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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금으로 구입한 비행기 “조선장로호”<개신교 친일행위> 장로교회 편(03)
김승태 목사 | 승인 2008.06.23 05:56

   
▲ 영화 <청연>의 한 장면. 실존인물 박경원에 대한 기본 사실관계와 시대배경을 충실히 담아내지 못해 이른바 친일영화 논란을 빚었다.

새문안예배당 시국강연, “신체제의 기독교인”

장로교회는 1941년 4월 29일부터 30일까지 새문안예배당과 부민관에서 ‘장로회여자신도대회’를 개최하고, ‘국민총력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여자부’를 결성하였다.(「장로회보」1941년 4월 30일자, “여신도대회를 보고서.”)

첫날은 새문안예배당에서 이른바 ‘천장절 봉축식’을 갖고, 개회하여 총회연맹 이사장 곽진근 목사의 시국강연을 들은 다음, 자리를 부민관으로 옮겨 총독부측에서 미나미[南] 총독과 가와키시[川岸] 조선연맹사무총장, 미쓰하시[三橋] 경무국장, 마사키[眞崎] 학무국장, 후루카와[古川] 보안과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총회연맹 여자부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대회회장은 이순남, 부회장은 김마리아였다. 결성식을 마치고 일동 1천여명은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장 기타무라[北村]를 앞세우고 조선신궁에 참배하였다. 그리고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시국영화를 본 다음 ‘국방헌금’을 하였다. 이튿날에도 새문안예배당에서 시국강연회를 가졌다. 이 대회에서 연설한 연사와 주제는 다음과 같다.

유각경 : “천장절을 당하여”
곽진근(총회연맹 이사장) : “신체제의 기독교인”
구로키[黑木剛一, 해군대좌] : “세계 대세와 아(我) 해군”

이밖에도 후루카와[古川] 경무국 보안과장, 가쓰라[桂]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등이 시국강연을 하였다. 총회연맹 여자부의 결성은 노회연맹 여자부 결성과 각 교회 여자애국반 조직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총회연맹 이사장 곽진근과 여자부장 이순남은 공동 명의로 각 노회 연맹 이사장과 각 여전도 연합회장, 여자조역회 연합회장에게 “노회연맹 여자부 규약”과 “교회여자애국반 규약”을 보내면서 노회연맹 여자부와 교회여자애국반을 조직하고 보고하도록 공문을 보내고 있다.

(이러한 지시에 따라 용천노회는 6월 22일에 양시교회에서 여신도대회를 개최하였고, 경북노회는 6월 24일에 대구 신정교회에서 노회연맹 여자부 결성식과 시국대강연회를 개최하였으며, 7월 15일에는 평북노회가 선천읍북교회당에서 여신도대회를 열고 노회연맹 여자부를 결성하였다. 이밖에 황해노회는 8월 20일에 제일교회에서 경안노회는 10월 4일과 5일에 안동읍 법상동예배당에서 여신도대회를 열고, 노회연맹 여자부를 결성하였다.「장로회보」)

같은 해 10월 14일에도 총회연맹 이사장이 각 노회연맹 이사장에게 “노회연맹 여자부 상황 조사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10월 25일까지 상세한 보고를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장로회보」1941년 10월 15일자, “총련발 제57호.”)

“전시체제 실천성명” 헌납·금속품 공출

일제 경찰의 요청과 제29회 총회의 결의에 따라 조직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중앙상치위원회’는 1941년 8월 14일 서울의 총회사무실에서 위원회를 열고, “전시체제 실천성명서”를 결의·발표하였으며, 상치위원회가 실제적 총회 대행기관이 되기로 하고, 그해 9월 20일 평양에서 열기로 된 제30회 총회를 “시국정세”를 핑계로 무기 연기하였다.(「장로회보」1941년 8월 15일자, “총회연기”, 이 총회는 1941년 11월 21~26일까지 평양 창동예배당에서 열렸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0회 회록』, 1941)

.그리고 성명서에 부수된 “실천사항”에서 “시국봉사의 실천”으로 ‘애국기 헌납’, ‘금속품 공출’, ‘폐품 회수’를 넣었는데, 그 가운데 ‘애국기 헌납’을 실행하기 위해서 ‘조선장로교도애국기헌납기성회’를 조직하여, 그 해 말까지 최단 기간에 완수하기로 하였다.

