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배 교수가 지난 9월 25일 진행된 신간 출간 기념 북토크에서 역사 유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홍인식

필자는 지난 9월에 출판된 책 『역사 유비로서의 李信의 슐리얼리즘 신학』(동연 2023)에서 ‘역사 유비’란 개념을 최초로 책명으로 언급했다. 사실 이 용어를 최초 생각했던 시점은 201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후학들과 함께 『종교개혁 500년과 以後 기독교(모시는 사람들 2017)』를 엮으면서 “종교개혁 ‘以後’신학으로서의 역사 유비, 그 아시아적 함의”란 제목으로 긴 논문을 써서 기고했었다.

하지만 당시 필자는 李信의 ‘슐리얼리즘 신학’을 역사 유비와 관계시켜 사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번 책을 쓰면서 그 상관성을 여실히 느껴 책 마지막(4부) 글로서 2017년의 논문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여 삽입했다. 다시 썼으면 완성도가 더 높았을 것이란 생각에 이번 책을 출판하면서도 아쉬움이 컸다. 그래도 책 속에 포함한 이유는 기독교 신학의 두 유형을 규정하는 기존 유비들-존재유비(Analogia entis)와 신앙유비(Analogia fidei)-와의 변별됨을 옳게 서술했기 때문이다. 이하 글에서 아주 간단하고 쉽게 ‘역사 유비’에 대해 언급하겠다.

1.

주지하듯 지금껏 서구신학은 두 유형의 유비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한 결과였다. 전자의 경우 성서의 神을 아리스토텔레스의 피지스(Physis), 곧 자연 개념의 빛에서 풀어낸 것인바 초자연과 자연의 관계를 ‘역설’로 이해했으며 자연의 능동성을 강조했다. 이후 자연은 서구 이외의 문화를 내포하는 개념으로 외연이 넓혀졌다. 神의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길(방식)도 제시되었다. 가톨릭 신학이 포괄주의(Inclucivism)를 표방하는 보편주의의 길을 걷게 된 배경이다.

이런 토미즘 신학은 『天主實義』의 저자 마태오 리치의 경우에서 보듯 ‘질료’에 대한 ‘형상’의 우선성을 강조한 탓에 ‘이기불상리(理氣不相離)’에 기초한 당대 성리학과의 대화가 쉽지 않았다. 하여 위 책은 기독론처럼 도무지 다룰 수 없는 주제는 뒤로 빼서 약술했고 같은 것을 앞에 두고 강조하는 소위 ‘적응 주의’의 산물이었다. 이런 적응 주의는 포괄주의의 한 유형으로서 작금의 다문화사회를 이해하기 역부족이다. 독일 신학자 K. 라너와 인도 신학자 R. 파니카 간의 ‘익명의 기독교인’ 논쟁도 이런 선상에서 이해할 주제다. ‘형상’의 우선성은 자연 및 제 문화 속에서 神의 초월성, 기독교의 우월성을 적시할 수밖에 없다.

2.

개신교 신학은 중세 토미즘 신학 체계를 붕괴시키고 출현한 다른 기독교의 일면(一面)이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피지스) 개념, 즉 일체 자연(이성)의 능동성을 탈각시켰다. 대신 개체(인)을 강조하는 독일 신비주의 사조를 수용했다. 종교개혁을 근대의 여명이라 부르는 이유이다. 이 과정에서 神/人의 관계를 강조한 새로운 유비론, ‘신앙 유비’가 비롯했는데 여기서 핵심은 가톨릭의 神(초월)과 달리 기독론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 인간, 문화는 전적으로 타락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神/人의 관계가 정립된다는 ‘변증’에 방점을 찍은 것이다.

이로부터 개신교는 탄생 초기부터 배타주의를 근간으로 했다. 칼 바르트의 ‘계시 신앙’(계시 실증주의)과 철학자 K. 야스퍼스의 ‘철학적 신앙’ 간의 논쟁을 비롯하여 바르트와 E. 브루너 사이의 자연신학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다. 성령론을 강조한 J. 몰트만 조차 기독론 없는 자연의 ‘범(Pan) 허무주의’성을 경고했다. 이런 배타주의는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으나 가치다원주의 시대에 타자 부정의 논리로서 사회통합을 해치고 있다. 막스 베버가 말하듯 근대 문명의 핵심인 자본주의의 정신적 배경이 된 것 또한 개신교의 한계일 수 있다.

3.

약술했으나 이런 선상에서 필자는 기존의 두 유비 대신 ‘역사 유비’란 새로운 조어를 신학계에 발표, 유통했다. ‘역사 유비’는 앞선 두 유비의 배경인 神과 기독론 대신 靈, 성령을 틀거지로 삼는다. 고통 하는 피조물을 대신하여 탄식하는 주체가 하느님 영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우주 및 역사에서 비롯한 탄식 소리를 듣는 일이 우리 시대의 성령 체험(롬8:18-25)이란 생각에서다. 요아킴 피오레의 시대 구분도 유의미했다. 우리 시대를 신과 예수를 말한 신, 구약 시대를 지나 성령의 시대라 명한 까닭이다. 본래 근원(뿌리)이 같은 기(氣)와 영(靈)이 동/서 양 곳에서 각기 다른 양식으로 발전했다는 과학사가 조셉 니덤의 생각도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 발터 베냐민의 역사철학에서 배운 바가 컸다.

