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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의 가을과 자율성평화를 짓는 농부 이야기 5
유대은(기장 총회사회선교사) | 승인 2023.11.11 01:52
▲ 낫으로 벼베기를 하는 소농두레 Ⓒ정아롬

가을이다. 우리 논에는 붉은색, 검은색, 노란색 등 알록달록한 벼들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다. 집집마다 들리는 타작 소리는 고즈넉한 동네에 활기를 준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과 함께 들깨를 털면 구수한 향이 온 동네에 퍼진다. 풍성한 가을, 이 시기가 되면 만나는 사람마다 “가을 하셨어요?”라며 묻는 게 인사다.

‘가을’이라는 말은 원래 계절를 의미하는 명사지만 이 지역에서는 벼를 수확하는 뜻의 동사로도 쓰인다. 정말 낭만적인 말이다. ‘가을하는’ 농부들은 벼 베는 시기를 가늠하기 위해서 매일 논에 나간다. 우리 집은 여러 품종의 벼를 키우고 있다. 숙기가 다르기 때문에 나락이 익어가는 것을 보아가며 가을할 날짜를 정한다. 추수철이 시작되면 들녘에는 콤바인이 분주하다. 논 배미들의 풍경은 점점 달라진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에 노랗다 못해 갈색이 되어가는 논들이 눈에 띄었다. 벼베기가 늦어질수록 건조상태가 오래되어 벼의 잎색이 갈색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콤바인을 수배하지 못했거나 순서를 기다리는 중인 걸까 싶어 내가 다 걱정이 된다. 논 주인은 제때 벼를 추수하지 못해서 애가 탈 것이다.

몇 해 전 일본에 갔다가 산골 다랑치 논을 둘러본 적이 있다. 400평쯤 되는 긴 논을 나이든 부부께서 작은 콤바인으로 수확 중이셨다. 콤바인은 1톤 트럭에 싣고 다닐 수 있는 4인용 식탁크기 정도라 다루기 어렵지 않아 보였다. 대부분 대형 콤바인으로 추수하는 이곳과는 사뭇 다른 추수 풍경이었다.

올해 우리 집의 다섯 마지기 논을 가족의 힘으로 벴다. 종종 두레 친구가 와서 도와주기도 했다. 대충 계산해 보니 6만 번의 낫질이다. 당연히 허리에 점점 무리가 오면서 아팠다. 며칠이 걸렸지만 익은 순서대로 모두 벨 수 있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콤바인을 마냥 기다리는 걱정이 없는 게 더 좋았다. 물론 나이가 들면서 몸은 얼마나 버텨줄까, 언제까지 이렇게 낫으로 벨 수 있을까 라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벼베기가 끝나고 나서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도록 기뻤다.

집에 있는 도정기가 고장이 났다. 다른 부분은 괜찮았지만 돌을 골라주는 석발 부분이 작동하지 않았다. 그간 가족이 먹을 소량만 해오던 터라 크게 신경 쓰지 않았는데 수확량도 늘고 주변에 나눠 먹고 남은 것은 팔려고 하니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고치기로 했다. 지역의 정미기를 다룬다는 곳에 가보았으나 연락이 안되었다. 더 큰 곳은 다른 지역이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참에 스스로 고쳐보자고 해서 기계를 열어 확인해 보았다. 석발 부분의 전선이 낡아 있어서 전선을 다시 연결해보았으나 작동하지 않다. 결국 모터의 문제라고 판단해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로 했다. 도정기가 오래 되다 보니 같은 회사 제품은 없었다. 다행히 동일한 마력과 크기를 가진 타사 제품이 있었다. 모터 전체를 드러내고 새 것으로 교체하니 석발기가 잘 돌아갔다.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굉장한 뿌듯함이 찾아왔다.

이런 기쁨과 뿌듯함, 그리고 애타는 감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다른 손에 기대지 않아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농부의 ‘자율성’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종자를 심을지, 어떤 방식으로 가을 할지, 농산물의 가격은 얼마로 할지, 어떤 기계를 사용할지 등 농사에 관해 선택하고 움직이고 해결하는 모든 과정이 여기에 포함된다. 근대화 이전의 농부들은 자급자족했다고 한다. 무엇을 심어 먹을지, 얼마나 심을지를 직접 정했다.

