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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고난이란 없다압도적 감사(요한복음서 6:1-15)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11.12 04:05
▲ 나와 이웃의 고난은 예기치 않고 찾아온다. 하지만 그 고난이 축복을 위한 것이란 말은 어쩌면 거짓일지도 모른다. ⓒGetty Images

1.

지난 주간 감사주일을 보냈습니다. 플리마켓 행사를 준비하느라, 감사주일에 대해서 집중하지 못하신 것은 아니지요? 창세기의 가인 이야기와, 복음서의 가난한 여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하는 마음의 태도를 고민해 봤습니다.

감사는 기쁨에서 나오고 행복에서 나옵니다. 기쁜 일이 있어야 감사하고, 행복해야 감사합니다. 그러나 그런 감사는 일차원적인 감사입니다. 일차원적인 감사도 매우 훌륭한 감사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하기를 바라십니다. 인생이 성장하고, 신앙이 성장하고, 그래서 마침내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의 분량에 까지 이를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게 성장한 우리의 삶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한 걸음 나아간 감사를 요구하시는데, 그것은 고난에서 오는 감사입니다. 고난이야말로 성장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고난을 겪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성숙하지 못합니다. ‘웃자란다’고 그러죠. 자라기는 하는데 키만 자라고 튼튼해지지 못합니다.

유아교육의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에 부모님들이 아이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되, ‘좌절경험’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좌절을 경험하라니요? 아이를 사랑하고 보살피기만 해도 모자랄 판에, 좌절하게 만들라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좌절경험’이라는 말은 무슨 대단한 엄청난 고난을 아이에게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원하는 대로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있구나’라는 것을 가르쳐주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울고 떼를 써도, ‘이건 안 돼’ 하면서 단호하게 좌절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이가 작은 고난들, 작은 좌절을 경험해 봐야, 사회성도 자라고 예의 도덕에 대한 감수성도 키워집니다. 인생에서 진짜 힘든 고난을 겪을 때에 오히려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오냐오냐 키우기만 하면, 오히려 충분히 이겨낼 법한 고난 앞에서도 와르르 무너져 버리게 됩니다.

온실 속의 화초라고 표현했는데, 실제로 화초도 적절한 고난이 있어야 잘 자란답니다. 제가 방울토마토 화분을 하나 키웠었는데요, 그렇게 잘 돌봐주는데도 열매는커녕 꽃도 피지 않습니다. 왜 그러나 했더니, 너무 편안해서 그런답니다. 바람도 불고 흔들거리고 휘청거리고 힘들어야, 이 식물이 살아남으려고 꽃도 피우고 씨앗을 열매를 퍼뜨린다고 합니다. 너무 편하기만 하면,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서 아무것도 안 한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2.

고난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이 고난이 도대체 뭐냐? 내 앞에 닥친 고난이 어떤 의미냐? 이것을 제대로 알면, 고난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고난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면 실제 우리 삶이 달라져요.

고난은 스스로 자초한 고난이 있는가 하면, 사회적이고 환경적으로 닥쳐오는 고난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도 있습니다. 굳이 겪을 필요 없는데도, 내가 잘못해서 겪게 되기도 하고, 내가 아무리 용쓰고 피해 봐도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것도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주시는 은혜의 고난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고난이 어떤 고난인지 어떻게 압니까? ‘어떤 고난은 쓸데없이 내가 자초한 거고, 어떤 고난은 어쩔 수 없는, 환경적인 거고, 외부적인 거고. 어떤 고난은 하나님이 주신 거고…’ 이걸 어떻게 압니까?

사실은 실제 고난이 그런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고난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고난에서 찾아내는 의미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그 고난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그것이 고난의 종류를 결정합니다. 고난 자체가 원래 종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고난에 그 의미를 부여하면, 그런 고난이 된다는 겁니다.

고난에서 찾는 의미가 고난에 대한 태도를 결정짓습니다. 그리고 그 태도가 우리 삶을 바꿔놓습니다. 고난을 마주하고서, ‘이겨내야지’ 혹은 ‘피해 가야지’, 아니면 ‘이걸 나보고 어떡하라고! 에이 모르겠다…’ 어떤 마음을 갖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겨내야 할 고난인가? 피해야 할 고난인가? 아니면 필요없는 고난인가? 아니면 감내해야 할 고난인가? 고난 앞에서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고난을 이겨내야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과, 고난을 피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갑니다. 고난을 앞에 두고 원망하고 절망하는 사람과, 고난을 앞에 두고 감사하는 사람은 그 살아가는 모습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신앙의 도전이란, ‘고난 앞에서 감사할 수 있는가?’입니다.

3.

흔히 고난의 의미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이것도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주시려고 하시는 일이야. 이 일을 잘 견뎌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을 거야.’ 물론 이런 생각으로 고난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이 진짜 고난의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고난 잘 이겨내 봐라. 그러면 복 줄게’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거야’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실 리 없어’ 하는 식으로, 우리 인간중심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의 의미 역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이라는 의미도, ‘이 고난을 이겨내면, 이 고난이 지나가면, 우리에게 복이 올 거야’ 하는 그런 식의 의미가 아닙니다. 고난은 고난 그대로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도, 고난 중에도, 고난으로 슬퍼하면서고, 고난으로 아파하면서도, 그 고난으로 끊임없이 고통당하면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고난의 의미는 ‘고난을 통해 내가 무엇을 얻느냐’가 아닙니다. 세상과 나의 관계에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내 삶에 하나님이 무엇을 해주시느냐? 거기에서 의미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고난의 진짜 의미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고난이 무엇을 해 줄 수 있느냐? 여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진짜 삶은 세상 속에서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 삶을 더욱 단단하게 해주는 것이 진짜 의미이고 가치입니다. 고난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겁니다.

