가 심문하고 고문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성화에 침을 뱉고 성모는 남자들에게 몸을 맡겨 온 매음녀라고 말해보라고 했습니다. … 관리의 심한 재촉에 결국 모키치의 눈에서 하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이치소우도 고통스럽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이것으로 두 사람은 결국 자신이 가톨릭 신도라는 사실을 몸 전체로 자백해 버린 것입니다. 기치지로만이 관리의 협박에 괴로운 듯이 성모를 모독하는 말을 토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성화 위에 씻을 수 없는 굴욕의 침을 뱉었습니다.

결국, 모키치와 이치소우는 수형을 당한다. 십자가 모양으로 만든 나무가 파도에 밀리는 물가에 세워졌고 그들은 거기에 묶였다. 밤이 되어 조수가 밀려오면 두 사람의 몸은 목까지 바다에 잠기겠지만 바로 죽지는 않는다. 이틀이나 삼 일 후, 육체도 마음도 극도로 지쳐 버렸을 때 숨이 끊기게 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짐승이 우는 듯한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농민들은 온몸을 떨면서 울었습니다. 오후가 되어 또다시 조수가 조금씩 밀려들자 바다는 그 검고 차디찬 빛을 더해가고 나무기둥은 그 속에 차츰 가라앉아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순교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순교일까요? … 일본 신도의 순교는 그와 같은 혁혁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비참하고 이렇게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아아, 바다에는 비가 쉴 새 없이 계속 내립니다. 그리고 바다는 그들을 죽인 다음 더욱 무서우리만치 굳게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로드리고는 여전히 바다는 어둡고 단조롭기만 한 소리를 내면서 철썩이고 있다는 변함없는 사실이 참을 수 없었다. 바다의 무서운 적막함 위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느꼈다. 비애에 빠진 인간들의 소리에 하나님이 아무런 응답도 없이, 다만 말없이 침묵하고 계시는 듯한 그런 느낌을. 은밀하게 신앙을 지키고 있던 일본 신자들로 인해 희망을 느꼈던 로드리고는 배신과 회개를 반복하던 기치지로의 밀고로 결국, 붙잡히고 만다.

▲ 후미에(踏み&#32117;)는 일본의 에도 시대에 에도 막부가 금지령을 내렸던 기독교 신자(기리시탄이라고 함)을 색출해내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또는 거기에 사용했던 목조판 또는 금속제의 판을 말한다. 수년간 사용되었기 때문에, 마모되어 많이 마모되었다. ⓒhttps://ja.wikipedia.org/wiki/%E8%B8%8F%E3%81%BF%E7%B5%B5

“저는 신부님을 전부터 쭉 속여 왔습니다. … 저는 성화도 밟았습니다. 네, 밟고말고요. 모키치나 이치소우는 강하지요. 나는 그렇게 강하지 못한 걸 어쩝니까?”

“그렇지만 제게도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밟은 자에게도 밟은 자로서의 할 말이 있어요. 성화를 제가 즐거워서 밟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밟은 이 발은 아픕니다, 아파요. 나를 약한 자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 강한 자 흉내를 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건 억지이고말고요.”

“신부님, 그러면 저 같은 겁쟁이는 어떻게 하면 좋단 말입니까? 돈이 탐나서 그때 신부님을 고소한 건 아닙니다. 나는 다만 관리들에게 협박받았을 뿐입니다.”

“저는 배교자죠. 그렇고말고요. 그렇지만 10년 전에 태어났다면 선량한 가톨릭 신도로서 천국에 갔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배교자로서 신도들에게 멸시받지 않아도 되었겠지요. 그러나 박해받을 때 태어났기 때문에 … 원망스럽습니다. 저는 원망스럽습니다.”

로드리고를 신고한 후에도 기치지로는 끈질기게, 신부가 끌려가는 곳마다 뒤쫓아온다. 거지꼴을 하고 고약한 악취를 풍기면서 회심을 하겠다면서 감옥에 갇힌 로드리고에게 고해를 받아달라고 한다. 인간 중에서도 가장 추악한 인간까지 그리스도는 찾아 구원하셨던 것일까?

