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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하늘과 죄로 가득한 땅의 이분법을 넘어주기도문 연구 2
김진호 | 승인 2005.11.27 00:00

주기도나 유대 기도문에는 ‘신 부재’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으나

「마태오복음」은 ‘주의 기도’를 재현해내면서 하느님 호명을 할 때, “하늘에 계신”이라는 부가어를 첨부한다. 물론 헬라 도시적 배경을 가진 「루가복음」에는 하늘 이미지가 없다. 반면 「마태오」에는 하늘 표상어가 10절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이것은 이 텍스트가 유대 문화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많은 주석가들은 그런 점에서 예수도 하느님을 하늘 이미지와 결부시켜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한데 보다 중요한 것은 「마태오」든 「루갯든, 혹은 「디다케」(‘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으로, 통상 그 첫 단어인 ‘디다케’<=가르침>로 줄여서 부름)든, 주의 기도를 기억하고 있는 테스트들은 한결 같이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구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이 기도 속에는 ‘신의 부재’의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는 것이다.

동시대 유대교 일반도 이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끝없이 계속되는 나라 없는 백성의 수난(주전 586년 이후 예수 당시까지, 실은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기까지 그들은 줄곧 식민화된 백성들이었다)을 겪으며 유대인들은 그것이 자신들이 죄를 지은 까닭이며, 그런 연고로 신이 깊이 참으시는 중에 있다는 신앙을 고백한다.

유대 기도문이 체제유지를 바라지만 주기도는 체제전복을 기원

그러나 그들이 남긴 기도문 속에서 ‘신 부재’의 절망의 골은 그리 깊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전체의 절반을 ‘감사기도’로 할애한다(18개조의 기도문 가운데 9~18조가 감사기도). 그 첫 번째 감사는 재물의 축복에 관한 것이다. 제9조, “올해도 우리를 축복하여 주소서. 오 주 우리의 하느님이시여. 그리고 당신의 보고(寶庫)에 있는 재물로써 이 세상을 만족하게 하여 주소서.” 그 나머지는 하느님이 유대 민족의 권위를 회복시켜 주고 있다거나, 자신들이 유대교 신앙을 지키고 있는 것에 관해서 감사하는 내용이다. 곧 이 기도문은 체제의 현상 유지를 전제한다.

반면 주의 기도에서 하늘과 땅은 대립한다. 땅에는 아직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지 않았고, 그럴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그 나라의 도래란 ‘염원의 회복’이라는 점에서만 실현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예수가 가르쳐준 기도는 유대교 신앙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을 담고 있다.

「마태오」, 「루갯,「디다케」에는 모두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소서”라는 구절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잇고 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은 여전히 거룩하시다는 뜻이겠다. 땅에서 그렇게 철저히 훼손된 하느님의 이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선 여전히 거룩하다는 암시다.

그렇게 저놈들이 제멋대로 하느님을 능멸한다 해도, 그래서 수많은 고난당하는 대중의 입에서 ‘하느님 맙소사, 하느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도처에서 참을 수 없이 터져 나온다 해도, 아무리 하느님이 없는 세상처럼 보인다 해도, 하느님이 계신 하늘에선 여전히 당신의 권위와 당신의 뜻이 굳건히 세워져 있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고백은 차라리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간절한 절규에 가깝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땅은 악마의 규율 속에 있다. 그래서 기도자는 이처럼 땅의 절망 상황에 대해 고백한다. 땅의 질서를 수긍하는 유대교의 축복과 감사에 대한 기도와는 달리 말이다. 그리고 땅의 질서 아래서 얻고 있는 유대교 당국의 추상적인, 거창한 감사와는 달리, 삶 하나하나를 질곡 속에 붙들어 매고 있는 땅의 질서로부터 벗어나기를 염원한다.

 바리사이파 운동은 해방운동이 아니라 체제유지를 위한 종교운동으로 나아가

땅의 질서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보자. 주전 4세기 이래 팔레스틴에는 수많은 민중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주전 1세기는 기층대중이 계급적으로 정치 세력화되는 양상이 뚜렷하다. 그러나 그 모든 민중의 꿈과 소망은 철저히 짓밟혔다. 이 시기 묵시문학 운동이 대두하고 활발히 전개됐다는 사실은 대중의 묵시적 꿈이 얼마나 널리 유포되어 있었는지를 시사한다.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고, 묵시적 텍스트들에서 볼 수 있듯, 메시아적 존재는 구체적인 인물로 표상되기보다는 익명의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명시된 특정인이 메시아로 받아들여졌을 때 그 실패의 좌절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다. 인자니, 하느님의 아들이니, 다윗이니 메시아니 하는, 특정인을 가리키는 표상이 아닌, 상징어의 활용은 실패로부터 하느님을 분리시키려는, 그리하여 대중이 절망으로부터 희망을 전취하려는 욕망을 담고 있다.

바리사이 운동은 이런 꿈과 좌절의 공간에서 역사의 무대 위로 등장했고 널리 확산되었다. 하여 바리사이는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대중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종교적 세력이었다. 비록 당시 이들이 하나의 정강을 갖는 정파는 아니지만, 이 운동의 전반적 특징을 묘사할 수는 있는데, ‘율법을 통한 대중의 도덕 재무장화 운동’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것은 바리사이가 율법을 대중에게 (제의적 규율이라기보다는 일상적 규율로서) 내면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중적 내면화의 장은 ‘회당’이었다. 특히 촌락의 회당은, 당시 촌락사회의 사회적 통합의 센터였다고 할 수 있다. 각 촌락은 회당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있었고, 촌락 간에도 대체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바리사이가 가르치는 ‘율법’은 바로 그런 공감대의 토양이었다.