4.

오늘 함께 읽은 복음서의 말씀은 너무나 유명한 오병이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명이 먹었다? 이게 이야기의 핵심일까요?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결코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감사의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는 네 복음서에 모두 등장합니다.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왜 요한복음서를 본문으로 정했을까요? 그냥 네 가지 중에 하나를 정했을까요? 아닙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비교해 보면, 특이한 단어가 있습니다. 무슨 단어일까요? 벌써 정답은 이미 다 알려드렸습니다. 네, ‘감사’라는 단어입니다.

어느 장면에서 ‘감사’라는 단어가 등장하나요? 예, 물고기와 빵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전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공관복음서는 ‘축복’이라고 하는 ‘율로게오’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만, 요한복음은 ‘감사’라는 ‘유카리스트’를 사용합니다.

공관복음서가 전하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말 그대로 기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셔서 우리의 삶이 풍성해진다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고백은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풍성함이 아닙니다. 인간의 고백, 인간의 감사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는 성숙의 과정입니다. 인간 스스로 감사함을 통해 삶이 풍성해지는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어디에서 빵을 사다가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예수님과 제자들은 결코 부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는 곳마다 신세지며 다녔을 겁니다. 그런데 마치 “나 돈 많아. 빵 파는 데만 있으면 사다가 먹이자” 하는 것처럼 말하십니다. 이건 진짜 물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서는 제자들을 시험하려고 물으셨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의 시험에 제자들이 어떤 답안지를 제출했는지 봐야겠지요? 빌립은 눈치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 냅니다. ‘빵이 적어도 이백 데나리온 어치는 최소한 필요하겠습니다.’ 안드레도 가진 것을 계산합니다.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정확하게 현실을 파악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 현실이 어렵다고 보고합니다. ‘이걸로는 아무 소용도 없겠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이 ‘너희들 현실 파악을 얼마나 잘하고 있느냐?’였을까요? 아닙니다. ‘현실을 파악해 보니 뭐다? 고난이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겠느냐?’ 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고난 앞에서 어떻게 하겠느냐를 묻고 계신 겁니다. 그리고는 고난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직접 보여주십니다. 이게 오병이어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초라한 오병이어를 들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감사는 나에게 주어진 것을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시작됩니다. 나를 과대평가하지도 않고, 초라하게 과소평가하지도 않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지금의 현실을 똑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나중에 뭘 주시겠지’도 아니고, ‘이게 다 복 주시려고 그런 거야’도 아닙니다. ‘뭔 뜻이 있겠지’도 아닙니다.

그렇게 나를 제대로 냉정하게 안 뒤에, 그것 그대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렇게 감사한 뒤에,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삶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바뀌게 됩니다. 과대평가도 하지 않고, 과소평가도 하지 않고, 뜬구름잡는 헛된 기대를 소망인 양 붙들지도 않습니다. 안타까운 삶의 현실 앞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감사의 태도와 자세야말로, 우리 삶 속에서 우리 손으로 일으킬 수 있는 기적입니다.

5.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다른 부분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공관복음서에는 없는 이야기가 추가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하니까, 예수님이 산으로 도망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병이어 기적의 핵심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감사’입니다. 고난 앞에서 감사하는 태도입니다. 감사로 만들어가는 새로운 삶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감사를 보고, 감사를 본받으려 하지 않고, ‘예수께서 행하신 표징’만 봤다는 겁니다. 진짜로 봤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감사와 그 감사로 이루어지는 완전히 다른 삶의 모습’인데, 그것을 봤어야 하는데, 기적만 보고, ‘와~ 저런 기적을 우리도 누려보자~’ 하고는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했다는 겁니다.

감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왕으로 삼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맞서 살아가는 내 삶에, 하나님이 무슨 도움이 될까?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감사는 더더욱 아닙니다. 내 삶의 축이 ‘세상과 나’로 설정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삶의 축이 ‘하나님과 나’로 설정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환경이나 삶의 현실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삶의 축이 ‘세상과 나’로 설정되어 있으면, 하나님은 ‘세상과 나의 관계’를 위한 도구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삶에서의 감사는 진짜 감사가 아니에요. 아까 처음에 ‘고난의 잘못된 의미’를 말씀드렸죠? ‘이 고난은 나중에 복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다’ 같은 식의 의미 말이죠

말씀 처음에 ‘감사는 기쁨에서 나오고 행복에서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고난을 감사로 승화시키기 힘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고난은 결코 기쁘지 않고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삶의 축이 ‘세상과 나’로 설정되어 있으면, ‘고난이 나에게 무엇을 주느냐?’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이 주는 ‘무엇’은 철저하게 세상적인 무엇입니다.

그런데 삶의 축을 ‘하나님과 나’로 설정하고 나면,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사랑이 깊어진다’를 생각하게 됩니다. 기쁨의 측면이 차원이 바뀌는 겁니다. 그때 바로 고난이 기뻐질 수 있습니다.

6.

오늘 말씀 제목을 ‘압도적 감사’라고 적어봤습니다. 요즘 젊은 아이들 사이에서 ‘압도적’이라는 말이 유행이랍니다. 저도 유행 좀 따라 해 봤습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감사는 대충대충 설렁설렁 하는 둥 마는 둥 그런 감사가 아닙니다. 좋은 일 있고 즐거운 일 있으며 감사하다가, 힘들고 괴로우면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런 식의 감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압도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내 삶을 철저하게 살피고, 모든 일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사랑으로 단단해질 수 있는 데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 감사입니다. 모든 일에 압도적으로 감사하는 우리가 됩시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오병이어의 기적이 기쁨이 행복이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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