(「장로회보」1941년 8월 15일자,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전시체제실천성명서” 및 “중앙상치위원회 부의 사항”, 이 중앙상치위원회 구성과 출석자는 다음과 같다. 곽진근 총회회장, 최지화 부회장, 조승제 서기-불참, 김석창 위원, 윤하영 위원 박래승 위원, 장홍범 위원-총회 포교계간사), 정인과 총간사, 고한규 장로-총회회계)

이러한 결의에 따라 8월 20일 상치위원들이 추천한 발기인들이 모여 ‘조선장로교도애국기헌납기성회’를 조직하고, 총독부로부터 기부금모금 허가를 얻어 그해 10월부터 본격적인 모금활동에 들어갔다.

(총회에 보고한 애국기헌납기성회의 ‘역원 조직’ 구성. 회장 : 정인과, 부회장 : 백낙준, 서기 : 장홍범, 윤치소, 총간사 : 오문환, 회계 : 이용설, 부회계 : 유각경, 간사 : 김락영, 박승준, 이사 : 김영도, 한석원.『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0회 회록』, 1941, p. 40).

총회 상치위원회는 10월 9일에도 회의를 열어 “애국기 헌납금 모집에 관하여는 각 노회에 명하여 각 교인 비례로 1인당 1원씩 헌납하기로” 결의하고, 10월 22일에 각 노회장회를 신문내예배당에서 개최하기로 결의하였다.(「장로회보」1941년 10월 15일자, “총회상치위원회의.”)

이 노회장 회의는 예정대로 모여 제30회 총회 일정을 정하고, 가와키시[川岸] 총력연맹 사무총장과 구라시게[倉茂] 조선군병무부장을 초청하여 만찬회를 열어 구라시게의 시국강화를 듣고, 만찬후에는 애국기헌납기성회 회장 정인과 목사로부터 “애국기기금과 애국운동기금 헌납”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장로회보」1941년 11월 12일자, “노회장 회의”, 이 회의에는 노회원 전원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던 순천노회와, 산서, 남만, 북만, 영구노회장만 결석하고 다 참석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참석한 노회장들은 각 노회 연맹장으로서와 각 노회장 및 기성회지방위원으로서 협조를 당부하고, 각 교회에서 11월중에 모금하여 11월 말까지 현금과 헌납자 명부를 총회에 보내기로 하였다. )

헌금으로 구입한 비행기 “조선장로호”

정인과 목사는 기성회회장과 총회연맹 총간사의 자격으로 장로회 각 교회 책임자에게 “장로교회애국봉사기금 조달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11월 중에 일제히 애국운동기금연보를 실시”하여 총회로 송금하고 보고서를 보내도록 지시하고 있다.(「장로회보」1941년 11월 12일자, “장로교회애국봉사기금 조달에 관한 건.”)

이렇게 모금한 금액으로 이듬해인 1942년 2월 10일에 “육해군에 애국기 1대와 육전기관총 7정의 자금으로” 15만 317원 50전을 헌납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1회 회록』, 1942, p. 50; 이렇게 바친 대금으로 구입한 비행기와 기관총에 대해서 일본해군성에서는 그 명칭을 “조선장로호”라 붙이고, 1942년 9월 20일 경성운동장에 80여명의 장로교 대표들을 초청한 가운데 감사장과 수납서 및 비행기와 기관총의 사진을 전달하는 행사를 치렀다.「기독교신문」1942년 9월 23일자, “의미 깊은 항공일에 빛나는 해군기 명명식, 장로회헌납 해군기 조선장로호로 명명”. 일본육군성에서도 그해 11월 17일에 용산연병장에서 경기도 내에서 헌납한 비행기 55대와 함께 명명식을 갖고 “조선장로호”라는 명칭을 부여하였다.「기독교신문」1942년 12월 2일자, “육군에 헌납한 애국기의 명명식, 대공에 불멸할 赤誠”)

그리고 그 후에 수입된 잔금으로 1942년 6월 19일 총회연맹 이사장 최지화와 기성회 위원 대표로 정인과ㆍ백낙준ㆍ이용설ㆍ오문환 등이 조선군사령부를 방문하여 육군환자용자동차 2대의 기금으로 2만 3천 221원 28전을 헌납하였다. (「기독교신문」1942년 7월 1일자, “황군 환자용 자동차 2대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헌납.”)

