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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죄라면 그 죄는 누구의 죄일까요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을 보는 한 시각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 승인 2023.11.01 01:32
▲ 2014년 하마스 창설 27주년 기념행사에서 Izz ad-Din al-Qassam(이즈 아드 딘 알-카삼) 여단원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Khalil Hamra/AP

1.

오키나와 작가 메도루마 슌이 1999년 6월 26일자 〈아사히 신문〉에 쓴 《코자 거리 이야기-희망》이라는 아주 짧은 소설은 어떤 오키나와 사람이 그 곳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아기 한 명을 유괴해서 살해하고 “지금 오키나와에 필요한 것은 수천 명의 데모도 수만 명의 집회도 아니다. 한 명의 미국인 유아의 죽음이다.”라고 쓴 편지를 신문사에 보내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오키나와가 2차 대전 이후 동아시아의 미군 주둔 총사령부 비슷하게 되어 버린 일은 잘 알려진 일인데요. 이런 행동을 하면서 주인공이 하는 독백은 이런 겁니다. “그래, 가장 저열한 방법만이 유효한 거야.”

2.

민중신학이 저항 폭력에 대해서 가진 입장이 어떤 것인지 써 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이 청탁을 받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안병무 선생님이 비슷한 질문을 받을 때 하셨던 말씀이었습니다.

“나는 ‘원칙적으로’라는 한정사를 붙여서 말한다면 ‘비폭력’이 옳다고 봐요.”

그런데 정작 서두에 저 말씀을 꺼내놓고는 안병무 선생님이 하신 말씀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폭력을 쓰냐 마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맥락에 따라 결정될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전적으로 맥락에 따라 결정될 문제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그래도 폭력을 가능한 한 적게 쓰려고 해야 한다 이런 입장을 취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죠.

같은 이야기를 이런 비유를 들어서 하신 적도 있습니다. 노동운동가인 맑시스트와 그리스도인이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런 방법이 좋을지, 저런 전략이 좋을지, 필요하면 폭력투쟁도 해야 할 지, 이런 건 그 사람들이 논의해서 해결할 문제라는 겁니다. 아예 여기에 이런 해설까지 붙이시죠.

“하느님 앞에서 너는 할 수 있고 해도 된다!”

3.

하지만 그럼 이야기 다 끝난 거 아니냐라고 하기엔 뭔가 찜찜한 느낌이 듭니다. 잘 알려졌다시피 민중신학의 민중 담론을 초기부터 지금까지 초지일관하고 있는 중요 요소는 ‘고난의 담지자’라는 것인데요.

이 ‘고난의 담지자’ 요소는 (특히 초기) 민중신학에서는 민중의 고난이 세계를 각성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고난을 당하는 것도, 더 나아가 자신이 당하는 것을 고난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권력과 자본의 억압에 순순히 무저항으로 있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겠습니다만,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폭력을 써서 저항을 한다는 옵션은 아무래도 후순위가 되기 십상이겠죠.

‘고난의 담지자’ 요소와 함께 안병무 선생님이 민중과 관련해 특히 강조하시는 것이 민중의 ‘자기 초월’인데요. 이 ‘자기 초월’의 구체적인 예로 가장 먼저 드는 예가 전태일 열사입니다. 그리고 쭉 열사들의 예를 들지요. 물론, ‘자기 초월’을 하려면 열사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아니고, 자기를 초월하는 시도가 극한까지 가면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는 예가 있다, 이런 말씀에 더 가깝겠습니다만, 이런 관점에서도 폭력을 써서 저항을 한다는 옵션은 아무래도 후순위로 밀릴 것 같긴 합니다. 앞에서 인용했던 ‘원칙적으로’라는 한정사가 그냥 한정사만은 아니었다 싶네요.

민중신학 연구자로서 개인적인 생각은 특히 초기 민중신학자분들의 저항 폭력에 대한 이러한 경향은 이 분들이 권력에 대한 절대적인 불신을 갖고 있다는 경향과 어느 정도 맞물린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에게는 자본주의 권력도 사회주의 권력도 거의 절대적으로 불신하고 저항운동도 가능한 한 내부 권력을 구축하지 않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경향이 강합니다. 폭력은 권력과 자본이 행사할 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연루자들이 권력 구축의 길에서 빠져 나오기가 상당히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서두에 인용한 소설의 말을 다시 끌어 옵니다. “가장 저열한 방법만이 유효한 거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은 어쩌면 이 “가장 저열한 방법만이 유효한” 또다른 예일까요?

그런데 “가장 저열한 방법만이 유효한 거야”를 말했던 주인공의 결말은 해변공원의 광장 한가운데에서 분신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분신자살 직전에 그가 남긴 또다른 독백은 이렇습니다.

“후회도, 감개도 없다. 불안에 줄곧 가위눌리던 작은 생물의 체액이 어느 날 갑자기 독으로 변하듯이, 내 행동은 이 섬에게 자연스럽고도 필연적이리라.”

그 “가장 저열한 방법”은 결국 자신의 체액이 독으로 변해서 일어난 결과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잘 했다 못 했다 말을 붙일 것도 없다는 뜻이겠죠. 가자 지구에 말 그대로 갇혀 있다는 수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체액도 마찬가지겠군요. 다만, 하마스가 “후회도, 감개도 없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체액이 독으로 변한 생물이 권력만을 중독시키고 끝난다는 건 이상적인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일 터이고 다른 이들도 그 독에 다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항 폭력이 죄라고 한다면 죄일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죄는 과연 누구의 죄일까요. 물론 저항 폭력을 저지른 사람들의 죄이긴 하겠습니다만, ‘체액을 독으로 변하게 만든’ (전세계적인) 권력과 자본의 죄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이런 이야기 할 때 은연중에 종종 점수판을 머릿 속에 떠올리게 되는데, 저항 폭력이 -5점쯤 된다고 그러면, 권력과 자본도 아무리 적어도 같은 -5점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권력과 자본은 자신들의 억압에 대한 책임도 추궁을 받아야 하고, 그 억압으로 인해 ‘체액이 독으로 변해서 일어난’ 저항 폭력에 대한 책임도 추궁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방금까지 쓴 이야기는 민중신학 연구자인 저의 개인적 의견이긴 합니다만, 아마도 민중신학자 대부분은 위에 언급했던 ‘자기 초월’의 예가 된 열사들을 ‘체액이 독으로 변하기 직전에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켜 저항한 사람들’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 않냐고 한다면 동의하시지 않을까 싶네요.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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