그러나 근대화 이후 먹거리는 상품이 되었다. 일정한 크기와 맛과 향을 맞추기 위해 외부투입재에 의존하는 농사방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농사는 농업이 되었다. 지역의 환경과 기후에 맞게 축적된 전통적인 농사방법보다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서구 기술과 지식에 의존적이 되었다. 생계형 농업에서 상업적 농업으로 전환하면서 ‘농민의 자율성’은 점차 사라져 가게 되었다.(비아 캄페시나, 한티재, 2011. 참고)

▲ 지금은 보기 힘든 경운기의 동력을 이용하는 탈곡기 Ⓒ정아롬

농촌 경제학자 플로흐 교수는 ‘소농은 지배받지 않는 기술에 능통하다.’라고 했다. 소농은 큰 기계에 의존하지 않을 만한 규모의 농사를 짓는다. 적정한 농사의 규모는 농사의 때를 놓치지 않게 해준다. 농사 방식도 자신과 농지의 환경에 맞게 정할 수 있다. 그만큼 건강한 먹거리를 생산한다. 즉, 소농은 ‘자율성’이 높아질 수 밖에 없다.

함께 벼농사를 품앗이 하는 소농두레의 농사방식이 있다. 산의 부엽토를 사용하여 상토를 만들어 토종벼용으로 사용한다. 소독약 대신 열탕을 이용하여 볍씨를 소독한다. 손모내기를 통해 여러 품종과 땅에 맞게 심는 모의 갯수와 간격을 조절한다. 비료 대신 쌀의 부산물인 쌀겨를 논에 투입하여 땅심을 키운다. 이런 방식은 시장과 기계의 의존도를 극히 줄여주는 기술이다.

수년 전, 경사로에서 경운기가 뒤집어지는 사고가 난 적이 있었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처음 겪는 일이라 손발이 덜덜 떨렸다. 뒤집어진 경운기를 어찌해야 하나 걱정하다가 경운기를 잘 다루는 두레의 식구에게 전화로 부탁하였다. 와서 보더니 ‘경운기가 매우 인간적이에요. 농기계가 생각보다 단순해요’라고 하였다. 나는 굉장히 무거워 여러 사람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친구는 두명이서 뒤집을 수 있다고 하며 함께 뒤집어 제 자리로 돌려 놓았다.

나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지금 나오는 첨단 콤바인, 트렉터에는 전자식 부품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다. 예전에는 대부분 기계식이라 농민이 직접 고쳐 사용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농기계가 고장나면 해당 업체에 맡길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개인이 전자 장비를 다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앞으로 농민의 손 때 묻은 기계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농촌은 인구 감소와 고령화라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럼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 것이 옳을까. 효율성이 높은 중대형 농기계들을 늘려 부족한 일손을 채우는 것이 맞을까. 막대한 자본을 빌려 전자동으로 운영할 수 있는 스마트팜 형식으로 농사를 영위 하는게 옳을까. 외국인노동자들의 손을 빌려 경영자형 농업 방식으로 가야 할까.

나는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농민의 자율성’을 높이기 위한 방향으로 가야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소농들의 농사방식을 장려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지원해야 한다. 농민이 직접 다루기 쉬운 방식의 작은 기계들을 개발하고 지원하는 게 바람직하다. 가을철 수확에 소외되지 않도록 마을이나 지역단위에 농기계를 지원해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또한, 시장과 마트에서 농산물을 구매하는 소비자의 시선도 중요하다. 소비자에게 오기까지의 농민의 수고를 인정해 주는 것도 자율성을 높이는 방법이다. 농민이 정한 가격을 인정해 주고 지역시장(로컬푸드마켓)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농산물의 크기가 고르지 않다고 불평하지 않고 흙이 묻었다고 더럽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다.

식탁 위에 오른 먹거리들에 궁금을 품어 보자. 시장과 마트에서 농산물을 구매할 때 어디에서 왔는지, 어떤 농부에게 키워온 것인지 확인해 보자. 조금 더 나가 어떤 방식으로 농사를 지은 것인지도 보자. 그런 궁금증이 ‘농민의 자율성’을 높이는 시작이 될 것이다.

유대은(기장 총회사회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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