기치지로의 배교와 배신은 정말이지 비겁했다. 자신의 행동을 음흉한 변명으로 감싸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껏 비난할 수 없었다. 내가 저자라고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치지로처럼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후미에를 밟지 않을, 신자를 밀고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 나 역시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주의 용서와 자비, 구원을 구해도 될까? 그리스도는 누더기처럼 더러운 인간을 찾아 구하셨다는 성경을 갖다 대면서. 그리스도는 돌을 맞은 창녀나 가버나움의 혈루병 여인처럼 매력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은 존재들을 찾아다니셨지 않은가. 색 바랜 누더기처럼 되어 버린 인간과 인생을 버리지 않고 다정한 눈으로 긍휼히 여겨주시는 분이 그리스도이다.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성화를 밟지 않고 참혹한 죽음의 길을 걷는 순교자들. 반면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내세워 주저 없이 성화를 밟고, 괴로움으로 방황하는 기치지로. 이들을 지켜보면서 로드리고는 깊은 고뇌와 회의에 빠진다.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으로 바닷속으로 무참히 가라앉는 농민들.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바다는 여전히 잠잠하고 새는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하나님은 계속 침묵을 지킬 뿐이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한단 말인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로드리고는 깊은 고민에 빠진다. 인간들을 위해 죽으려고 이 나라에 왔던 것인데, 사실은 일본인 신도들이 자기 때문에 잇달아 죽어갔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교리에서 배운 행위란, 이것이 옳고 이것이 나쁘고 이것이 선하고 이것이 악하다는 식으로 정확히 구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가 수긍하지 않는다면 일본인 신도들은 바다에 돌처럼 내던져진다. 하지만 관리들의 유혹에 따른다면 그의 생애에서 좌절을 의미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로드리고는 감옥에 갇혀 성화를 밟고 배교를 강요당하는 일본인들을 만난다. 일본인 신도들은 계속 죽이면서 로드리고는 건드리지 않는 배교 전문가 이노우에. 언덕 위로 끌려간 로드리고는 헤어졌던 가르페가 결박당한 채 끌려가는 모습을 그리고 배교를 유혹당하지만 거부하고 바다에 던져진 일본인 신도들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든 가르페가 목숨을 잃는 모습을 본다. 바다는 한없이 넓고 슬프게 펼쳐져 있었지만, 그때도 하나님은 바다 위에서 완고하게 계속 침묵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하나님이 없다면 수없이 바다를 횡단하여 이 작은 불모의 땅에 한 알의 씨를 가져온 자신의 반생은 얼마나 우스꽝스럽단 말인가. 만약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매미가 울고 있는 한낮, 옥이 잘린 애꾸눈 사나이의 인생은 우스꽝스럽다. 헤엄치며 신도들의 작은 배를 쫓은 가르페의 일생도 우스꽝스럽다.

어둡고 더러운 감옥으로 끌려간 로드리고는 벽에서 “LAUDATE EUM(찬양하라, 주님을)”라는 라틴어 문구를 발견하고 마지막까지 신앙의 열정을 가졌던 누군가로 인해 힘을 얻는다. 그러다가 자신은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르는 어둠의 골짝에서, 중대하고 고독한 밤을 보내고 있는데, 밖에서 크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관리에게 갑자기 화가 치민 로드리고. 하지만 그것은 코 고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라틴어 기도문을 벽에 새긴 사람도 알게 되었다.

“저것은 코 고는 소리가 아니오.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고 있는 신도들이 내는 신음소리요. 벽 어딘가에 … 내가 새긴 문자가 있을 텐데, LAUDATE EUMPUN, 그것이 지워지지 않았다면, 아마 오른쪽 벽 … 그렇지, 한가운데쯤에 있지. 만져 보지 않겠나? 이곳에서 나는 자네와 마찬가지로 …”

페레이라는 한 마디 한 마디 끊어 가며 말했다.

“여기에 나는 자네와 마찬가지로 갇혀 있었지. 그 밤은 다른 어떤 밤보다도 춥고 어둡게 …”

신부는 신부대로 판자벽에 머리를 꼭 눌러 붙인 채, 노인의 고백을 멍하니 듣고 있었다. 노인이 말하지 않아도 그 밤이 얼마나 캄캄한 어둠이었는지는 이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도 저 소리를 들었소. 구멍 매달기 고문을 받는 사람의 신음소리를 말이요. 내가 배교한 것은 … 여기 구덩이에 넣어진 뒤 들렸던 저 소리에, 하나님이 무엇 하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야. 왜 그들이 저런 곳에서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그런데도 자네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있어. 하나님도 아무것도 해주시지 않지 않나? 저 사람들의 귀 뒤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그 구멍과 코와 입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지. 그 고통을 나는 내 몸으로 맛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어. 기도는 결코 그 고통을 덜어 주지 못해.”

​로드리고가 배교를 거부하는 게 일본인 신도들을 위한 것인가,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인가. 혹은 교회를 배반하는 일, 교회의 오점이 되는 일이 두려워서인가. 그가 배교하겠다고 하면 그들은 구덩이에서 나와 고통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랑의 행위는 어떤 것인가? 만약, 캄캄하고 차디찬 밤, 예수님이 여기에 계신다면?

▲ 나가사키에 소재한 엔도 슈시쿠 문학관에 있는 《침묵》 초판본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 배교했을 거야! 그리스도는 배교했을 것이네.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자,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은 가장 괴로운 사랑의 행위를 하는 거야.”

페레이라가 로드리고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고 말했다.

​성화는 지금 바로 로드리고의 발 앞에 있다. 잔잔한 파도처럼 나뭇결이 무늬지어 있는, 약간 더러워지고 회색으로 된 나무판자에 조잡한 구리로 새긴 그리스도의 모습이 끼워져 있었다. 가느다란 팔을 벌리고 가시관을 쓴 보기 흥한 얼굴이었다.

