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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이 전도되지 않기를평화를 짓는 농부이야기 8
유대은(기장 총회사회선교사) | 승인 2024.02.17 03:27
▲ 경운기는 철저히 농민을 돕는 위치여야 한다. ⓒ정아롬

집 마당에 있는 조그마한 텃밭에서 소꿉장난처럼 시작했던 농사가 나에겐 첫걸음이었다. 규모도 작았고 가족들 먹을 거라 비료, 농약은 물론 비닐조차 할 필요가 없었다. 울타리 안에서는 풀이 내 무릎까지 자라도 나무랄 사람이 없으니 천하태평했다. 몇 년 후 귀농하여 처음 얻게 된 300여평 밭은 집에서 거리가 있어 1주일에 한 번 정도 기웃할 수 있었다. 우리 먹을 것을 아무런 투입 없이 재배할 수 있었다.

문제는 오뉴월 더위와 장마 기간에 생겼다. 심었던 모종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풀이 말도 못하게 자랐다. 농작물 주변은 낫으로 베어 눕혀 주었지만 일주일 뒤에 가보면 다시 제자리였다. 더구나 긴 밭둑은 손으로 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며칠의 고심과 주변 농부들의 조언 끝에 예초기를 구매했다. 생애 첫 농기계였다. 밭둑이 불과 몇 분 만에 깔끔하게 되었다. 예초기라는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기계의 힘은 놀라웠다. 다양한 날을 바꿔가며 원하는 만큼 작업이 가능했다. 심지어 씨앗을 뿌리기 전 아주 깨끗한 상태로 이랑을 정리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체력 소모도 적을 뿐 아니라 능률도 올랐다. 점점 기계의 의존도가 점점 올라가게 되었다. 벼농사를 시작하고 나서는 경운기를 찾기 위해 중고 사이트를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경운기를 두레에서 빌려서 사용하곤 했지만 바쁜 시기에 경운기를 빌려달라고 하는 것이 미안했다. 결국 당근마켓을 통해 중고경운기를 구입하였다. (농촌 당근마켓에서는 농기계도 거래한다!) 집에 큰 농기계 하나가 떡하니 자리 잡았다. 경운기만으로도 충분한 만큼의 농지규모이기에 더 이상 거대한 기계는 들이지 않겠지만 농사철만 되면 나도 모르게 이리저리 농기계 써칭을 하고 있으니 웃길 노릇이다.

기계의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그만큼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 그걸로 괜찮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새 내가 농기계를 운용하는 게 아니라 농기계에 나를 맞춰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써레질을 할 때도 그랬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경운기를 운전할 때면 쉬는 시간 없이 몇 시간씩 운전대를 잡고 있는다. 동력 탈곡기를 쓸 때는 가히 허리 한번 펴지 않고 물량이 끝날 때까지 볏단을 멕이고 있다. 일은 빨리 끝나지만 끝나고 나면 기계 속도에 맞추느라 무리했던 허리가 뻐근 해진다. 기계가 사람을 운용하고 있다. 이대로 괜찮을까.

▲ 볏짚으로 덮어둔 마늘 밭 ⓒ정아롬

처음 얻게 된 밭은 일명 ‘영농조건불리농지’이다. 경사도가 심한 농지라 농기계 작업이 힘든 농지를 말한다. 경운기로 밭갈기를 해본 적이 있으나 굉장히 위험했고 그 뒤로는 작업하지 않는다. 자연스레 괭이, 낫 같은 농기구와 예초기로 농사를 짓게 되었고 자연재배에 가까운 밭이 되었다. 손으로 풀을 메주고 덮을 수 있을 만큼의 면적이라 정성껏 밭을 가꿀 수 있었다. 첫해 심은 양파는 거름기가 없어 엄지손가락만한 크기로 거두었지만 해마다 땅심이 커져 작년에는 아이의 주먹 크기까지 성장한 것을 보았다. 처음 길렀던 토마토의 맛은 시중에서 맛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맛이었다.

경운을 하지 않으니 재밌는 일도 있다. 작년에 캐지 못한 마늘이 여기저기 올라오거나 뽑지 않은 무에서 싹이 자라 노란색꽃을 피운다. 의도치 않게 섞여서 작물들이 자랐다. 경운기가 사라진 자리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그래, 어쩌면 처음 농사를 지으려고 했던 건 이런 풍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여기저기 정돈되지 않아 보이지만 생명력이 꿈틀대는 것을 보고 기분 좋았다. 그러나 농사철의 육체적으로 힘이 달리게 되면 경운기를 자꾸 사용하고픈 유혹에 빠지는 내 자신을 보게 된다.

그래서 농기계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몇 가지 나름의 방법을 정했다. 논은 추수가 끝나고 물꼬를 막아 빗물을 가급적 가두어 두기로 했다. 그러면 흙이 조금이라도 물을 머금고 있어서 기계 사용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밭에서는 높은 이랑이 필요한 작물을 심을 때와 꼭 경운이 필요한 경우에만 사용하고 흙을 너무 곱게 치지 않고 굵게 한번만 친다. 그리고 작부 순서를 잘 짜는 것만으로도 줄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고구마를 호미로 캐고 나면 자연스레 이랑이 사라지고 경운의 효과가 있어 밀, 보리 뿌리기 좋은 상태가 된다. 밀, 보리는 괭이로 골만타서 뿌리고 덮으면 되기에 굳이 경운기를 쓸 필요가 없다. 예초기 사용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면 줄일까 생각하다가 볏짚과 마른 풀이 있는대로 겨우내 덮어주고 있다. 발아되는 풀씨가 적어지니 예초기 사용시간도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덮개풀들이 썩으면서 땅에 양분 공급도 해주니 일석이조의 방법이다. 이런 방법도 내가 적은 규모의 농지를 경작하는 소농이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농기계 자체가 무조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경계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기계에 맞춰지는 것이다. 농사를 돕는 위치에서 사람을 이롭게 해주어야 하는 게 농기계의 숙명이다. 자칫 그 위치를 넘보지 않도록 농부로서 처신을 스스로 가다듬어 본다. 이제 농한기가 끝나고 입춘이다. 올해도 모든 농부님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하기를.

유대은(기장 총회사회선교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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