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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물과 제물보다 나은 것,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말 1:6-10; 계 15:5-16:1; 막 12:28-34)성령강림후 열셋째 주일(8월27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8.25 01:50

1. CCL 나해 마가복음 중심, 평화의 예수님

최병학 목사의 기독론 중심 삼위일체교회력(CCL, Choi’s Common Lectionary) 나해 마가복음 해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삼위일체교회력은 창조주 성부 하나님의 절기인 창조절(9~11월)로 시작되고 성자 하나님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절기인 대림절-성탄절-주현절-사순절-부활절을 지나 성령 하나님의 절기인 성령강림절로 끝이 납니다. 이렇게 교회력 한 해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절기로 구성되는 것입니다.

특히 CCL은 통상축제력(RCL, Revised Common Lectionary)처럼 기독론 중심으로 구성되는데, 4복음서 중심, 4년으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각 해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위격, 곧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과 교회를 그 주제로 합니다. 첫해인 ‘가’해는 마태복음 중심 ‘생명의 하나님’, ‘나’ 해는 마가복음 중심 ‘평화의 예수님’, ‘다’해는 누가복음 중심 ‘정의의 성령님’, 마지막 ‘라’ 해는 ‘사랑의 교회 공동체’로 ‘복음서’와 ‘구약’ 말씀, 그리고 ‘사도행전~요한계시록’의 세 본문 말씀이 구성됩니다.

시편은 교독문으로 교독하기에 CCL에서는 넣지 않았습니다. 4본문으로 본문이 구성되면 설교하기가 더 어렵고, 또 3이라는 숫자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나’ 해의 주제는 ‘평화의 예수님’입니다. 돌아보면 한 해 동안 얼마나 평화를, 또 얼마나 예수님을 강조하고 말씀을 전하였는지 아쉽기도 합니다.

특별히 한반도 주변 정세가 한・미・일과 북·중·러 신냉전 체제로 재편되는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이 땅에 절실히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만드는 자(peace maker)로서 평화의 예수님을 제대로 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그리스도의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예배 없이 세상에 나가서 하는 운동은 이데올로기요, 정치요, 그 생명력이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배에서 새 힘을 얻고,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2. 예배와 말씀으로 시작된 교회

잘 아시겠지만, 예배는 기독교 역사의 시작이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역사신학자인 장신대 임희국 명예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2,000년 기독교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기독교는 예배를 드리면서 탄생했다. 신약 성서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성령의 역사로 예루살렘에서 생성된 신앙공동체가 기독교 역사의 첫걸음이었고, 이 신앙공동체는 예배에서 시작되었다. 이때의 예배는 강론(설교), 기도, 떡을 뗌, 시편 찬송, 신앙 고백, 축복 기원, 송영 그리고 아멘으로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강론(설교)은 구약 성서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성육신, 공생애,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선포되었습니다. 이것은 두 본문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초대교회가 아니기에, 초대교회의 탄생과 성장, 박해 상황을 전하고 있는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공동서신,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중심으로 한 본문을 포함, 세 본문 설교를 해야 합니다. 구약의 성부 하나님, 복음서의 성자 예수님,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와 사랑과 돌본의 역사가 한 편의 설교에 다 들어가게 됩니다.

또한 사도 시대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서가 있습니다. 바로 ‘떡을 뗌’입니다. 당시의 성찬인 “떡을 떼며”는 종교의식으로서 예전 형태가 아니라, 실제로 먹고 마시는 식탁 교제를 말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본 때가 바로 예수께서 떡을 떼셨을 때입니다(눅 24:30-31). 여기서 성찬은 부활의 식탁입니다. 성찬, 곧 떡을 뗌을 통해 신앙공동체 구성원들은 몸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코로나 상황 이후 식탁 교제가 끊어지고, 최근 다시 시작되었지만, 식당 봉사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세상 식당의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배 가운데 있는 성찬식은 그나마 중요시하는데, 예배 후 식탁 교제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단순히 밥을 먹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러한 식탁 교제를 매우 중시했습니다. 예배는 이렇게 밥을 준비하고 함께 먹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본문 말씀은 이렇게 예배의 본질에 있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지난주 말씀의 주제와 연결하여 보면, 열매 없는 무화과같이 선을 행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구약 말라기 말씀은 구체적으로 제사장, 곧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을 언급하며 책망합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은 일곱 천사의 일곱 대접 재앙을 소개합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으로 정결하지 못한 이를 심판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옷인 정결의 삶, 깨끗한 성품, 빛나는 언행을 돌아봐야 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여 심판받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이들이 바로 평화의 일꾼입니다.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는 이들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정말 제대로 된 예배를 드리고 세상에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해야 할 것입니다.