총회연맹 이사장 곽진근은 1941년 9월 24일부로 각 노회연맹 이사장과 각 연맹 여자부장에게 “부여신궁어조영 근로봉사에 관한 건”이라는 공문을 보내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2박 3일의 일정으로 각 노회 대표들이 ‘근로봉사’ 활동을 할 것을 통고했다.(「장로회보」1941년 10월 1일자, “총련발 제54호” ; 15일자, “총련발 제54호의 2.”)

물론 이러한 통보는 조선연맹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 행사는 예정대로 치러져 각 노회연맹 대표 72명이 참가하여() “국민총력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연맹 부여신궁어조영 근로봉사대”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전필순ㆍ조승제ㆍ곽진근ㆍ박석현 목사가 이끄는 4대로 나누어 신궁 터를 닦는 작업을 하고 돌아왔다.(「장로회보」1941년 10월 1일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0회 회록』, 1941, p. 42. “조련총 제141호.”, 장로회보」1941년 12월 10일자, “부여행.”)

앞에서 언급한 대로 “시국정세”를 이유로 무기 연기되었다가 10월 22일의 노회장 회의에서 회의 일정이 결정된 제30회 총회는 예정대로 1941년 11월 21일 평양 창동예배당에서 개회되었다. 총회장에는 최지화 목사가, 부회장에는 전필순 목사가 피선되었다.

이 총회는 둘째날 총회원 전원이 평양신사에 참배하고, 장대현교회당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창립 30회 기념식”을 갖고, “시간극복(時艱克服)”의 결의문을 채택한 다음 평안남도 경찰부 후카이[深井] 고등과장의 “시국에 대한 예수교 관계에 대하야”라는 제목의 시국강연을 들었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0회 회록』, 1941, pp. 4~5. )

제30회 총회에서 총회연맹의 이사장은 총회장이 바뀜에 따라 최지화 목사로 바뀌었지만, 총 간사직은 정인과 목사가 그대로 맡고 있었다. 이듬해 총회에 보고한 총회연맹 보고에 따르면 1942년 2월중에 “대동아전쟁의 목적 관철과 기독교도의 책무를 재삼 격려하기 위하여” 철도노선에 따라 5대로 나누어 다음과 같이 중앙에서 연사를 파견하여 “지방시국강연회”를 개최하게 하였다.

(1) 호남선 : 이종순, 박준승, (2) 경부선 : 구라시게(倉茂周藏) 소장(초청), 김락영, 오문환, (3) 함경선 : 전필순, 조승제, (4) 황해선 : 김응순, 최지화, (5) 경의선 : 가와키시(川岸文三郞) 중장(초청) 백락준, 한석원 제씨(『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1회 회록』, 1942, p. 49.)

교회 종 헌납, 통폐합

총회연맹은 4월 24일에도 각 노회연맹 이사장에게 공문을 보내 4월말 현재로 교회 종을 ‘헌납’한 상황과 종을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해서 조사하여 5월 5일까지 도착하도록 급히 조사 보고서를 보내도록 독촉하고 있다.(「기독교신문」1942년 4월 29일자, “총련발 제2호, 헌종상황 지급 조사 건.” )

5월 11일에도 총회연맹 총간사 정인과가 직접 각 노회연맹 이사장에게 “헌종보고서 독촉의 건”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내고 있다.(「기독교신문」1942년 5월 20일자, “총련발 제18호, 헌종보고서 독촉의 건.” )

이렇게 하여 떼어 바친 종은 총회연맹에 보고된 것만도 1942년 10월 15일 현재로 1,540개, 금액으로는 약 11만 9천 832원에 이르렀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1회 회록』, 1942, p. 50.)

이 무렵에 ‘신체제’에 적응한다고 하여 교회의 종을 떼어 바칠 뿐만 아니라 교회의 통폐합도 널리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경북노회 노회장이자 상무위원장이던 송창근 목사는 1942년 5월 7일자로 교회 폐지 및 병합에 관한 공문을 각교회 및 교역자 앞으로 보내, 폐지 병합되는 교회에서는 “쇼와 17년 5월 말 주일(일요일)까지만 예배회로 모일 것”을 지시하고 있다.(도충구,『대구남산교회 70년사』, 대구남산교회, 1987, p. 112 ; 이재원,『대구장로교회사 연구』, 도서출판 사람, 1996, pp. 204~206.)