필자는 벤야민을 중세의 아퀴나스, 근대의 마틴 루터에 견줄만한 신학적 상상력의 원천이자 보고(寶庫)라 여긴다. 그는 ‘神 없는 신학’을 통해 실패했던 과거 역사를 현재로 소환하여 그를 구원코자 했다. 이는 서구 근대가 추구했던 진보 개념과의 절연을 뜻했다. 실패한 자들의 아우성이 차고 넘치는 역사를 초월의 지평으로 여긴 결과였다. 역사의 이면에서 비가시적으로 활동하는- 체스 기계 속 난쟁이로 언표된- 하느님 영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예측 불가능하겠으나 실패한 역사가 구원될 것인바, 이를 메시아 도래의 목적이라 봤다. 여기서 실패한 역사와 메시아 도래(의식) 간의 ‘역사 유비(Analoia historiae)’를 말할 수 있다. 하늘의 성좌(星座)처럼 서로 이질적인 역사 들 간의 연관성을 형상화시켜 연구하는 일을 역사 연구의 본질- 역사철학-이라 말했기 때문이다.

4.

신학자 李信 역시 이런 선상에서 논할 수 있는 독특한 사상가다. 발터 벤야민과 李信은 슐리얼리즘 사조를 공유했다. 두 사람 모두 예술을 중시했고 자본주의와 씨름했던 것이다. 전자가 자기 전통인 유대주의로 회귀했던 반면 후자 李信 역시 아시아 전통으로 돌아왔다. 기독교의 모체로 알려진 후기 묵시문학을 성서학자로서 연구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조직신학적으로 재구성했던바 ‘영적 양극성’으로 표현되는 슐리얼리즘을 통해서였다. 세상을 철저히 부정했으나 동시에 그 속에서 전혀 다른 현실을 보고자 했던 의식, 그것이 묵시 의식이었고 초현실주의였으며 영의 활동이기도 했다.

李信은 이런 의식을 종종 ‘前衛(아방가르드) 의식’이라 일컫기도 했다. 인자(人子)로서의 예수의 자의식 역시 이런 선상에서 비롯했다고 봤다. 놀라운 사실은 70년대 초 그가 수운의 종교체험을 ‘전위 의식’과 다르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지금껏 동학과 주제- 신(범재신)론, 수행론, 민중 혁명론 등- 별로 대화한 신학자는 있었으나 의식 자체를 일치시켜 이해한 경우는 없었다. 소외된 것(차이)들이 언제든 보편에 참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서 李信은 ‘역사적 일관성이 없는 유사성’, 혹은 ‘관계성 없는 유사성’이란 말로서 역사를 관계시켰다. 앞선 두 유비가 ‘역설’과 ‘변증’으로 대표된다면 역사 유비는 ‘일치’에 방점이 찍혔다. 이처럼 李信 사유는 벤야민의 성좌개념을 다시 떠올려 생각해도 좋을 만큼 그와 유사하다. 그의 책을 읽었다는 흔적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5.

李信은 벤야민과 달리 훗설(E. Hussel)의 현상학적 방법을 사용했다. 星座 속 별(星)처럼 상호 연결 없는 듯 보이는 역사적 사건들을 현상학적 판단중지(epoche)를 통해서 관계시킬 목적에서다. 역사적 배경, 국가별 차이, 시대적 여건 등을 벗겨내고 오롯한 의식 자체를 문제 삼았다. 외형적 조건(현상)들을 판단중지 시켜 의식의 흐름 자체에 주목한 것이다. 하여 신구약 중간기의 묵시 의식과 예수의 자기 인식 그리고 수운 최제우의 개벽 사상(체험)이 외적 조건은 달랐지만 의식의 흐름과 구조에서 다르지 않다고 봤다. 영적 양극성 상태에서 비참한 현실을 구원코자 자신을 달리 만든 사건(체험)을 ‘전위(前衛)의식’이라 이름한 것이다.

역사적 일관성 없는 유사성’이란 말은 바로 여기서 비롯했다. 여기서 유사성은 앞선 유비와 달리 수평적 구조를 지녔다. 존재 유비가 부분을 포함하는 전체집합의 성격을 지녔으며 신앙 유비가 부정하여 초극하는 논리를 제공했다면 ‘역사 유비’의 경우 의식 흐름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 유비’는 탈현대(Postmodern) 시대를 위한 신학적 방법론으로 적합하다. 동시에 서구적 근대의 병폐를 극복, 치유하는 일에 있어 그 역할이 작지 않을 듯싶다.

6.

3.1 선언 백 년(2019)을 지난 시점부터 ‘다시 개벽’을 선포한 수운의 종교체험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간 기독교 서구를 수용한 개화파와 스스로 개혁(惟新)하여 전통을 지키려 했던 수구파의 양대 시작에서 한국 근대사를 논했으나 소위 개벽파는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앞의 입장에서는 주술적인 하층 종교로, 나중 입장에서는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반역의 종교로 평가된 탓이다. 하지만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 차원에서 계급을 철폐했고 향아설위(向我設位)로서 종교마저 해방했다. 삼경(三敬)-敬天, 敬人, 敬物- 속에는 탈근대적 사유의 맹아도 담겼다.

이런 연유로 향후 개벽 사상과의 대화가 화급하다. 종래처럼 소위 軸의 종교들과 대화를 넘어설 필요가 있다. 변선환이 민중불교를 넘어 원불교와의 대화를 통해 원(圓)기독교를 제시했듯이 말이다. 이런 현실에서 ‘역사 유비’의 신학은 개벽 사상과의 대화, 즉 ‘개벽적’ 기독교를 논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로 역할 할 것이다.

필자가 ‘역사 유비’에 관심한 이유는 실패한 역사의 구원과 더불어 근대의 극복을 위해서였다. 동시에 백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이 땅의 기독교가 더 이상 외래 종교가 아닌 한국의 종교로서 역할 할 것을 기대한 까닭이다. 이를 위해 크리스챤들은 기독교를 전달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수용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힘을 키워야 할 것이다.

이정배(顯藏아카데미)  ljbae20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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