마가복음 본문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 첫째가 무엇인지를 물은 서기관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라기 때의 타락한 제사장과 사악한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말고,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여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구약 말라기 말씀부터 볼까요?

3.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말 1:6)

말라기는 느헤미야 시대의 선지자입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 당시, 귀환 공동체가 예루살렘 성벽과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고 완공했을 때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전 재건 후 수십년이 지나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자 신앙이 약화되고 성전의 중요성이 경시되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타락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한 제사장들에게 물들어 사악한 행위를 일삼았으나,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또한 자녀를 이방신의 딸과 결혼시켜(말 2:11) 민족의 정체성을 흔들어 버렸으며 사회적으로는 가난한 자를 압제(말 3:5)하였습니다.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의 극치를 달린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라기는 심판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결국 말라기 선지자의 심판 경고 후, 하나님은 400년 동안 심판과도 같은 무관심, 곧 침묵하십니다. 예언자를 보내지도, 역사를 주관하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은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나타날 때까지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말라기의 6편 설교 가운데 2번째 설교(말 1:6-2:9) 앞부분입니다. 말라기의 설교 주제는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공동체가 회개하고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말라기는 제사규례, 십일조 등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것을 권면합니다. 여기서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의 역할이 중요하죠? 그러나 말라기는 이들이 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을 보살펴 오신 하나님의 사랑과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해야 하는 제사장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 말라기 1장 10절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말 1:7-8)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더러운 떡을 드리고도 거짓말을 합니다. 온전한 예물을 바쳐야 하건만, 눈먼 희생제물과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면서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따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제사장들이 있는 성전 문을 닫으라고 합니다. 이들을 기뻐하지 않을 것이며 예물도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 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 1:9-10)

이렇게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제사장,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지난주 말씀에 이어 열매 없는 무화과와 같이 선을 행하지 못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목회자와 교인이 있는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결국 요나 때 자비를 베푸신 하나님께서 나훔 때는 심판하셨듯이, 선한 열매 맺지 못하는 교회는 마침내 심판하실 것입니다.

오늘 요한계시록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일곱 천사의 일곱 대접 재앙을 소개합니다. 일곱 대접 재앙은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이후 이어지는 마지막 재앙입니다. 대접 재앙도 다른 재앙처럼 7가지로 되어있습니다. 인과 나팔 재앙의 경우 설명이 장황하고 많은 사건이 등장하지만, 대접 재앙은 짧고 간단명료하게 진행됩니다. 말씀을 볼까요?

4. 증거 장막의 성전과 일곱 재앙 천사

▲ 왼쪽은 독일 바이에른 주립도서관에 있는 『오트하인리히 성경』의 삽화로 일곱 천사들이 진노의 일곱 대접을 붓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고 오른쪽은 돌로 깍아 만든 고대의 대접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순결을 상징)’을 입고 ‘가슴에 금띠(하나님의 영광을 반영)’를 띠고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가득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 또 내가 들으니,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일곱 천사에게 말하되, 너희는 가서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 하더라.”(계 15:5-16:1)

오늘 본문 말씀은 일곱 대접 재앙의 전개 상황을 다룬 16장 사건을 준비하고 있는 대접 재앙의 서론적 사건입니다. 네 생물 중 하나가 일곱 천사에게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줍니다. 여기서 네 생물은 요한계시록 4장에 이미 나왔는데,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같은 것으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속성을 상징합니다. 각각 하나님의 전능하심(사자), 인내(송아지), 지혜(사람), 최고 주권(독수리)을 상징합니다. 아무튼 일곱 천사가 일곱 대접을 쏟는데, 대접(φιάλη)은 큰 쟁반 정도의 그릇으로 보시면 됩니다. 

첫 번째 천사가 대접을 땅에 쏟자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우상에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종기가 납니다(계 16:2). 두 번째 대접은 바다에 쏟습니다. 그러자 바다물이 피가 되므로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더라”라고 소개합니다(계 16:3). 세 번째 대접은 강과 물의 근원에 쏟습니다(계 16:4). 싹부터 심판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결과보다는 요한계시록 말씀은 성도들이 흘린 피에 집중합니다. 6절을 보면, “그들이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흘렸으므로 그들이 그들에게 피를 마시게 함이 합당하니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악인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가 악인들에게 임한다는 뜻입니다.

