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칼럼
‘개인구원’이라는 게 존재하긴 해요?(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 27: 성소수자 이슈를 통해 구원에 대해 생각하다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 승인 2024.03.08 05:22
▲ 이동환 목사에 대한 총회 재판위원회의 최종 선고가 진행되었던 감리교 본부에는 이동환 목사를 지지하는 이들이 모여 출교 철회를 촉구했다. ⓒ임석규

1.

이 연재칼럼의 제목이 〈(성)소수자와 그리스도교〉인 만큼 아무래도 지난 3월 4일에 일었던 이동환 목사님 감리교 출교 최종 확정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겠습니다. 당일 저녁 기도회 설교의 표현대로 ‘서울의 빌라도’가 내린 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하구요.

출교를 했다는 건 이동환 목사님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말이니,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동환 목사님이나 이동환 목사님을 출교한 사람들 둘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겠습니다. 대답이야 자명하죠. 그리스도교가 사랑과 환대의 종교인, 또는 그렇다고 자칭하는 이상.

판결은 월요일에 났지만 엊그제까지 그리스도교 단체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단체나 정당에서도 비판 논평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판결을 보도하는 매체의 SNS에서는 댓글 논쟁도 꽤 치열하구요. 그만큼 이 판결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뜨거운 주제이고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관심이 가는 주제인가 봅니다.

2.

그리스도교의 지평에서 성소수자 이슈가 이렇게나 뜨거운 이슈인 걸 느끼면서 드는 생각 중에 하나를 제목으로 잡아 보았습니다. 이게 뭔가 하실 수도 있겠는데요.

‘개인구원’이란 말은 그리스도교의 지평에서 참 많이 듣게 혹은 하게 되는 말이지요. 보통 이 말은 ‘사회참여’라는 말과 짝을 지어서 나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는 둘 다 잘 해야 한다거나, 혹은 ‘개인구원’이 원래 해야 할 일이고 ‘사회참여’는 부수적인 일이라거나, 그런 말에 대한 반작용으로 ‘개인구원’만 열심히 하면 뭐하냐라거나 하는 말들이 꽤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소수자 이슈를 염두에 두면서 구원이란 말을 생각하게 되면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개인구원’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회참여’라는 말과 짝을 지어서 나오는, 즉 ‘사회’라는 말과 뭔가 대조 혹은 반대되는 영역으로 지칭되는 ‘개인’ 영역에서의 구원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겁니다.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신다는데 그게 ‘개인구원’ 아니냐 그런데 그게 존재하기나 하냐니 이 무슨 망발인가라고 이야기할 사람들이 없지 않을 텐데요(이 글의 독자분들 중에선 그리 많지 않을 것도 같습니다만). 오히려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신다니까 그렇다면 더더욱이나 방금 윗 문단에서 언급한 의미로서의 ‘개인구원’은 존재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3.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신다니 성소수자의 영혼도 구원하시겠죠. 그런데 성소수자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성소수자로 살아도 괜찮다고 인정받는 일 없이 가능할까요. 그것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성소수자의 영혼에 끼치는 가장 큰 어두움 중의 하나일 터인데 말입니다.

이건 반대쪽, 즉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은 죄라고 바득바득 소리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 사람들의 논리대로라면 구원이란 죄를 ‘회개’해야 가능한 것일 테니, 결국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삶을 완전히 소멸시켜야만 가능한 일일 테니까요. 완전한 인정이냐 완전한 불인정이냐의 차이는 있어도 성소수자라는 정체성이 그 사람의 영혼구원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는 건 동일하다는 이야깁니다.

그렇다면 그 영혼 구원이라는 게 ‘사회참여’ 따위의 말과 어떻게 대조나 반대 구도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성소수자로 살아가면서 사회적으로 차별을 겪고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인정을 받기가 어렵다라는 문제가 영혼구원의 핵심 문제 중 하나이니 애시당초 사회적 차원과 근원적으로 엮인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면 앞에서 이야기한 의미의 ‘개인구원’이란 말은 이 지점에서 성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성소수자뿐만 아니라 다른 소수자들을 두고서도 같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들 역시 사회적으로 차별을 겪고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는 인정을 받기가 어려운 사람들이니 말입니다. 그러면 성소수자를 비롯한 여러 소수자들 말고 다른 사람들에겐 ‘개인구원’이란 게 말이 될까요.

얼핏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다 싶지 않으신가요? 하느님의 구원이라는 게 이 사람에게 따로 저 사람에게 따로 이렇다는 건 좀 이상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것 말고 좀 더 깊이 따져봐야 되겠다 싶은 것이, 소수자들의 구원이 그들의 삶 안의 사회적 차별과 불인정의 문제와 연관이 된다면, 그 차별과 불인정은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러면 소수자들의 구원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어느 지점에서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 되겠죠. ‘회개’라는 단어가 바로 여기서 필요하게 될 테구요. 그렇게 생각하면 더더욱이나 ‘개인구원’이란 존재할 수 없는 말이 될 겁니다.

그래서 서두에 언급한 ‘서울의 빌라도’를 비롯해서 출교 판결을 내린 사람들이나, 그런 판결을 하라고 고발을 했다는, 심지어 다른 교단에 간 뒤에도 고발자라고 계속 얼굴 들고 다녔다는 사람들이나, 성소수자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는 사람들 등등, 이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겁니다.

“구원 안 받으실 거에요?”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황용연(사회적 소수자 선교센터 무지개센터 대표)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