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에서 수영하며 물을 잡는 어린이 논학교 아이들 ⓒ정아름

소농두레에서 사회적 농업을 시작한지 만 4년이 되었다. 나는 어린이 논학교를 맡고 있다. 아이들 10명 정도를 모집하여 1년의 벼농사를 함께 짓는다. 한 달에 두 세 번 정도 주말에 만나 논 50평에서 농작업을 한다. 상토 채취를 시작으로 모판 내기, 손모내기, 낫으로 벼베기, 수확한 쌀로 밥을 짓는 것까지 등 모든 과정을 손과 발로 해낸다. 날씨가 더워지거나 일이 많으면 힘들어 할 때도 있지만 어떻게든 꾸역꾸역 마무리를 한다.

아이들이 벼농사를 즐겁게 하기 위한 방법이 없을까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은 아이들이 논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논에 와서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마음껏 뛰노는 것이다. 30분 정도 뛰고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근처에 산딸기가 있으면 따서 먹기도 한다. 나무를 타며 오르내리기도 한다. 빈 논을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도 한다. 논흙으로 공을 만들기도 하고 갈아서 부드러미(아이들이 부드러운 흙에 붙인 이름)를 만들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아이들은 논과 ‘이물어진다’. 시골이라 논이 있는 풍경에는 익숙하지만 막상 논흙을 밟아 보거나 벼꽃이 피는 것을 본 친구들은 없었다. 익숙하지만 먼 것이다. 1년 동안 벼농사를 지으며 논을 누비고 다니다 보면 아이들에게 논은 그야말로 놀이터이자 친숙한 풍경이 된다.

아이들에게 배운 것도 많다. 아이들은 모든 일들을 놀이로 만든다. 특히나 농기구는 아이들의 좋은 놀이감이 된다. 가령 삽과 괭이를 쓰는 날이면 어김없이 삽을 타고 놀거나 괭이를 가지고 논다. 대나무를 사용하는 날이면 대나무로 집을 짓거나 림보놀이를 한다.

심지어 하루 종일 걸리는 벼베기작업을 하는 날에도 미로 통로를 만들어 놀이를 한다. 자기들만의 룰을 만들어 아이템을 먹고 뭐 어쩐다나. 뒷정리는 차치하고 아이들이 재밌게 노는 것을 보면 신통하다. 이런 장면들은 모든 것을 일로만 생각했던 나를 다시 처음 농사짓는 마음으로 돌아가게 해준다.

이게 일을 하는 건지 노는 건지 알 수 없는 어린이 논학교인데, 신기하게도 아이들이 지은 논의 벼들은 더 튼튼하다. 3년 전에 비가 50여일 내렸던 때, 대부분의 벼 수확량이 절반으로 줄었었다. 논학교와 똑같은 종자로 바로 옆 논에서 농사지은 우리집 벼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런 때도 논학교의 수확량은 평년수준으로 나왔다. 따로 거름을 넣지도 않았지만, 마치 거름을 넣은 것처럼 포기분얼도 훨씬 많이 하였다. 아직도 그 이유를 모르겠지만, 아이들의 기운으로 지어서 그렇다고 결론을 낼 수 밖에 없었다. 함께 농사 지은 아이들에게는 어떤 것들이 남았을까.

관내 초등학교에서 생태텃밭 교육과정을 진행하고 있다. 학교 안에 텃밭, 텃논을 조성하여 학생들과 제철에 맞게 씨앗과 모종을 심고 수확한다. 간단한 요리를 해먹기도 하고 수확해서 바로 씻어 먹기도 한다. 이번에 수업을 했던 학교의 선생님께서 문자를 하나 보내셨다. 1년 동안 감사하는 말과 함께 학급 신문이 있는데 그 중에서 텃밭에서 했던 내용만 간추려서 메일로 보내셨다는 문자였다. 나도 감사 인사를 보내고 메일을 열어 확인해 보았다. 수업 중에 나온 이야기와 농작업들을 사진과 함께 꼼꼼하게 정리해주셨다. 놀랍고 감사하고 뿌듯한 마음과 함께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왜 아이들과 농사를 짓고 있을까. 아이들은 무엇을 느끼며 배웠을까.

▲ 수확한 쌀로 직접 불을 때서 밥을 짓는 학교 아이들 ⓒ정아름

어린이 논학교와 학교의 생태 텃밭 교육을 시작할 때에 ‘기후변화’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기후 변화에 대해 공부를 하면 할수록 ‘책임’, ‘전환’이라는 단어가 머리 속에 맴돌았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기후위기는 먹거리 위기’라는 생각으로 아이들 스스로가 자신이 먹을 것을 길러 먹을 수 있는 능력도 갖추길 바랐다. 꽤 대의적인 면을 추구했던 것 같다.

그런데 몇 해의 교육을 거듭하면서, ‘농사를 통해 그저 자연을 만나게 해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라고 생각이 정리되고 있다. 아이들이 이랑을 만들고 모종을 심다 보면 손과 신발에 흙물이 든다. 여전히 흙이 더럽다고 생각해서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다. 땅을 파다가 나오는 벌레에 기겁하는 아이들도 있다. 풀독에 약해 여름철 텃밭에 얼씬하지 않으려는 아이들도 있다. 질척이는 논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도 조금씩 흙이 더럽지 않고 생명을 키워내는 공간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있다. 과자만 좋아하는 친구가 배추전도 맛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을 본다. 딸기는 찬바람 부는 겨울이 제철인줄 알았지만 따뜻한 햇살에 익어가는 것을 알게 된다.

‘기후변화를 이겨내야 하니까 농사를 지어야 해’라는 말을 하는 것보다 ‘농사를 짓다 보니 밭, 논, 흙, 땅이랑 더 가까워졌어요’라는 말을 듣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한 해 두 해 농사를 짓다가 이 아이들이 커서 책임을 느끼는 시기가 되면 자연의 소중함을 지킬 거라 생각한다. 그것이 ‘기후위기’ 시기를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힘과 변화의 시작이 될 거라 여겨진다.

어느 날 학교 수업을 하러 갔다. 늦가을 산 너머로 비치는 햇살에 아침 안개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었다. 텃논의 벼는 조금씩 수확 중이고, 밭에는 고구마와 배추, 가지가 수확을 기다리고 있고, 단수수에는 내년에 쓸 씨앗이 익어가고 있었다. 황금색과 푸른색이 대조되어 따뜻해 보였다. 참 포근한 풍경이었다.

수업 시간에 맞추어 달려오는 아이들과 선생님이 텃밭에 들어서자마자 다같이 ‘아름답다’고 탄성을 질렀다. 이런 풍경이 아이들의 가슴 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벅차올랐다. 아이들이 이 아름다움을 계속 간직했으면 좋겠다.

‘기후변화’, ‘기후위기’라는 키워드는 이제 이슈를 넘어 트렌드가 되었다. 기후와 환경에 대한 각종 강의와 매체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여전히 ‘책임’과 ‘전환’의 관점보다는 ‘기회’와 ‘성장’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 세대가 겪어내야 할 고통의 수준은 최악이라는 시나리오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책임’을 가져야 하는 지금 시대의 어른들에겐 다른 선택은 주어지지 않았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엇을 남겨주고 싶은가. 나는 ‘자연은 생명을 품은 공간이자 친구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남겨주고 싶다. 그게 농부로서 ‘책임’을 지는 거라 생각한다. 거기에 해답의 실마리가 있다고 믿는다. 

▲ 학교 생태텃밭, 텃논의 아름다운 풍경 ⓒ정아름

유대은(기장 총회사회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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