물론 개개 율법을 삶에 적용하는 데는 해석이 필요했고, 각 지역의 명망 있는 바리사이파 라삐들의 율법 주석은 이 필요를 채워주었다. 요컨대 해석은 분명 지방색을 띠었다. 하지만 “안식일을 성별하여 지켜야 한다”는 식의 신앙적 규범이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가르는 구체적인 기준이 되었던 것처럼, 유대 사회는 바리사이 운동을 통해서 그 결속이 더욱 구체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 이처럼 ‘바리사이적 율법의 눈’이 예수 당시 하늘과 땅을 묶는 질서였다.

예수는 주기도를 통해 해방을 위한 의식을 고취시켜

로마 황제가 파견한 총독과 헤로데 정부를 비롯한, 다양한 기득권 집단들은 자신의 위세를 보이기 위한 대규모 건축사업 등을 앞다투어 시행했고, 이는 대중에 대한 무분별한 부역동원을 강제하였다. 또한 인근 지역의 전쟁을 위한 군사동원도 적지 아니 있었다. 게다가 전염병, 기근, 기타 자연재해 등 만성적이고 거의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재앙에 대한 자정 능력을 박탈당한 촌락사회는 급속히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산업사회에 비견할 만큼 촌락의 해체가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만큼 사회의 자기 조절 능력이 약화된 상황에서 이러한 양상은 심각한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어떤 학자의 표현대로 동시대 팔레스틴 사회는 존재의 뿌리를 근절당한 사람들로 들끓었다. 이것이 당시 대중이 체험하고 있던 땅의 질서였다. 한마디로 그것은 ‘고통의 체제’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사이 운동은 체제가 방기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사회적 해체의 위기를 억제하는 심리적 기재로 작동하였다. 그것은 대중의 메시아적이고 유토피아적 대망을 율법적 질서관으로 대체시킴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질서관은 대중이 역사의 주역으로 부상하는 것을 가로막는 대가를 치뤄야 했다. 즉 대중의 사회적 박탈을 초월하는 유토피아적 꿈이 대중 자신의 역사적 행위를 통해서 실현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세례자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도 이러한 하늘과 땅의 바리사이식의 연대를 극력 비판했다. 아니 예수의 운동은 요한보다 훨씬 명시적이고 의도적으로 율법적 질서관의 해체를 추구했다. ‘죄인과 사귀고 먹기를 탐하는 자’라는 세간의 품평은 그 운동이 얼마나 기성의 질서에서 일탈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준다.

국부적 공간에서 잠재적인 꿈을 실현하는 것으로 기획된 대안적 공동체를 구성하기보다는, 보다 근본적으로 대안적 세계를 바라는 대중의 염원을 고취시켰으며, 그런 꿈 아래 대중을 결집시키고자 했다. 바로 그러한 결집 과정의 어느 지점에서 공동의 기도문이 필요했던 것 같고, 그런 맥락에서 질서에 도전적인 공동의 기도문이 탄생한다.

이 기도의 어느 대목에서도 질서의 재구축을 기도한 흔적이 없다. 도리어 이 기도는 현재 겪고 있는 질곡의 근본적 극복을 향한 꿈이 실려 있고, 그것이 땅과 대립된 ‘하늘’이라는 표상으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주류 기독교도 여전히 바라사이적인 종교 운동을 하고 있어

오늘도 좌절된 희망의 지평이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라는 점은 변함없다. 적어도 바리사이적 눈이 아니라, 예수의 눈, 민중의 눈으로 보면 그렇다. 특히 경제적 지구화와 무기체제적 지구화의 광풍이 휩쓸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땅은 더욱 극명하게 반신(反神)적인 공간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신의 부재’는 오늘 우리의 공통감각이다.

더구나 오늘 우리는 땅과 분리된 ‘하늘’ 표상에서 유토피아를 상상할 수 없다. 하늘은 땅에 의해 훼손되지 않은 채 남은 유일한 공간이 아니다. 아니, 하늘은 땅과 야합하여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근대 문명 이후 하늘이 더 이상 신비의 영역이 될 수 없었던 탓이다. 오히려 현대는 하늘을 정복한 자의 소유라고 할 만큼, 하늘은 탈신비화된 공간이며, 그런 점에서 하늘과 땅의 공모 아래서 오늘날의 지배는 구축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하늘을 사칭하는 꿈의 담론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들이 유토피아적이기는 하지만, 현실을 넘어서는 상상을 허용하는 담론의 소재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하늘 담론은 탈신비화된 하늘로부터 위생처리된 공간, 즉 철저히 탈역사화된 진공의 공간으로서의 하늘을 무대로 한다. 땅에 의해 하늘이 오염되었다는 문제인식은 아직 오염되지 않은 다른 하늘을 가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는 관념적 종교 운동을 넘어 해방공간을 만드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여기서 종교적 담론으로서의 하늘, 오염되지 않는 다른 하늘 담론은 사람들의 체험 영역 외부로 종교 담론을 밀어올려야만 했다. 즉 역사적 연결고리를 잃어버린 종교담론이 바로 그리스도교의 하늘 담론인 것이다. 예수 시대에 바리사이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는 오늘날 하늘과 땅의 이러한 야합을 조장한다.

사람들이 체험하는 하늘은, 땅에 의해 오염된 곳인 동시에, 땅을 오염시키는 곳이기도 하다. 왜냐면 그것은 절대권력의 공간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이런 절대권력의 지배와 직간접으로 공모한다. 그리고 주의 기도는 그런 시선으로 해석되고 있다, 아니 농락되고 있다. 하여 우리는, 예수처럼, 그를 따르던 공동체들처럼, 주의 기도를 다시 읽어야 한다. 하늘과 땅의 공모를 해체하는 시선으로 ...

김진호  kjh55940@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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