장로회 제31회 총회는 1942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평양 서문외교회당에서 모였다. 이 총회에서는 김응순 목사가 총회장에 피선되고, 전필순 목사가 부회장에 유임되었으며, 김종대 목사가 서기에 피선되었다. 이 총회에서는 중앙상치위원으로 김만일 목사를 보선하였다.

이 총회에 경남노회장으로 참석하였던 김길창 목사는 경남노회 상황보고서에서 교회 상황은 “통제에 의하여 교회의 폐합을 실시한 결과 335교회 중 108교회의 감소를 보았다.”고 하고, 장래계획은 “교회 지도자 및 신도들을 노회 또는 지방적으로 각각 훈련하여 일본적 기독교 건설에 매진하고자 한다”고 하고 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1회 회록』, 1942, p. 75.)

이러한 교회 상황은 다른 노회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듯하다. 회의록에 첨부되어 있는 통계표에 따르면 장로교회 총수는 전년도 3,624개 교회에서 2,543개 교회로 30%가 줄고, 신도총수도 전년도 355,754명에서 249,666명으로 30%정도 줄었다.(『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1회 회록』, 1942, p. 84, “조선예수교장로회 통계표(1941년 4월 1일-1942년 3월 말일)

총회장 김응순 “기독교 일본화”에 힘쓰다

일제의 압력도 압력이지만, 지도자들의 부일협력에 회의를 느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총회장에 피선된 김응순 목사는 “신임 총회장의 포부”를 통해 “기독교의 일본화”에 힘쓰겠다고 말하고 있다.(「기독교신문」1942년 11월 18일자, “조선예수교장로회 신임 총회장 新森一雄(김응순) 氏의 포부.” )

그리고 이를 입증이나 하려는 듯 11월 23일 일본기독교단 제1회 총회 참석차 일본에 건너가 먼저 건너가 있던 총회 서기 김종대 목사와 함께 이중교에서 궁성 요배(23일), 메이지신궁 참배, 야스쿠니신사 참배(26일), 이세신궁 참배(29일)를 하고 돌아왔다.(「기독교신문」1943년 3월 3일자, “장로회 총회대표, 靖國神社 참배.”)

장로회 총회장 김응순 목사는 1943년 1월 11일에 중앙상치위원회를 열어서 이른바 “일본적 기독교”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을 결의하고 실천에 옮겼다.

(1) 2월 11일 12일 기원절을 기하야 이틀 동안 일본정신 체득을 목적으로 남자교역자연성회를 개최하기로 함.
(2) 금년도 장로회 신도생활 방침은 2월 11일 연성회 벽두에 발표하기로 함.
(3) 3월 10일 11일 육군기념일을 기하여 이틀 동안은 징병제취지 철저를 목적으로 부녀자연성회를 개최하기로 함.
(4) 순천노회를 전남노회와 합병...(중략)...
(5) 4월 3일 신무천황 제일을 기하여 총회장 인솔하에 전선 각 노회장 일행으로 성지 이세신궁을 참배하기로 함.
(「기독교신문」1943년 1월 13일자, “장로회 총회 중앙상치위원회 1월 11일 결의사항.”)

이러한 결의에 따라 2월 11일, 12일에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회 총회 연맹 주최 “노회대표자연성회”에는 22개 노회 회장, 서기, 회계 3명씩 70여 명이 참석하여 첫날 아침 총회연맹 이사장 김응순 목사의 인솔로 조선신궁을 참배한 후 개회식을 갖고 각종 시국강연을 하였으며, “전시포교지침 선포식”을 갖고 군부대견학도 하였다. 이 모임에서 강연한 연사와 주제는 다음과 같다.(「기독교신문」1943년 1월 20일자, “공보, 장로교회, 총회연맹발 제69호. 「기독교신문」1943년 2월 24일자, “장로회총련주최 노회대표 남자연성회 성황” 및 “장로회 지도자 연성회의 소감.”)

다케바(竹葉) : “황민(皇民)의 도”
구라시게(倉茂, 조선군보도부장) : “결전 태세와 제패”
미야우치(宮內, 조선신학원 교수) : “대동아건설과 종교”
정재면(함남 안변읍교회 목사) : “대동아 전도의 사명”
미우라(三浦, 조선연맹 본부 강사) : “황도와 종교”
도리가이(鳥飼, 총독부 교학연수소 학감) : “일본정신사”
야마구치(山口, 일본기독교단 목사) : “일본정신과 기독교”

김승태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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