그는 누렇게 혼탁해진 눈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말없이 내려다 보았다. 많은 사람에게 밟혀 거의 닳아 없어지고 오그라져 있었고 동판을 둘러싼 판자에는 거무스름한 엄지발가락 자국이 남아 있었다. 우묵하게 들어간 그리스도의 얼굴이 괴로운 듯이 자신을 바라보며 호소하는 것 같았다.

‘밟아도 좋다. 밟아도 좋다.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나는 존재한다.’

​로드리고는 긴 세월 동안 수없이 그리스도의 얼굴을 생각해왔다. 도모기 마을(일본에 들어와서 처음 정착했던)의 산에 숨어 있을 때, 산속을 방황할 떄, 감옥에서 밤에 기도드릴 때마 그리스도가 기도하고 있는 얼굴을 생각했다. 고독할 때는 그리스도가 축복하고 있는 얼굴을, 채포되던 날에는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짊어진 얼굴을 생각했었다. 자신의 영혼에 깊게 새겨진 그리스도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되어 그의 가슴에 살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것을 자신의 발로 밟아야 하는 순간을 맞았다.

​내가 수없이 생각한 얼굴 위에. 산속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나 옥사에서 언제나 생각해내며 따뜻한 위로를 받았던 그분의 얼굴 위에. 인간이 생존해 있는 한 선과 아름다움 그 자체인 얼굴 위에. 그리고 평생을 사랑만을 베풀려고 했던 그분의 얼굴 위에. 그 얼굴은 지금 성화판의 나무판자 속에서 닳고 패어버린, 그리고 슬픈 듯한 눈을 하고 이쪽을 보고 있다. “밟아도 좋다”라고 슬픈 듯한 눈빛으로 나에게 말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은 지금 아플 것이다. 오늘까지 내 얼굴을 밟았던 인간들과 똑같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그 발의 아픔만으로 이제는 충분하다. 나는 너희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 그것 때문에 내가 존재하니까.”

“주여, 당신이 언제나 침묵하고 계시는 것을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게 아니다. 함께 고통을 나누고 있었을 뿐.” 

​작가는 그리스도를 배교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잊혀진 자, 교회에서 경멸당하고 버림 받은 자를 실제 자료에서 찾아내어 다시 생명을 주었다. 왜 그럴 수밖에 없었을까, 그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그라면 어땠을까.

그들의 탄식에 목소리를 주고, 그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을 조금이라도 말하게 하고, 다시 한 번 그들을 걷게 하며 그들의 슬픔을 생각해 보자고 말이다.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다. 우리는 과거에 순교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존경한다. 그렇다고 해도 배교한 사람들을 경멸할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진 동판인 후미에를 밟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시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이 가장 믿고 있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얼굴, 자신이 이상으로 여기는 사람의 얼굴을 밟는 일이었다. 안 밟으면 고문하고 죽여버리겠다고 한다면?

좀 극단적인 예이지만, 부모님 얼굴을 밟으면 내가 살 수 있다고 하자.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럼 부모님은? 당연히 나에게 “나를 밟아”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라면 그럴 때 뭐라고 말씀하실까? 우리가 겪는 일상의 고통, 슬픔을 십자가 삼아 모두 짊어지고, 마지막까지 그것을 버리지 않으셨던 그리스도라면!

​책 제목인 <침묵>은 버림받은 자들이 목소리를 잃어버린 ‘침묵’ 상태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자는 의미와 박해 시대에 수많은 고통과 피가 흘렀는데도 왜 신은 가만히 있었을까 하는 신의 ‘침묵’, 두 침묵이 겹쳐 있다. 하지만 그때만이 아니다. 지금도 역시 곳곳에서 많은 피를 흘리고 있고, 옳지 못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고 있다. 우리도 개인의 삶에서 그런 일을 겪는다.

왜 신은 잠자코 있을까? 부정에 대해서 신은 왜 침묵하고 있을까? 정치나 법률의 부정이 아니라 생명의 부정에 대해서 말이다. 우리의 기도가 신에게 닿는 것일까? 아니, 신이 존재하는 것일까? 믿는 자들에게 이것은 두려울 정도로 근본적인 질문이면서 진솔하게 울리는 번민일 것이다.

​신부의 배교를 강요하면서 신부가 보는 앞에서 신도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본 관리들. 죽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배교하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신부의 아픔. 어떤 것이 참된 사랑의 행위인가, 선의 행위인가? 배교할 것인가, 저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둘 것인가?

지금 시대에도, 인생에도 ‘후미에’가 있다. 종교적일 수도 개인적일 수도 공동체적일 수도 있고, 전혀 상관없을 수도 있다. 당신의 후미에는 무엇인가? 그건 우리의 가장 비루하고 약한 것일 수 있다. 어떻게도 해볼 수 없는 부분, 그 부분을 통해 신은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정리연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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