네 번째 대접은 해에다 쏟아붓습니다. 그러자 해가 권세를 받아 사람들을 태웁니다(계 16:8). 지금 불볕더위를 지나고 있는데, 바로 이 느낌입니다. 여기서 해에게 태움을 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하며, 또 회개하지 아니하고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이들입니다. 다섯 번째 대접은 짐승의 왕좌에 쏟아집니다(계 16:10). 그러자 그 나라가 어두워지고 사람들은 아파서 자기 혀를 깨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이렇게 고난이 더해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악해지고 교만해집니다. 소망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대접은 큰 강 유브라데에 쏟아집니다(계 16:12). 그러자 강물이 마르고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열립니다. 이때 개구리 같은 ‘세 더러운 영’이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나와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이들은 ‘귀신의 영(14절)’입니다. 이들은 왕들을 꾀어 그들을 한곳에 모읍니다. 세 영이 왕들을 모으는 곳이 바로 아마겟돈(구약 므깃도)입니다.

사실 강은 단절이며, 이동하는데 장애물이 됩니다. 여섯 번째 대접이 유브라데 강물을 말려 이동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자 악인들이 몰려듭니다. 이것을 성경은 거짓의 영들이 아마겟돈에 악인을 모으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까마귀가 모이는 법입니다. 그리고 최후의 마지막 전쟁이 이곳 아마겟돈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위기와 재난의 때에 자신을 지켜 정결해야 합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있어야 합니다(계 19:8).

▲ 므깃도 위치와 현재 므깃도 언덕

마지막 일곱 번째 대접은 공중에 쏟아집니다(계 16:17). 이때 땅에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지고, 만국의 성들도 무너집니다. 이제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받게 됩니다. 요한계시록은 피와 포도주를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데, 포도주는 하나님의 ‘진노(와 음행)의 포도주(계 14:4, 19, 17:2, 18:3, 19:15)’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 크기의 우박이 땅에 쏟아집니다. 한 달란트는 현재 약 34kg 정도(바벨론은 60kg)의 무게입니다. 우박 하나에 34, 혹은 60kg이라면 거의 폭탄이 터지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러한 우박이 떨어지면 땅의 모든 생물은 죽임을 당할 것이고, 채소나 곡물, 나무도 온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악인은 ‘하나님을 비방(21절)’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승리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찬양을 부릅니다. 성도들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죠? 각각 구약 출애굽 시대에 구원받은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구원받은 이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영생을 누립니다.

▲ 이스라엘 광야 장막과 증거장막인 새 예루살렘(14세기)

잘 아시겠지만, 신천지의 원래 이름이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입니다. 신천지 때문에 증거장막의 어감이 좋지 않지만, 구속받은 성도들이 하늘에 있는 이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과 영원토록 영생을 누릴 것이기에 믿는 성도들에게는 하늘에 있는 성전으로 구원의 장막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아니지만, ‘모세의 노래와 어린양의 노래(계 15:3-4)’를 들어 볼까요?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하느님의 종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를 이렇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주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만민의 왕이시여, 주님의 길은 바르고 참되십니다. 주님,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자가 누구며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지 않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주님만이 홀로 거룩하시니, 모든 민족이 주님 앞에 와서 경배할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이 공정하게 내려졌습니다.’”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는 무엇을 뜻할까요? 먼저 ‘모세의 노래’는 출애굽 직후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마른 땅과 같이 건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렀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출 15:1-18). 그리고 ‘어린 양의 노래’는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신 예수님께 드리는 성도들의 구원에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두 노래는 승리한 자들의 노래이지만 공통적으로 그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찬양의 노래입니다.

▲ 모세의 노래와 하나님의 어린양을 묘사한 프랑스 앙티브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중요한 것은 승리한 성도들이 이 승리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홍해를 가르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시고 구원을 베풀어주신 어린 양 예수님의 승리라는 것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이 노래가 바로 우리 성도들이 부르게 될 최종적인 승리의 노래입니다. 또한 여기서 주님의 길은 바르고 참되다고 합니다. 선한 열매죠? 이 선한 열매의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오늘 복음서 말씀에 나옵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5.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 12:29-31)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기독교 신앙의 영원한 진리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여기에 ‘서로 사랑’, ‘창조 세계 사랑’을 첨가합니다. 여기서 서로 사랑은 교인 서로 간의 사랑입니다. 교회 밖 이웃을 사랑하기 전에 먼저 교회 내 성도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태기후 위기 시대에 창조 세계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가야 합니다. 아무튼 서기관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막 12:32-34)

서기관이 이렇게 지혜 있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멀지 않다고 합니다. 멀지 않다는 말은 가깝다는 말인데, 아직 들어가지는(혹은 임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자 청년의 때와 같이 지식으로 알지만, 실천하는 것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막 10:17-2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말라기 때의 어리석은 제사장이 되지 말고,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며 또한 이웃과 창조 세계를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일곱 대접 재앙의 때에 재앙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 하나님과 영원토록 영생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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